저작권의 죽음을 꿈꾸며

- 어느 먼 앞날에 알량한 생각의 권리는 무덤 속으로 가고, 우린 좋은 건 무조건 함께 갖고 느끼게 되었나니


좋은 건 나누자.

내 것, 네 것이 아니라

우리 것.

함께 하는 것일 뿐이다.

함께 읽고, 느끼고

권유하는 것

왜 가운데 돈이 있어야 하나.

쓸모를 살리고

돈에서 벗어나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하자.

줄 수 있다는 것,

대가 없이 그냥, 그냥,

좋아서 준다는 것

사람이 사람인 이유일테니……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라온 2018-01-17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좋은 것을 만드는 것이 생업이고 그것으로 생존을 지탱받는 예술가, 창작자들을 위해서는 필요하죠.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에요.

kinye91 2018-01-17 08:21   좋아요 1 | URL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들의 생존, 생활에 필요한 대가는 반드시 지불해야 하죠. 물론 돈을 떠나 재능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요. 저작권이라는 것에 너무 옭아매여있지 않나 하는...

2018-01-17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7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형제1 - 문화대혁명기 고아가 되다

 

위화의 글은 읽기에 편하다. 간결하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문체가 편하게 읽게 만든다. 그는 비극을 다루면서도 비극에 온 마음이 빠져서 허우적대게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비극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우리나라 고전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해학'이 있다.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삶.

 

위화는 중국 현대사를 비켜가지 않는다. 그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럼에도 소설이라는 문학을 충분히 활용한다.

 

문화대혁명기때 중국인이 겪어야 했던 갈등, 혼란 등을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지는 않는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은 어떤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화의 수필이 중국에서 출간이 되지 않고 있지만, 이 소설 '형제'는 출간이 되었다고 한 글을 읽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무리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문학이기 때문에 허구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허구는 곧 사실이 된다. 문학적 허구는 문학적 진실이고, 이는 우리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을 이제 막 1권을 읽어서 뒤의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지만, 1권은 문화대혁명기를 중심으로 그것이 사그러질 때까지 어머니인 이란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이광두. 그리고 그의 형제 송강. 왜 성이 다른 사람들이 형제일까 했더니 어머니 이란이 송범평과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송범평의 죽음과 어머니 이란의 죽음을 관통하는 문화대혁명이 1권의 배경이다.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죄인이 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처음에는 단죄하는 처지에 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장발 손위와 그의 아버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자행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혁명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골고루 잘 사는 사회, 그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과거를, 출신성분을 가지고 그를 죄인 취급하는 것이 혁명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질문을 하게 하는 1권이다.

 

교사로 동네에서 인정받고 착하게 살고 있던 송범평, 그는 어느 순간 죄인으로 전락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지주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런 연좌제... 과거의 끈을 벗어던져도 자신을 옭아매는 집안 내력.

 

그의 죽음은 충분히 비극적이다. 이런 비극을 겪는 두 아이, 이광두와 송강은 이 비극에 온몸이 젖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기 때문이다. 아버지 송범평이 잡혀가 온갖 고초를 겪게 되는 장면에서도 너무도 천진한 이들 형제의 말과 행동때문에 우리는 비극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된다.

 

송범평의 죽음 이후에 어머니는 그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어머니 이란 역시 오래 살지 못한다. 송범평의 죽음 이후 7년 뒤 어머니 이란 역시 아들 이광두의 앞날을 걱정하며 송강에게 이광두를 잘 보살피라고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동네 양아치인 이광두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지극하고, 이런 이광두를 한 살 많은 송강이 잘 돌봐주겠다고 이란의 무덤 앞에서 다짐하는 장면으로 1권은 끝난다.

 

그런데... 소설은 이미 늙은 이광두의 시점에서 시작하고 이다. 그리고 곧장, 한 쪽이 지나자마자 과거로 돌아가 버린다.

 

소설 처음에서 이광두가 억만장자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이제 남은 가족이 아무도 없다. 송강 마저 3년 전에 죽었다고 나오니.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줄 가족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이광두의 과거 이야기로 시작하고, 전개된다. 우리의 양아치 이광두가 어떻게 성인이 되어 억만장자가 되는지, 그것과 중국 현대사를 연결지으며 읽으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2권과 3권에서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중국의 모습, 그 속에서 적응해가는 이광두의 모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적절하게 극복했는지... 그들은 모두가 골고루 행복한 사회를 만들었는지 질문을 하면서 읽어야겠다. (위화가 쓴 머리말을 보면 이미 답은 정해졌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은 충분히 된다고. 그렇게 우리네 삶은 모두들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특히 격랑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은 소설보다도 더 진한 이야기를 살아온 사람들인데, 이들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소설로, 영화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때로는 진한 슬픔을, 때로는 가벼운 웃음을, 때로는 쓴 웃음을 지닌 그런 이야기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고 있는데...

 

김훈이 쓴 이 소설 역시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온 가족의 이야기다. 마동수-마차세 부자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일제시대에 태어나 박정희가 죽은 해에 죽은 마동수는 흥남철수 때 가족과 헤어진 이도순과 만나 마장세, 마차세를 낳는다. 그러나 마동수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평생을 떠도는데, 그래도 정기적으로 집에는 들어오지만 그가 정착했다고는 할 수 없다.

 

죽음의 순간에도 홀로 죽어가는 그는 평생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어렸을 때는 일제시대라 제 장소를 찾지 못했고, 해방이 되어서는 전쟁이다 뭐다 하여 다시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삶.

 

이도순 역시 마찬가지다. 피란민이라는 존재는 이미 밀려난 존재다. 이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머무를 장소를 마련하지 못한다. 비록 남쪽에서 가정을 꾸렸을지라도 정신을 잃어가는 치매 상태에서 이도순은 피란 올 때 잃어버린 딸을 찾기만 한다.

 

죽을 때까지 살아온 남쪽이 이도순에게는 정착한 장소가 아니라 언제든 비워주어야 할 공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본래 살던 곳이 서울이었던 마동수가 일제시대와 전쟁을 통해 장소를 잃었다면, 이도순은 피란으로 장소를 잃었다.

 

장소를 잃은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던 곳, 그 공터에서 태어난 형제, 마장세-마차세. 이들 역시 부모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본디 가진 것이 없으면 정착하기 힘들다. 큰아들 마장세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외국에 남아 산다. 그에게 한국은 '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동남아 역시 그가 머무를 장소는 되지 못한다.

 

그곳 역시 그에게는 '공터'에 불과하다. 잠시 머무는 곳.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 압송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귀향이다. 귀향이라고 해도 그는 역시 머무르지 않는다. 교도소가 평생을 사는 곳도 아니고, 이곳 역시 머무르다 떠나야 할 공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래도 끊임없이 장소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이가 바로 둘째 아들 마차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자신에게 얽혀 있는 인연의 끈들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그렇다고 형처럼 그 끈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공터'를 '장소'로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내가 되는 박상희와 첫딸인 '누니'다.

 

하얀 눈이 오는 날 태어났다고 해서 누니라고 붙인 이름.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세상의 때를 덮는 눈처럼 맑고 깨끗한 세상이어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공터를 '장소'로 만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는 않다. 마차세가 직업을 잃고 임시직으로 다시 배달일을 하는 데서 소설이 끝나는 것은 이들이 공터를 장소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제목은 '공터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때 공터는 바로 우리가 살아온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사인 것이다. 이것이 장소가 아니고 공터인 것은, 우리 모두 이 공터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왔지만, 실상 우리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공터는 곧 빈곳이고 진공이다. 무엇이나 다 빨아들이는 진공, 그러나 진공은 다시 뱉어내야 자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도 머물 수 없는 곳이다. 우리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은 자만에 불과하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그걸 모르고 자신이 그 공터의 주인인 양 행세했던 마차세의 친구이자 사장이었던 오장춘의 최후는 비참할 뿐이다. 역사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으니, 그는 죽음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공터에서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묶인 끈은 무엇보다도 질기다. 쉽게 끊기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마장세가 그토록 부정하고 버리고 싶었지만 버리지 못했던 것, 마차세 역시 그 관계를 버릴 수가 없다.

 

공터가 이어주는 그런 관계들, 역사들... 그 속에서 조금씩의 변화는 일어나겠지만 공터가 없어지는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다. 그러니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계속 힘들게 살 수밖에.

 

이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중들이 살아온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김훈은 그의 간결한 문체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문체의 간결성, 전혀 끈적거림이 없는 그의 글들로 인해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 그것도 현재진행형이 아닌 이미 끝난 과거의 일들을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전달해주는 느낌을 받게 하는 소설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거리를 두고 살필 수 있는 소설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인물들에게 감정이 들어설 수 없게 만들고 차분히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전히 농익음을 거부함. 그것은 바로 끝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더이상 발전이 없게 될 때, 그때는 썩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사라져야 함. 사라지지 않고 버티게 되면 그것은 추함에 불과하다.

 

  사과를 빨강과 일치시킨다. 빨간 사과, 빛에 반짝이는 그 붉은 빛을 보면 잘 익었다고 생각한다.

 

  잘 익은 사과, 땅과 하늘과 바람과 사람의 노력이 한데 모여 결실을 이룬 것.

 

  이 결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잘 익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잘 익어서 다음을 이루는 것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럼에도 개인으로 보면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가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모든 사과가 빨개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최문자의 시를 읽으면서 개인이 추구하는 목표는 다양할 수밖에 없음을, 그 다양함을 인정해야 함을 생각한다.

 

어쩌면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만 달리게 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 시를 통해 부정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태양과 푸른 사과

 

푸른 사과만 열리는 사과나무 한 그루 심고

푸른 사과가 열리기를 기다려 왔다

끝내 타지 않으려는 껍질과

끝내 웃지 않으려는 슬픔이

새파랗게 앙다물고 있으면

반드시 붉어진다는 사과들의 가설을 어기고

붉은 사상들을 지나

혼자만 새파란 얼굴 지킬 거라고

푸른 사과를 기다려 왔다

 

푸른 사과만 골라서 사 먹은 적이 있다

뜨겁게 졸이면 무작정 붉어지는

맹목의 순종이 섬뜩해서

전에는 풀의 열매였을지도 모를

풀의 기억 하나만으로

발개지지 않는

사과의 푸른 정신을 사 먹었다

태양을 절취한 둥근 손바닥에

어지러운 듯한 짙푸른 사과 향

태양보다 그걸 더 사랑했다

나는

 

최문자, 사과 사이사이 새, 민음사. 2012년. 100-101쪽

 

세상은 이렇게 주류에 반대해 자신을 지키는 사람들에 의해 더 다양해진다. 이런 사람들로 세상이 더 살 만해진다. 그렇게 다양함, 그것을 찾고 알려주는 일, 시인이 한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갈 때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도 존중받는 그런 사회, 그것이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로시마 노트 오에 겐자부로의 평화 공감 르포 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애숙 옮김 / 삼천리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어쩌면 이 책은 일본의 민낯을 잘 보여주는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일본.

 

하지만 일본이 피해자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히로시마에 1945년 8월 6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삼일 뒤인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또다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가해자인 일본이 피해자가 되는 순간인데... 이상하다. 어떤 나라가 전쟁에서 무기때문에 졌다고 피해자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런 경우는 없다. 그리고 재래식 무기라고 하지만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늘 당시에는 첨단무기를 사용했던 쪽이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엄청난 무기들을 이용해서 우리나라와 중국,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에 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전쟁을 통해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원자폭탄이라는 최첨단 과학 무기가 등장하여 일본이 항복하게 됐다?

 

어떤 사람은 일본은 이미 항복하기로 되어 있었고, 원자폭탄보다는 소련의 참전이 더 항복을 앞당겼다고도 하니, 원자폭탄은 일본 군부가 패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말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에서는 더 강한 무기를 쓴 쪽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완전히 좌우하지는 않지만, 꽤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고 피해자가 되면 안 된다. 그들은 가해자다. 그래야만 한다.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을 확고히 한 그 지점에서 그들이 출발해야만 반성을 하고, 성찰을 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국민들에게조차도. 히로시마 노트는 그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살아 있는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오에 겐자부로가 1960년대에 히로시마를 방문하면서 그에 대해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글로 남긴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여기서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정부가 히로시마 사람들의 고통을 얼마나 외면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 권력자들에게 히로시마는 자신들의 전쟁 패배를 정당화시켜주는 수단일 뿐, 히로시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의 소리를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런 고통 속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며 용기있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히로시마의 모습을 제대로 알리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 책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제대로 된 상황 파악, 진상 규명, 치료 대책 등을 일본 정부는 원폭 피해가 일어난 지 20여 년 동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폭 투하를 지휘한 미군 장성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나 했다. 그만큼 일본 정권에게 히로시마 사람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정권이 원자폭탄의 피해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랬다는 것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면 잘 알게 된다.

 

이를 오에 겐자부로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부의 이런 무관심, 철저한 배제 속에서도 히로시마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하는 사람들, 이를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조선인 피폭자들의 모습도 나온다.

 

오에 겐자부로가 진실의 눈으로 사태를 보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인데... 지금도 그때 징용으로 끌려가 피폭된 조선인들,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 오키나와 인들도 마찬가지고.

 

이 책을 통해 미루어 보면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조차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일본은 끝까지 가해자다. 자국민조차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정권이 어찌 피해자가 될 수 있겠는가.

 

오에 겐자부로의 이 책은 단순히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핵심은 더 이상의 핵개발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이런 주장을 했는데...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빠졌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는 더 많아졌으니... 히로시마 사람들이 외쳤던 '노 모어 히로시마'라는 구호는 세계적으로 외면받은 구호가 되었다.

 

'노 모어 히로시마'

 

이것은 히로시마 사람들만이 아니라 일본 정권, 또 모든 세계 시민들이 외쳐야 했던 구호다. 그리고 이것이 실천되어야 했던 구호다.

 

여전히 '핵폐기'는 먼 길이다. 히로시마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니 이 책이 나온지 벌써 50년이 지났음에도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노 모어 히로시마'라는 구호를 '모든 나라에서 핵 폐기를!'이라는 구호로 바꿔 외쳐야 한다. 이렇게 이 책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70년이 넘은 지금도 실현하지 못한 그 구호를 지속해야 한다고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노 모어 핵!"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1-12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2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