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을 읽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시인의 말'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을 反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특별히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 시집에 묶인 많은 시들이 크고 작은,

가깝거나 먼 전쟁의 시기에 씌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反전쟁에 대한

노래,

이 아이러니를 그냥 난,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을 뿐'

 

시인의 말

 

인류 역사를 어떤 사람은 전쟁의 시기와 전쟁이 잠시 멈춘 평화의 시기로 나눈다. 전쟁이 대부분 역사를 차지한다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책에서 우리가 위인으로 다루는 인간들 대부분은 왕(나라를 세우거나 정복전쟁을 하거나 등등)이거나 장군이거나 하지 않던가. 평화 시기에는 특기할 만한 일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긴 전쟁의 시기와 짧은 평화의 시기.

 

그러니 反전쟁시 얼마나 반가운가. 전쟁을 반대하는 시들. 도대체 어떤 시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집이다.

 

많은 시들이라고 했으니, 시집에 실린 시가 모두 전쟁을 반대하는 시는 아닐텐데...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이 꼭 난 전쟁을 반대한다고 주장을 하거나,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 서로 돕는 삶,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 이것이야말로 너무도 어려운, 정말 평생 살아가면서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바로 反전쟁시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

 

제목이 되는 구절을 따온 시와 그것과는 다르게 내 마음에 훅 들어온 시.

 

우선 내 마음에 들어온 시, 그냥 읽으면서 의미보다는 무언가 모를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대구 저녁국'이란 시다.

 

대구 저녁국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국을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숭덩숭덩

  붉은 고춧가루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

 

  어디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벚나무 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국 냄새 감나무 가지에 오그리고 앉아

 

  그 먼 데, 대구국 끓는 저녁

  마흔 살 넘은 계집아이 하나

  저녁 무렵 도닥도닥 밥한다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다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 

 

  어디 또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없는 벚나무 가지에 눈님 들고

  국 냄새 가신 감나무 가지에 어둠님 자물고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년. 26-27쪽.

 

시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고향에서 입에 익은 밥을 먹는 시간과 고향을 떠나 다른 세계에서 사는 시간.

 

두 시간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지만, 과거의 공간은 충만한 공간이다. 새도 있고, 냄새도 머문다. 여기에는 평화와 사랑이 깃들어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우리네 삶이 이랬는데... 어느 순간, 그 고향을 떠나 사는 삶은 빈 공간이다. 무언가가 머물지 못한다. 새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런 상태.

 

굳이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몸과 음식이 일치되는 삶을 살던 때, 그때가 바로 평화의 시기가 아닐까. 그런 시기는 짧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른 채 떠나왔다.

 

다시 먼 데로 가고 싶어하지만, 그 먼 데로 과연 갈 수 있을까. 텅 비어버린 곳에서 어디론가 떠나기는 힘들다. 이 시를 읽으며 마음이 애틋해지는데...

 

반면, 다음 시는 섬뜩히다. 그야말로 反전쟁시라는 생각이 든다. 청동의 시간, 무언가 딱딱한 금속성의 시간, 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가 되면 인간의 폭력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곧이어 철기가 되겠지만.

 

이런 청동의 시간은 폭력의 시간, 전쟁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시대는 이런 전쟁의 시간을 살고 있는 때 아닌가. 아이들이, 땅이라는 어머니에게서 잘 자라야 하는 그 아이들이 제 때를 기다리며 익어가는 감자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아이들은 청동의 시간을 살고 있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

 

  아이들 자라는 시간은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

 

  다행이군요.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것은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리네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옥수수를 심을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아이들이 그 잎 아래로 절 숨길 수 있을 것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 한 태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저 푸른 마스크를 한 이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저 아이를 끌고 가는 피곤한 얼굴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푸른 마스크의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년. 42-43쪽.

 

이 시에서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이 구절에서 가슴이 탁 막혔다. 스무 살까지만 살 수 있는 고대인... 그렇다. 아이들은 80년이 넘는 세월을 자라야 하는데, 20년에서 멈춘다.

 

군인이 되는, 전쟁터에 나가 죽어야 하는, 이들은 고대인들처럼 수명이 짧다. 이들에게 제대로 자라 다른 열매를 맺을 시간이 없다. 그냥 죽어갈 뿐.

 

그러니 어찌 反전쟁시가 아니겠는가. 어느 어머니가 자식들이 전쟁터에서 일찍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런 자식을 둔 어머니들,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자국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단지 얼굴만이겠는가. 그들 가슴 속에는 시퍼런 총알이 박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며 전쟁의 참혹함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 군인도 많지만 민간인도 많다. 민간인 중에서 어린이들, 참으로 많다. 또 이들을 데려가 소년병으로 만드는 집단들도 많으니.

 

우리 인간 역사에서 이런 전쟁의 시간을 없애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그럴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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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30 1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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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30 16: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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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2


하얗디 하얀

너무도 하얘

차마 건드릴 수 없는

자그만 손길이 닿아도

얼룩이 생겨

제 온몸을 툭․ 끊어버리는

목련.

한 없이 하얀

저 꽃을 바라보며

처절히 떨어지는 훗날에

가슴 졸이고,

마음 아파하고.


사랑이야……

그 마음이,

그냥 바라보며

마음 졸임이,

가슴 시려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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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봄'이라고 했다. 문익환 목사 호가 바로 '늦봄'이다. 봄이 오는데 천천히 온다는 뜻인가. 아니면 늦더라도 봄은 온다는 뜻인가. 그도 아니면 남보다 앞서서 봄을 즐기지 않고 남들이 즐긴 뒤에야 봄을 즐긴다는 뜻인가.

 

  하여간 봄은 봄이다. 문익환 목사가 꿈꾸었던 통일이 봄이라면, 참으로 늦게 온 봄이다.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스러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통일은 여전히 오지 않고 있는데, 그럼에도 통일이 어느 날 우리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면, 통일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면, 열매를 맺기 위해 겨울이 주는 혹독함을 견뎌야 하고, 봄에 겨울의 상흔을 씻고 준비를 하고, 여름 더위와 비바람을 견뎌야만 하듯이 통일은 그렇게 천천히, 느지막히 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사이를 돌아다니다 문익환 목사 시집을 보게 됐다. 그러고 보니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지 년 100년이 되는 해다. 1918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2018년은 탄생 100년이 되고도 한 해가 지난 해다.

 

그가 살아간 해를 생각해 보면 일제시대를 거쳐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시대를 두루 거쳤다. 한마디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살다 간 분이다.

 

목사였기에, 목자가 되기 위해서 민중을 위해서 앞장 섰던 분이기도 하다. 시인 윤동주의 친구이기도 해서, 윤동주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노력한 분이기도 하다. (이 시집에 '동주야'라는 시가 실려 있다)

 

또한 통일을 위해 노력한 분이기도 하고... 통일을 위해서 북한을 방문하기도 해서 고초를 겪기도 했던 분.

 

이 시집 첫머리가 바로 '잠꼬대 아닌 잠꼬대'다. 이 시에서 북한에 가겠다고 선언을 한다. 단지 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문 목사는 이를 실천했다.

 

시 첫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생략)

 

문익환, 두 하늘 한 하늘,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4쇄. 3쪽

 

그리고 정말로 방북을 했다. 통일운동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때였다. 비록 감옥에 가더라도, 북한에 갈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줬다.

 

문 목사가 꿈꾸었던 일들이 지금 하나둘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이 되고 있다.

 

훈데르트 바서가 했다고 했나, 혼자서 꿈을 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고...

 

문익환 목사의 꿈만이 아니라 우리들 꿈이 모이고 모여, 잠꼬대 아닌 잠꼬대들이 모여 이제는 우리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통일은 천천히 오고 있다.

 

'늦봄' 문익환... 여전히 봄은 오지 않았지만, 오고 있다. 늦더라도 봄은 온다는 믿음이 있다. 이 시집에 실린 것처럼 통일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업다.

 

      (전략)

통일이라는 것도 그러고 보면

별로 대단한 게 없군요

형님하고 나하고 오다가다

북청이나 단천쯤 어느 주막에서 만나

술자리 한판 떡벌어지게 차리고

마시다 마시다 곤드레가 되는 일이군요

       (생략)

 

문익환, 두 하늘 한 하늘,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4쇄. '문석이 형님' 부분. 98쪽.

 

그렇다. 이런 게 통일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양냉면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평양냉면 분점이 서울에 생기거나 또는 평양이나 그 어디쯤 가서 북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통일 아니겠는가.

 

하여 시인은 자유를 이렇게 노래한다.

 

        (전략)

황주에서 꿀맛 같은 홍옥을 사 먹고

평양에 가서 냉면 두어 그릇 사 먹고

신의주에 가서 압록강 물에 참외를 씻어 먹는 맛 그게 자유란다

문석이형님을 모시고 목포에 가서 소주를 받아놓고

홍어 민어 광어 낙지회를 먹으며

회포를 푸는 일도 정말 눈물겨운 자유겠군요

       (생략)

 

문익환, 두 하늘 한 하늘,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4쇄. '자유' 부분. 103쪽.

 

아직은 이렇게는 못하지만 이제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시작된다.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만남부터 점점 더 만남을 넓혀가면 된다.

 

한방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미 그것은 안 된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봄은 올테다. 분명 온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냥 천천히 가면 된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이것이 바로 '늦봄'이 바란 것 아니겠는가. 그가 있는 하늘은 이제 두 하늘이 아니라 한 하늘일 텐데, 우리도 한 하늘 아래서 살기를 그가 바라고 있지 않겠는가.

 

문익환 시집을 읽으며 요즘 한층 밝아진 남북관계를 생각하면서 봄이, 우리에게도 봄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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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09: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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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1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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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삶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3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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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소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는 살기 힘든 나라였을 것이다. 전쟁에서 패했고, 파시즘이 물러갔다고는 하나 민주적인 정부가 제대로 들어서지는 못했을 거고, 넘쳐나는 빈민들을 제대로 구제하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노동자를 위한다는 공산당이 제대로 활동을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소설에서 공산당 지부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빼돌리는지가 나오는데, 이것이 당시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그들은 민중들이 고난을 당할 때 현장에 함께 있어주니, 민중을 위한다는 슬로건을 어느 정도 실천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은 민중들에게 절대로 우호적이지 않다. 경찰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한 카고네를 마을 여자들이 단합하여 구해주자 다음 날 저녁 경찰들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간다.

 

심지어 옷을 건네주러 온 가족까지도 잡아가 버리는 횡포를 저지르는데, 없는 사람들은 공권력에게도 힘없이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도덕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전상국이 쓴 '우상의 눈물'에서 재수파 대장인 기표를 순수 악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톰마소가 사는 동네 아이들도 이런 순수 악에 해당한다.

 

그들에게 도덕은 의미가 없다. 당장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 힘든 그들에게는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다. 도둑질부터 시작하여 강도, 몸 파는 일까지 안 하는 일이 없다.

 

이들을 도덕 잣대로 재면 이해할 수가 없다. 도덕이 이들을 밥 먹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나이를 먹어간다.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게 되고.

 

여기에 예외적인 인물이 주인공 톰마소이다. 톰마소 역시 부랑아일 수밖에 없다. 그 역시 온갖 못된 짓을 다 한다. 심지어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창녀의 돈을 강탈하기까지 하고, 동성애자에게 몸을 팔고 위협해서 돈을 뜯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변화해간다. 여자 친구인 이레네와 행복한 가정을 꾸밀 생각을 하는 것이다. 빈민촌에서 현재만이 있던 생활에서 미래를 보기 시작한다. 그에게 미래가 보인다. 그 순간 그는 현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고,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다시 보게 된다. 기독교민주당에 들어가 어떻게든 줄을 잡아 생활기반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결핵으로 인해 병원에 다녀온 뒤에는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눈,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여전히 못된 행동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사람이 어떻게 한번에 변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나쁜 행동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지만, 마지막에 홍수가 난 빈민촌에 자진해서 사람들을 구하러 간다. 친구들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그가 구한 사람이 창녀라는 사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피난을 온다는 서술, 가장 없는 그래서 몸밖에는 팔 것이 없는 창녀를 구하는 톰마소의 행동은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를 보여준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미래를 살아갈 어린이를 구해주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를 느낄 수 있고. 그러나 그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지지리 가난한 생활에서 변변한 학력도 없고, 기술도 없고, 배경도 없는 톰마소가 청렴하지 않은 사회에서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가 한 이타적인 행동은 결핵을 심화시키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죽을 수밖에 없다. 빈민촌에서 살아가는 삶은 나쁜 짓을 끝까지 해도 사살되거나, 자살로 삶을 마감하거나 감옥에 수감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여기서 벗어나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려 해도 결국 사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니 톰마소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가 살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홍수가 끝난 뒤 정치인이 와서 '노상 하는 약속을 남발하고 갔다'는 표현처럼 이들이 살아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순수 악'이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이들이 생계로 인해 고민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생계 문제가 해결이 된 다음에 생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도덕은 생계가 해결된 다음에 나오는 것이다.

 

톰마소 역시 이레네와 만나는 것, 새로운 생활을 설계해나가는 것 역시 생계가 해결된 다음, 생활의 문제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계는 스스로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지만, 제도,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한다.

 

함께 가지 않고 개인의 노력으로만 맡기면 해결되지 않는다. 톰마소처럼 결국 죽음에 이를 뿐이다. 우리나라 빈곤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고, 복지 정책도 점차 풍성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힘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제도적인 측면에서 바꿀 수 있는 면을 함께 고민하고 실행해 나가야 한다.

 

파솔리니가 쓴 "폭력적인 삶".  

 

도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최소한 도덕이라는 윤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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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먼 과거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잊혀진, 그냥 과거 사진 속에서나 존재하는. 정선이나 태백이나 삼척에 가봐도 탄광은 이제 박물관이 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게 과거 속으로 탄광은 들어갔다.

 

  우리들 겨울을 책임지던 연탄도 도시가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멀리멀리 사라져 갔고.

 

  온동네가 까맣던 탄광 마을을 사람들은 기억이나 할까? 마을만이 아니라 몸속까지도 까맣게 까맣게 타들어가던 사람들을 기억할까?

 

그들이 그렇게 시커멓게 탄가루들을 뒤집어쓰며 일한 대가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단 생각을 한다.

 

이젠 화석연료 시대를 마감해야 한다고 하는데, 화석 연료들 가운데 가장 우리 삶에 가까웠던 것이 석탄이고, 그 석탄으로 연탄을 만들어 우리를 살게 했는데.

 

지금도 간혹 연탄구이집들이 있고, 여전히 연탄을 쓰는 곳이 있지만, 탄가루가 풀풀 날리는 마을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렇게 우리 눈에서 멀어졌지만, 탄광은 우리들 삶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 광부로 독일에 나갔던 경험도 있으니 말이다.

 

임길택 선생이 쓴 "탄광마을 아이들" 시집을 읽으며 옛날 생각이 났다. 탄광마을과는 멀리서 살았지만 겨울이 오려 하면 연탄을 창고에 쟁여두었던 어린시절, 연탄을 나를 때 온몸이 시꺼멓게 변하던 모습들, 다 탄 연탄을 눈이 온 다음에 길거리에 부수며 깔아두었던 일들.

 

그렇게 연탄은 우리 생활과 밀접했지만, 그래도 탄광마을 아이들 삶을 몸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랬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임길택 선생이 쓴 시들을 읽으며 왜 이렇게 슬픈 마음이 되는 걸까?

 

아련한 과거가 마음 한 구석에서 슬픔을 밀어올리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탄광마을 아이들" 그렇게 힘들게 지내던 아이들, '막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의 종점에 이른 것처럼 사는 어른들 사이에서도 아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 지독한 가난, 모든 것이 까맣게 변해가는 동네에서도, 아이들은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온 아이들, 그 부모들 덕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지도 모르겠다.

 

슬프면서도 희망이 보이는 시들이다. 가령 이런 시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탄먼지 일어 눈을 못 뜰 때

우리는 그냥 돌아서기만 해요

그러다 또다시 고무줄을 하고

놀다 지치면 집으로 가요

 

탄광 기계 소리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아도

누구 하나

시끄럽다 말하지 않아요

놀다 보면

그 소린 듣지도 못해요

 

임길택, 탄광마을 아이들, 실천문학사. 2005년 3판 3쇄. 76-77쪽.

 

예전엔 탄광마을 아이들에게 이런 환경 문제가 있었다. 물론 경제 문제로 인해 이런 환경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은 그런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아니, 최선이 아니라 아이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어디에 있더라도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살아간다.

 

그런데 지금은 특정한 마을만이 문제가 아니다. 미세먼지를 보라. 어느 마을로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아이들이, 모든 사람들이 관계된다.

 

탄광마을 환경 개선이 시급했듯이 지금은 이런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시급하다. 어른들이, 있는 사람들이, 또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이렇게, 탄광마을 아이들처럼 그냥 지낼 수밖에 없다.

 

미세먼지가 심해도 아이들은 논다. 그냥 노는 것이다. 그 다음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일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는 사람은 어른이어야 한다. 바로 어른인 우리들 책임인 것이다.

 

"탄광마을 아이들" 읽으며 과거 슬픈 현실이 지금은 슬프다는 마음도 들지 않게 다가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단지 과거의 시집이 아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모습을 먼 과거에 보여준 시집이다.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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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6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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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6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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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2 1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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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2 15: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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