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을 읽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시인의 말'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을 反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특별히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 시집에 묶인 많은 시들이 크고 작은,
가깝거나 먼 전쟁의 시기에 씌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反전쟁에 대한
노래,
이 아이러니를 그냥 난,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을 뿐'
시인의 말
인류 역사를 어떤 사람은 전쟁의 시기와 전쟁이 잠시 멈춘 평화의 시기로 나눈다. 전쟁이 대부분 역사를 차지한다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책에서 우리가 위인으로 다루는 인간들 대부분은 왕(나라를 세우거나 정복전쟁을 하거나 등등)이거나 장군이거나 하지 않던가. 평화 시기에는 특기할 만한 일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긴 전쟁의 시기와 짧은 평화의 시기.
그러니 反전쟁시 얼마나 반가운가. 전쟁을 반대하는 시들. 도대체 어떤 시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집이다.
많은 시들이라고 했으니, 시집에 실린 시가 모두 전쟁을 반대하는 시는 아닐텐데...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이 꼭 난 전쟁을 반대한다고 주장을 하거나,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 서로 돕는 삶,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 이것이야말로 너무도 어려운, 정말 평생 살아가면서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바로 反전쟁시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
제목이 되는 구절을 따온 시와 그것과는 다르게 내 마음에 훅 들어온 시.
우선 내 마음에 들어온 시, 그냥 읽으면서 의미보다는 무언가 모를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대구 저녁국'이란 시다.
대구 저녁국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국을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숭덩숭덩
붉은 고춧가루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
어디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벚나무 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국 냄새 감나무 가지에 오그리고 앉아
그 먼 데, 대구국 끓는 저녁
마흔 살 넘은 계집아이 하나
저녁 무렵 도닥도닥 밥한다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다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
어디 또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없는 벚나무 가지에 눈님 들고
국 냄새 가신 감나무 가지에 어둠님 자물고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년. 26-27쪽.
시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고향에서 입에 익은 밥을 먹는 시간과 고향을 떠나 다른 세계에서 사는 시간.
두 시간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지만, 과거의 공간은 충만한 공간이다. 새도 있고, 냄새도 머문다. 여기에는 평화와 사랑이 깃들어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우리네 삶이 이랬는데... 어느 순간, 그 고향을 떠나 사는 삶은 빈 공간이다. 무언가가 머물지 못한다. 새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런 상태.
굳이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몸과 음식이 일치되는 삶을 살던 때, 그때가 바로 평화의 시기가 아닐까. 그런 시기는 짧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른 채 떠나왔다.
다시 먼 데로 가고 싶어하지만, 그 먼 데로 과연 갈 수 있을까. 텅 비어버린 곳에서 어디론가 떠나기는 힘들다. 이 시를 읽으며 마음이 애틋해지는데...
반면, 다음 시는 섬뜩히다. 그야말로 反전쟁시라는 생각이 든다. 청동의 시간, 무언가 딱딱한 금속성의 시간, 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가 되면 인간의 폭력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곧이어 철기가 되겠지만.
이런 청동의 시간은 폭력의 시간, 전쟁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시대는 이런 전쟁의 시간을 살고 있는 때 아닌가. 아이들이, 땅이라는 어머니에게서 잘 자라야 하는 그 아이들이 제 때를 기다리며 익어가는 감자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아이들은 청동의 시간을 살고 있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
아이들 자라는 시간은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
다행이군요.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것은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리네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옥수수를 심을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아이들이 그 잎 아래로 절 숨길 수 있을 것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 한 태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저 푸른 마스크를 한 이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저 아이를 끌고 가는 피곤한 얼굴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푸른 마스크의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년. 42-43쪽.
이 시에서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이 구절에서 가슴이 탁 막혔다. 스무 살까지만 살 수 있는 고대인... 그렇다. 아이들은 80년이 넘는 세월을 자라야 하는데, 20년에서 멈춘다.
군인이 되는, 전쟁터에 나가 죽어야 하는, 이들은 고대인들처럼 수명이 짧다. 이들에게 제대로 자라 다른 열매를 맺을 시간이 없다. 그냥 죽어갈 뿐.
그러니 어찌 反전쟁시가 아니겠는가. 어느 어머니가 자식들이 전쟁터에서 일찍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런 자식을 둔 어머니들,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자국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단지 얼굴만이겠는가. 그들 가슴 속에는 시퍼런 총알이 박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며 전쟁의 참혹함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 군인도 많지만 민간인도 많다. 민간인 중에서 어린이들, 참으로 많다. 또 이들을 데려가 소년병으로 만드는 집단들도 많으니.
우리 인간 역사에서 이런 전쟁의 시간을 없애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그럴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