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먼 과거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잊혀진, 그냥 과거 사진 속에서나 존재하는. 정선이나 태백이나 삼척에 가봐도 탄광은 이제 박물관이 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게 과거 속으로 탄광은 들어갔다.
우리들 겨울을 책임지던 연탄도 도시가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멀리멀리 사라져 갔고.
온동네가 까맣던 탄광 마을을 사람들은 기억이나 할까? 마을만이 아니라 몸속까지도 까맣게 까맣게 타들어가던 사람들을 기억할까?
그들이 그렇게 시커멓게 탄가루들을 뒤집어쓰며 일한 대가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단 생각을 한다.
이젠 화석연료 시대를 마감해야 한다고 하는데, 화석 연료들 가운데 가장 우리 삶에 가까웠던 것이 석탄이고, 그 석탄으로 연탄을 만들어 우리를 살게 했는데.
지금도 간혹 연탄구이집들이 있고, 여전히 연탄을 쓰는 곳이 있지만, 탄가루가 풀풀 날리는 마을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렇게 우리 눈에서 멀어졌지만, 탄광은 우리들 삶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 광부로 독일에 나갔던 경험도 있으니 말이다.
임길택 선생이 쓴 "탄광마을 아이들" 시집을 읽으며 옛날 생각이 났다. 탄광마을과는 멀리서 살았지만 겨울이 오려 하면 연탄을 창고에 쟁여두었던 어린시절, 연탄을 나를 때 온몸이 시꺼멓게 변하던 모습들, 다 탄 연탄을 눈이 온 다음에 길거리에 부수며 깔아두었던 일들.
그렇게 연탄은 우리 생활과 밀접했지만, 그래도 탄광마을 아이들 삶을 몸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랬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임길택 선생이 쓴 시들을 읽으며 왜 이렇게 슬픈 마음이 되는 걸까?
아련한 과거가 마음 한 구석에서 슬픔을 밀어올리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탄광마을 아이들" 그렇게 힘들게 지내던 아이들, '막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의 종점에 이른 것처럼 사는 어른들 사이에서도 아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 지독한 가난, 모든 것이 까맣게 변해가는 동네에서도, 아이들은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온 아이들, 그 부모들 덕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지도 모르겠다.
슬프면서도 희망이 보이는 시들이다. 가령 이런 시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탄먼지 일어 눈을 못 뜰 때
우리는 그냥 돌아서기만 해요
그러다 또다시 고무줄을 하고
놀다 지치면 집으로 가요
탄광 기계 소리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아도
누구 하나
시끄럽다 말하지 않아요
놀다 보면
그 소린 듣지도 못해요
임길택, 탄광마을 아이들, 실천문학사. 2005년 3판 3쇄. 76-77쪽.
예전엔 탄광마을 아이들에게 이런 환경 문제가 있었다. 물론 경제 문제로 인해 이런 환경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은 그런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아니, 최선이 아니라 아이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어디에 있더라도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살아간다.
그런데 지금은 특정한 마을만이 문제가 아니다. 미세먼지를 보라. 어느 마을로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아이들이, 모든 사람들이 관계된다.
탄광마을 환경 개선이 시급했듯이 지금은 이런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시급하다. 어른들이, 있는 사람들이, 또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이렇게, 탄광마을 아이들처럼 그냥 지낼 수밖에 없다.
미세먼지가 심해도 아이들은 논다. 그냥 노는 것이다. 그 다음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일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는 사람은 어른이어야 한다. 바로 어른인 우리들 책임인 것이다.
"탄광마을 아이들" 읽으며 과거 슬픈 현실이 지금은 슬프다는 마음도 들지 않게 다가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단지 과거의 시집이 아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모습을 먼 과거에 보여준 시집이다.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