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겨울로 가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 추위를 걱정해야 하는데, 이제는 추위보다는 미세먼지를 또 봄에만 잠시 시달리곤 하던 황사를 걱정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인류가 기술과학의 발달로 인해 봄에서 여름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열매를 수확한 가을을 넘어 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것인지...

 

  겨울이 올 줄 뻔히 알면서도 막 살아왔던 인류가 겨울이 눈 앞에 닥치자 그제서야 허둥지둥 대책을 논의하는데...

 

  겨울이 되어도 먹을것, 땔것, 지낼 곳이 충분한 사람들은 겨울 걱정을 하지 않듯이 이미 가질 것 다 가진 나라들은 자기 일이 아닌 양 뒷짐지고 있는 모양새.

 

겨울이 없는 사람에게만 오나? 없는 사람은 더 힘들겠지만, 그 사람들이 힘들면 힘들수록 있는 사람에게도 부담이 될텐데. 그래서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문제가 될텐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박남준이 낸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라는 시집. 이 시집 제목이 된 시는 봄에서 여름을 거쳐 겨울로 가고 있는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에 실려 있는 시 제목은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그 여자의 반짝이는 옷 가게'(54-55쪽)이다.

 

강 따라 가는 길 전망 좋은 곳에 있는 간이트럭 휴게실. 사람들이 오다가다 모여 쉬다 가는 곳. 이제 살 만하다 싶었을 때 찾아온 아내의 암 소식. 아내가 바랐던 반짝 반짝이는 옷들... 그런 내용의 시.

 

처음 부분을 읽어가면서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섬진강물처럼 잔잔해 지는데, 2연에 가면서 그 잔잔함 속에 애잔함이 묻어나오게 된다. 이런 애잔함이 그렇게 만든 외부 요인으로 옮겨 가면 분노로 바뀌게 되는데...

 

시집은 1부에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말 그대로 '노래'다.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죽음과 삶은 그야말로 평화 자체다. 자연의 일부다. 그렇기 때문에 애잔함보다는 평온함이 묻어나온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잔잔한 미소를 띠며 읽다가 2부로 가면 시인 자신에 관한 이야기들과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노래에서 이야기로 넘어간다. 우리네 생활에서는 죽고 산다는 문제가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에 아무래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늙어감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렇게 사람에게 다가온 이야기들이 사회로 넘어가면 분노로 넘치게 된다. 몇몇 정치인들이 저지른 어마어마한 잘못들로 자연이 파괴되고, 우리들 삶이 무너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렇게 3부에서는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제주도, 또 전쟁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자연을 노래하는 것에서 그런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 현실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막기 위해서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런 행동들이 시로 다시 표현되고 있고.

 

세월이 흘러 막혔던 4대강들이 다시 열리고 있고, 동남아 국경의 거리를 자유롭게 걷고 있던 시인이 그보다 우리나라 장벽을 자유롭게 걷고 싶다는 바람을 표현했었는데,('국경의 거리를 걷고 싶다' 72-73쪽) 이제 그렇게 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으니...

 

시집은 봄에서 겨울로 가고 있었다. 겨울... 2010년대 초반... 우리에게는 정말 '겨울'이었다. 이 시집에 있는 다음 시들을 보라.

 

생명의 강이어야 한다, 운하 이후, 낙동강 바로 분단의 장벽, 해창 바다에서 광화문까지, 일순 깨어지고 남김없이 씻겨져서, 다시 또 여강에 몸을 던져 등등

 

하지만 자연은 순환한다. 어디 겨울만 존재하겠는가. 지구 역사를 살펴보면 빙하시대가 있었지만, 그 시대로 끝맺을 때가 있었으니...

 

우리는 이제 겨울에서 봄으로 가고 있다. 자연적 계절은 이제 겨울이지만, 우리 마음에서는 봄이 움트고 있다. 박남준의 이 시집, 그런 겨울에서 끝나고 있지만은 않다. 마지막에 실린 시가 바로 그렇다.

 

'지리산에 가면 있다'라는 시. 그렇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을 소개한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길이 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그런 사람들이.

 

퐁퐁퐁 샘물에 목을 축이며 가는 길이 있다

막걸리 한두 잔의 인심이 낯선 걸음을 붙드는 길이 있다

높은 산을 돌아 개울을 따라 산과 들을 잇고

너와 나, 비로소 푸른 강물로 흐르고 흐르는

아직 눈매 선한 논과 밭, 사람의 마을을 건너는 길이 있다

 

 

박남준,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실천문학사. 2010년.

'지리산에 가면 있다 - 4연'. 130쪽.

 

시집은 다시 봄을 이야기하면서 끝난다. 그렇게 순환한다. 그런 순환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 겨울 역시 마냥 부정해서는 안 된다. 겨울은 봄을 더 봄답게 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겨울에 봄을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거지로 겨울을 만들지 않도록. 우리가 겪었던 시행착오가 또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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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이슬람 - 오해와 편견에 갇힌 16억 문명의 진실 주니어 인문과학 캠프 2
하룬 시디퀴 지음, 김수안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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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널리 퍼진 종교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 아닌가 한다.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라는 말도 있고, 전쟁을 추구하는 잔학한 종교라는 말도 있다.

 

어느 것이 옳을까? 옳고 그름을 떠나 이슬람은 우리에게 과격한 종교로 인식되어 왔다. 9.11테러부터 시작하여 사람을 참수하여 죽이는 장면을 공개하는 행위까지, 테러 또는 폭력, 또 여성에 대한 극단적 차별을 하는 종교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하긴 얼마 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이 운전을 하면 범죄라고 처벌을 받았다고 하니, 여성 인권이 잘 보장되지 않는 나라가 이슬람을 주요 종교로 믿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슬람을 바로 보고 싶어도 별다른 자료를 만나지 못했다. 그냥 언론에 나오는 것만으로 이슬람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었는데...

 

이희수 교수나 몇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기기도 했는데,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오해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다.

 

이슬람은 테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 여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인정이 주요 교리인 종교라는 것.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에게 베풂을 더 강조하는 종교라는 것.

 

이들이 테러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 테러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바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

 

서양인의 비뚤어진 시각이 이슬람을 왜곡하고, 또 그들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지금은 그렇게밖에는 저항할 수 없지만, 그런 저항방법에 대해서 이슬람 신자들이 모두 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극단적인 테러를 반대하는 이슬람 신자들이 많다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이슬람을 이상한 종교로 보는 시각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역시 종교라는 것, 종교는 본래 인간에게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생긴 것이라는 것. 기독교도 불교도, 그리고 이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 책에서 이 글귀를 읽고 이래야 한다고, 이렇게만 한다면 세상에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서를 믿는 사람(유대인과 기독교도)과 논쟁하지 말되, 논쟁해야 한다면 매우 공손하게 말하라.

만일 알라가 뜻하셨다면, 인류를 한 나라로 만드셨을 것이니라. 하지만 인류는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느니라. (178쪽)

 

다양성,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이슬람은 차별을 받고 있다. 그만큼 이슬람에 대한 시각이 많이 왜곡되어 있다. 그런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 이슬람을 이슬람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평화가 오지 않을까 한다.

 

이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을 떨쳐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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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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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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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파이돈 니코마코스 윤리학 - 세계의사상 2
플라톤 외 / 을유문화사 / 1994년 11월
평점 :
절판


동성애에 관한 논란이 많고, 그에 대한 반대가 극심한 집단이 주로 기독교 단체던데, 가끔 다른 글에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했다는 말이 인용되곤 한다.

 

본래 인간은 남성-남성(태양), 여성-여성(지구), 남성-여성(달)의 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말. 이 책을 읽어보니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처음에는 성이 세 가지 있었지요. 지금은 남성과 여성의 두 가지 성이 있지만, 이 둘을 다 가지고 있는 제 3의 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명칭만큼은 아직 남아 있지요. 즉 옛날에는 남여성, 즉 남성과 여성을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실물로도 있었고, 명칭으로도 있었습니다. ... 성에 세 가지가 있고 사람의 모양이 이러했던 까닭은, 남성이란 것이 맨 처음에 태양에서 태어났고, 여성은 지구에서, 남성과 여성을 다 가지고 있던 남여성은 달에서 태어난 때문이지요. ... 저들은 무서운 힘과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들의 야심은 대단했습니다. 저들은 신들을 공격했습니다. (56쪽)

 

그래서 이 구절을 가지고 남성-남성이었던 존재는 남성을 원하고, 여성-여성이었던 존재는 여성을 원하고, 남여성이었던 존재는 서로 다른 성을 원한다고, 동성애는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이라고. 플라톤도 그렇게 주장했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한데,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말이란 의미는 플라톤의 주장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사랑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한 한 발판으로 이 주장을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당시에 동성애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논거가 동성애 찬성의 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더 사랑의 본질에 가깝다.

 

문제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다는데 있다. 뒤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유혹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육체적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데 핵심이 있다. 그는 이미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 것이다.

 

[향연]은 육체와 영혼, 이분법을 부정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랑에는 육체적 사랑이 있고 정신적 사랑이 있다고 고등학교 때 윤리 시간에 배웠다. 에로스와 아가페라고 배웠는데,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이 책은 하게 한다.

 

육체와 영혼의 사랑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다. 물론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에 육체는 사라질 것,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영원함은 곧 생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생식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는 행위는 사랑에 해당된다. 영원함을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의 영원함만 추구하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라고 한다. 플라톤은

 

심령 면에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건 온갖 예지와 온갖 덕이에요. 모든 창조적 시인들, 그리고 독창적이라는 평을 듣는 미술가와 공예가는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지는, 나라와 가정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절제와 정의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신적인 성격이 있고 어렸을 적부터 그 영혼이 이런 덕을 임신하고 있는 사람도, 장성하면 자식을 낳고 생식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속에 자기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맵니다. (88-89쪽)

 

이런 덕에 대한 영원함으로 오면 그들의 사랑에는 육체의 차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냥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고 함께 하면서 덕을, 예지를 영원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플라톤이 생각한. 여기에 남성은 여성만을, 여성은 남성만을 이라는 생각은 지금에서야 하는 생각이다. 이 사랑에 관한 설명을 소크라테스가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디오티마'라는 여인을 통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덕의 영원성에 육체적 차이를 생각하는 것은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영혼이 통하고 그 통함으로 영원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생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 생식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사랑에서 굳이 성별을 문제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동반자가 되지 못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와 영적인 교감을 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 관계를 맺든 맺지 않든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교감이고, 영혼의 생식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일원론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하여간, 동성애를 육체에만 국한시켜서 논의하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또 플라톤을 인용하면서 본래 한 몸이었던 존재가 둘로 나뉘었기 때문에 서로를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것도 한 면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인간을 몸과 정신, 둘로 나누어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볼 수 없음을 [향연]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들로 부터 출발하여 저 아름다움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되,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 또 둘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육체들로부터 아름다운 활동과 법률에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활동에서 아름다운 것을을 배우는 것에로 나아가고, 그 배움의 끝에 이르러 진실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고, 결국에는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인생은 여기에 이르러, 그리고 여기에서만, ..., 그가 어디에서 그의 삶을 살아가든 저 아름다움 자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89-90쪽)

 

사랑이란 무엇인가, 에로스란 무엇인가에서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매개자인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 그렇다면 사랑은 인간을 유한한 존재에서 무한한 존재로 이끌어간다는 것. 그 단계에는 여러 단계가 있지만, 그것들을 거치며 아름다움 자체에 이르게 된다는 것. 이분법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또 아름다움은 성으로만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 [향연]이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반대 논거를 제기하는 글로 자주 인용되지만, [향연]은 그것을 넘어 과연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책이다. 그 중간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종교는... 사랑이든, 자비든,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의 무한한 사랑을 알 수가 없다. 그 무한한 사랑을 알기 위해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은 신의 사랑을 알아가기 위한 한 단계일 뿐이다. 그렇게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이 [향연]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여기에 관해 무슨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내 멋대로 읽은 플라톤의 [향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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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로 기억되는,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로도 기억되는 사람.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 있는 글귀라고 하고, 악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법은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시민불복종을 거부하는 논리로 쓰는 이 말을 소크라테스는 한 적이 없다고 하는 말도 있고.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평생 진실을 추구하던 사람이 소크라테스였으니, 그가 한 말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후대 사람들이 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

 

  하지만 어디서 찾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글을 남긴 적이 없고,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는 제자인 플라톤이 쓴 책에서만 남아 있으니.

 

그나마 우리는 플라톤 저작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단편적으로만 인용하거나 알고 지냈으니. 물론 그리스 말을 알 수가 없으니, 번역본을 읽어야 하는데, 번역본조차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읽었을까? 학교 교육에서 도덕, 윤리, 정치, 사상 등을 배우면서도 서양 학문의 기초가 되는 이들이 쓴 책에 대해서 제대로 읽게 하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

 

분명 제대로 읽지도 읽을 시간도 없었음에도 이상하게 논술 문제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더 어려운 칸트, 헤겔이 나오니, 이 나라 독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몇몇 똑똑한 학생들과 대다수 무지한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과연 고등학생들이 서울대 추천 100선이라든지, 세계고전철학 같은 것을 읽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읽지도 않고 요약된 것으로 다 아는 것인양 지내온 것이 지금 우리나라 독서 현실 아닐까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남 비판할 것이 없다. 똑같은 독서 습관으로 지내왔으니. 소크라테스, 그 유명한 사람의 책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다. 읽어도 제대로 이해한 적도 없다. 그냥 읽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남들이 인용한 구절만으로 끝낸 적이 많았다.

 

최근에 사법농단과 관련해, 또 성소수자 문제와 연관지어 플라톤이 쓴 책들을 읽고 싶어졌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하는 연설 아니던가. 그렇다면 재판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또 [크리톤]은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에게 탈출을 권유하려고 찾아온 친구 크리톤에게 해주는 말 아닌가. 여기서 악법도 법이라는 말의 유래가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두 작품이 붙어 있는 책. 집에서 발견했다. 언제 사 놓은 것인가. 새책을 샀던가 아니면 헌책을 샀던가 기억에도 없다. 분명 사놓고 나중에 읽어야지 해놓고 잊고 있었을 터.

 

책값이 와, 1,500원이다. 알라딘 상품찾기에서 찾으면 나오지도 않는다. 조우현 역, 거암 출판사가 1983년에 중판으로 출간한 책이다. 당시에는 제법 읽혔을지도 모르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다른 번역본들이 많이 나왔으니, 이 책은 이제 헌책방이나 다른 사람들 책꽂이에서 머무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변명]에서는 왜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지가 나와 있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남을 가르칠 수 있다.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알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찾을 수가 있는 것.

 

이런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있다.

 

"...재판관에게 청탁을 한다든가, 청탁으로 벌을 면한다든가 하는 일은 옳지 못하고, 오히려 가르치고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재판관은 정당한 일에서 정실(情實)을 베풀기 위해서 가 아니라, 옳고 그른 것을 가려 내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해서 정실에 끌릴 것이 아니라, 법에 따라서 재판하기를 서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그 서약을 저버리는 버릇을 붙여 주어도 안 되고,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그런 버룻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53쪽)

 

이런 소크라테스에게 재판관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다. 그는 법정에서도 자신이 할 말을 다 한다. 자신에게 떨어질 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진실을 거스르는 것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유죄 판결을 받고, 또 사형 선고를 받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어떤 천한 짓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진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변명한 것을 뉘우치지도 않으며, 오히려 나는 달리 변명하고서 살기보다는, 이렇게 변명하고서 차라리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냐 하면, 법정에서나 싸움터에서나 무슨 일을 해서든지 죽음을 면하려고 하는 꾀를 부리는 것은, 나건 누구건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61쪽)

 

당당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에 부끄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재판 과정 내내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으면 중간에라도 끼어드는 신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들리지 않았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 그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그 진실로 인해 받게 되는 사형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렇게 받아들인 사형에 대해 탈출을 권유하는 크리톤의 말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크리톤]에서 왜 그런지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그것은 진실한 행동이 아니라고.

 

진실하지 못한 행동으로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그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라고. 70평생을 아테네에 살면서 아테네 법에 따라 산 그가 마지막 순간에 그 법을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것은 시민불복종과는 다른 개념이다. 시민불복종 역시 그 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는다. 그 처벌이 나중에 무효가 되는 것은 절차에 의해서 법이 개정되었을 때다. 잘못된 법을 개정하기 위해 처벌까지도 감수하는 것.

 

결국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시민불복종과 같은 말로 쓰일 수 있다. 당시 법은 신이다. 신의 명령이다. 단지 인간들이 신의 명령을 악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신은 소크라테스가 잘못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사람들이 더 큰 죄에 시달릴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사형을 받아들임으로써 법(신)을 인정한다. 그러나 법이 잘못 쓰이는 것에 대해서 엄중한 경고를 한다. 결국 악법도 법이 아닌 것이다. 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재판관들에게는 더욱 엄정한 판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남을 판결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사법농단이라는 말, 검찰권력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또 돈이면 다 되는 변호사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법을 법대로 처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에서 그 점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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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더듬이 선생님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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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거짓말을 하는 건 그 학생이 외톨이가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자신이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라 쓸쓸한 겁니다." (340쪽)

 

이건 충격이다. 거짓말이 나쁜 게 아니라 쓸쓸한 거라는 말. 거짓말을 하는 아이,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런 말을 한다는 것. 그렇다. 그 아이의 외로움을 알고 받아들여주는 교사, 그래서 교사는 속는 것이 아니라 속아주는 것이라는 무라우치 선생의 말. 이 땅의 교사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교사는 언제든,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학생이든 그 아이를 외톨이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342쪽)

 

이런 교사, 정말 만난다면, 그 상황이 좋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행복일 것이다.

 

"외톨이가 둘 있으면 그건 이미 외톨이가 아니라고,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한단다. 선생님은 외톨이 아이들 곁에 있는, 또 한 사람의 외톨이가 되고 싶어. 그래서 나는 선생을 하는 거야." (51쪽)

 

짠하다. 외톨이 곁에 있는 외톨이 선생. 그러면 외톨이는 없는 거라는 선생. 학교라는 공간에 얼마나 많은 외톨이들이 있는가. 한 학교에 꼭 그런 외톨이들이 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래서 더 외로운 외톨이. 외톨이임에도 외톨이로 지낼 수밖에 없는 외톨이.

 

당연하고 평범한 학교에서 당연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은 학생이 외톨이가 된다. 이런 외톨이 곁에 있어주려고 선생을 한다는 무라우치 선생.

 

말을 더듬는 선생이다. 그것도 국어 선생이다. 치명적인 약점이다. 국어 선생이 말을 더듬다니. 그렇다면 무라우치 선생은 외톨이다.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정규직 교사도 아니다. 시간제 교사다. 일명 비상근강사. 우리말로 하면 기간제 교사다. 그런 그가 말을 더듬는 데도 교사를 한다. 중요한 것은 말을 더듬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하느냐다.

 

그는 중요한 것만 말한다고 한다. 자신은 중요한 것을 말하고, 곁에 있어주려고 교사를 한다고. 이런 사람을 교사라고 부르면 안 된다. 선생이라고 해야 한다. 앞서서 난 사람. 자신이 깨우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사람.

 

그에게는 말더듬다는 사실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점이 된다. 그는 외톨이기 때문이다. 외톨이기 때문에 또다른 외톨이 곁에 있어줄 수 있다. 곁에 있어주는 일,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냥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는데...

 

꼭 해결할 필요는 없다. 소설에서도 해결을 하지 않는다. 그냥 진심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진심이 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해야 할 역할이다.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곁에 있어주는 것,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알게 해주는 것.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짠해지기도 한다.

 

마지막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무언가가 꽉 들어찬 느낌을 받는다. 이런 선생을 만났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은 상황이겠지만,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니, 행복한 일이다.

 

꼭 학생들만이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어른이 읽어도 짠해지는 소설이다. 외톨이가 어찌 학교에만 있겠는가? 학교 밖에도 외톨이는 많다. 이런 외톨이들 곁에 또 하나의 외톨이로 곁에 있어줄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세상에서 외톨이로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그렇다. 중요한 것은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 마음으로 전해진다. 진심으로 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것은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것이 된다.

 

학생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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