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121호를 읽다.

 

  여러 주제의 글이 실려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호칭 문제가 기획되었고, 가족, 양육, ADHD, 발도르프, 페미니즘 등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실려 있다.

 

  다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호칭 문제로 많이 갈등을 하니 민들레에서도 이에 대해서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기획으로 잡은 것을 보니.

 

  공자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했다. 즉,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잘못 썼을 때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것들을 떠나서 언어 중에 다른 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더 문제가 된다. 호칭에는 관계가 들어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이 호칭에 따라서 위계가 결정이 되기도 한다.

 

'너의 성별을 불러주겠다(이라영)'는 글에서 '부력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39쪽)고 했는데, 어찌 성별뿐이겠는가. 학력, 경제력, 지위, 나이에 따라서도 부력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은 작용한다.

 

누구나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놓는다. 중력의 법칙이다. 말이 자꾸 내려간다. 그만큼 상대를 자기보다 못한 존재, 낮은 존재로 파악하게 된다. 아무리 말로는 평등하다고 해도 이미 호칭 속에 불평등이 들어 있으니, 그 말을 쓰지 않는 한 이런 위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위라고 생각하면 말을 높인다. 부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말은 이미 높여서 나간다. 그러면 자연스레 위계가 작동한다.

 

이렇듯 호칭은 사회적 위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것이 친척간에도 작용을 하니, 주로 '시-'자가 들어가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쓰는 호칭과 '처-'자가 들어가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쓰는 호칭이 차이가 난다.

 

'시-'자가 들어가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도 부력의 법칙이 작용한다. 말을 높이게 된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남편의 동생에게도 '도련님, 아가씨'라는 높임말을 사용한다. 반대로 '처-'자가 들어가는 집안 사람들에겐 중력의 법칙이 작용한다. 아내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아내의 남자 형제는 모두 '처남'이다. 그뿐이다. 손위 여자 형제는 '처형'이니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어린 여자 형제는 '처제'다. 그냥 위아래를 구분하는 한자어를 썼을 뿐이다. '-님'이나 '아가씨' 또는 '서방님'과 같은 말을 쓰지는 않는다.

 

호칭의 불평등... 관계의 불평등으로 나아간다. 그러니 여성가족부에서도 이런 불평등한 호칭을 어떻게 고칠지 의견도 모으고 있지 않나.

 

이런 친척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실 가장 평등해야 할 부부간에도 호칭에서는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다. 이 글에도 지적하고 있듯이 (33-34쪽) '연상연하' 커플이라고 하면 어떤 관계를 떠올리는가? 많은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가 많은 관계를 떠올린다. 이상하지 않은가?

 

또한 연상연하에서도 남자가 나이가 많을 경우는 '오빠'라고 여자들이 부른다. 여자가 나이 많을 경우에는 처음에는 '누나' 그러다가 곧 '너'가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에 꽤 인기를 끌었던 노래, '내 여자라니까'에 나오는 가사. 호칭 문제의 문제, 성별의 문제를 잘 드러낸 가사 아닌가 싶다.

 

'...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 / 너라고 부를께 뭐라고 하든지 /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께 / 너라고 부를께 / 뭐라고 하든 상관 없어요 / 놀라지 말아요 / 알고보면 어린 여자라니까 ...' (이승기, 내 여자라니까 부분)

 

예전엔 별 생각없이 흥얼거렸던 노래, 많이 부르고 즐겼던 노래, 그러나 지금 호칭이 문제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이 노래 가사 역시 이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제기, 호칭에서의 남녀 불평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가사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호칭에 대해서 가정이든, 직장이든, 기타 다른 곳이든 많이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수평문화를 추구한다면 우선 호칭에 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호칭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에서 한때 교사와 학생, 교사와 교사, 교사와 교육청 관료들 사이의 호칭을 '-쌤'이나 '-님'으로 하자고 제안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선생님'과 '쌤' 사이 -한희정)

 

문제제기는 좋았으나 환경을 바꾸려 하지 않고, 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고 호칭을 문제삼고, 그것도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에서 지시한 모습으로 제시한 것은 수평 문화를 만들겠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중론이었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에서 그 문제를 없던 것으로 했지만...

 

그렇지만 문제제기는 옳다. 그렇게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가장 평등한 관계를 보여줘야 하는 교육기관에서 불평등한 호칭이 난무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 바람직하다. 사회에서 계속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해야 한다. 그런 논의과정 속에서 감춰져 있었던 불평등한 모습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말해졌다는 것, 언어로 등장했다는 것,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을 '민들레 121호'에서 다시 한번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좋은 기획이었다.

 

그밖에 다른 것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데... 아이들과 관련해서.. 좀더 깊이 있게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ADHD문제 아닌가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얘 혹시 ADHD 아냐?"라는 말의 무게 -김경림'의 글을 참조할 만하다. 우리가 너무 쉽게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나, 어쩌면 그것은 책임 회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글이다. 좀더 많은 연구, 논의가 필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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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사연들 - 내가 모르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다
백우진 지음 / 웨일북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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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 관한 책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말에 대해서 많이 무심하게 지내왔는지도 모른다. 늘 쓰는 말이기 때문에,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게 여기면서 우리말에 대해서 더 깊게, 더 넓게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쓰는 말들 중에 이상한 말이 있어도,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가 함부로 쓰여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우리말이 오염된다는 말을 한글날만 되면 듣고, 한글날만 되면 우리말을 사랑하자는 말들이 나돌아다니기도 하지만, 나머지 날들에는 우리말에 대해서 고민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작년 수능에서 국어가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국어가 어려운 이유는 배경지식이 작동해야 하는 지문이 엄청나게 길어진 데도 원인이 있겠다. 또 배경지식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우리말 어휘에 대하여 많이 알아야 하는데, 과연 학생들 어휘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방법도 없어 제대로 측정도 하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영어사전에는 중고등학교 또는 대학교까지 반드시 알아야 할 단어가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말 사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어떤 연구결과는 집에 있는 책의 수와 학생들 언어 능력 또는 국어 능력이 비례한다고 하던데,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경제력과 학업 성취도가 비례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경제력이 있는 집들은 책도 많을 것이고 시간도 있을 것이고 아이들에게 다른 경험도 많이 시켜줄 수 있을 테지만, 경제력이 없는 집들은 책도, 시간도, 다른 경험도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학업 성취에서 차이가 날밖에...

 

이 책을 읽으며 갑자기 웬 학업 성취... 단어의 사연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인데... 단어들을 많이 알면 표현력이 좋아지고, 또 단어들을 많이 알면 이해력 또한 높다고 봐야 한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아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반대로 모르는 것은 표현할 수 없다. 이 말은 표현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는 것이 많다는 얘기다.

 

알고 있는 단어의 수는 결국 지식의 양이다. 지식의 양은 곧 지식의 활용으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말 단어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중요하다. 단지 학업 성취만이 아니라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범위를 더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 참 고민 많이 했던 철학자, 그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다 결국 자기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칸트가 만들어낸 용어,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미궁의 세계, 미지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이미 존재하는데도 언어가 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면 칸트의 물자체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 인식이 이미 도달한 지점에도 자신이 못 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경제력이 이렇게 어휘력까지 좌우하지 않게 해야 한다. 적어도 학교 교육을 통해서 또는 사회 기반-도서관 등-을 통해서... 책을 읽을 시간을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주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언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도, 또 모르고 있던 것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읽는 재미도 있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또한 우리말에 이런 점이 있었구나 하는 것도 알 수 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우리말의 모습들이 있음도 알게 된다. 여러모로 읽으면 좋을 책이다.

 

나 역시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세상에, 이렇게 잘못 알고 당당하게 썼다니... 부끄러웠는데, 지금이라도 이 책을 통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이랴.

 

그 말은 바로 '양반은 죽어도 겻불을 쬐지 않는다'와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라는 말이다. 여기서 내가 잘못 알고 있던 낱말은 '겻불'과 '씨알'이다.

 

난 당연히 '곁불'이라고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불을 쬐는 것이라고, 그것은 양반 체면에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곁불'이 아니라 '겻'불이란다. '겨'에 사이시옷(ㅅ)이 붙은 말. 왕겨와 같은 것을 태울 때 제대로 불이 붙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양반은 지지부진한 불을 쬐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184-185쪽)

 

마찬가지로 '씨알'을 '씨앗'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베틀에서 '씨'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베틀에서 옷감을 짤 때 가로줄은 씨, 세로줄은 날이라고 한다. ... 씨가 날에 잘 먹어야 옷감이 잘 짜이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바로 '씨가 안 먹힌다'고 말한다. ... 여기서 씨가 베틀의 씨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씨를 '씨앗'으로 알고 '씨알'로 바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말하게 됐다. (185쪽) 

 

자주 쓰는 말임에도 잘못 알고 쓴 대표적인 말 두 가지였다. 물론 이 책에는 더 많은 말들이 나온다. 처음 알게 된 말들도 많고... 또 이 말은 꼭 써봐야지 하는 말들도 있고.

 

그렇게 우리말에 대해서 더 많은 사연들을 쌓아가게 한 책이다. 좋다. 우리말을 많이 알아간다는 것, 우리 문화를 많이 알아간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단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에서도 우리말에 대해 알아가는 것,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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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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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나와 베스트셀러가 된 책. 그러나 읽지 않았던 책. 어렸을 때 읽었던 로마 관련 책들로 만족하며 지낸 시간이라고나 할까. 그러다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그리스인 이야기를 읽고, 또다른 그리스인 이야기를 읽고, 여기에 우연찮게 그리스인인 카잔차키스가 쓴 자서전을 읽고,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한번 주욱 훑어보고, 이제는 로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리스 다음에는 로마다.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붙여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시대가 끝나갈 때 트로이 멸망이 나오고, 이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이네이아스가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인의 시조가 된다는 그런 서사시도 있으니, 로마에 대해서 읽어볼 차례다. 물론 예전이 읽은 로마 관련 책도 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도 있었고, 어린 시절 너무도 감명 깊게 읽었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도 있었고, 기타 등등 여러 책이 있었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는 또다른 세계로 날 인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인 이야기'에서도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책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가 인물을 중심으로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 역사를 좀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지 않은가. 지금 읽어도 그리 손해볼 것은 없는 책이지 않은가. 이제 천천히 올 한해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1권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렇다. 로마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겠는가. 온갖 우연들이 모여 필연이 되어 세계 최강대국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아주 작은 도시 국가에 불과했던 로마가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 제국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겠는가.

 

시오노 나나미는 '아이네이아스' 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을 로마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좀더 길게, 그리고 정통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이야기한다. 신화와 역사의 차이. 그러나 신화는 곧 역사가 된다. 사람들이 믿고 자신들 민족의 신념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 로물루스는 트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리스와 교류를 갖기 시작한 뒤, 로마인은 트로이 함락이 기원전 13세기 무렵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400여 년의 공백을 메울 필요에 쫓겼지만, ...  (20-21쪽)

 

이렇게 표현한 것은 아이네이아스로부터 로물루스까지 수많은 왕들의 이야기를 로마인들이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화를 역사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이 뭐가 중요하랴? 실질적인 로마 창건자는 로물루스이고, 그것은 기원전 753년이라고 하니...

 

로물루스로부터 시작한 로마는 약탈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아내들을 사비니 족으로부터 약탈해온 로마인들. 초기 왕들이 주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는 것 (참 신기하게도 이 시대에는 사람들 수명이 짧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로마 초기 왕들을 보면 재위 기간이 보통 30년이다. 왕이 될 때가 보통 30대일텐데... 기본적으로 70까지는 살았다. 고대 인간들의 수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처음 장면들이기도 했다) 은 이런 약탈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그럼에도 왜 로마는 계속 융성했을까?

 

약탈만을 일삼았다면 결코 융성할 수가 없었을텐데... 이 책에서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빌려 로마가 융성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39쪽)

 

이렇듯 로마는 개방성, 포용성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승리한 다음 무조건 죽이거나, 배제하거나 하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주거나 또는 살길을 열어주는 방식. 그러니 로마가 승리하더라도 패한 쪽에서는 로마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 노예조차도 해방시켜주고, 해방된 노예 자식들에서는 능력만 있다면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니...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시대보다는 한참 뒤로 가지만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노예로 잡혀간 벤허가 해방되어 유산을 물려받고 다시 행세하게 되는 그런 일들, 그것이 영화에서 만들어진 장면이 아니라 로마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정리한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투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방적인 성향이 아닐까. 로마인의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개방성이 아닐까.  ......

 

고대 로마인이 후세에 남긴 진정한 유산은 광대한 제국도 아니고, 2천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서 있는 유적도 아니며,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상대를 포용하여 자신에게 동화시켜 버린 그들의 개방성이 아닐까. (278-279쪽)

 

이렇게 로마인의 장점을 이야기한 다음, 현대인을 비판한다. 그래, 지금 현대 제국들은 어떤가? 그들은 개방을 표방하면서도 폐쇄를 택하고 있지 않은가. 말로는 지구촌이라고 하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문을 꼭꼭 닫는 더욱 폐쇄적인 정책을 펴고 있지 않은가.

 

눈으로 보이는 장벽들 말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계가 하루에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음에도, 오히려 더 폐쇄적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이 말은 마음을 때린다.

 

우리 현대인은 어떠한가. 그로부터 2천 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종교적으로는 관용을 베풀 줄 모르고, 통치에 있어서는 능력보다 이념에 얽매이고,다른 민족이나 다른 인종을 배척하는 일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다. (279쪽)

 

남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역사를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여기를 돌아보는 눈을 갖는 것. 지금-여기를 바로 파악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 로마인 이야기 1권은 이점을 더 생각하게 한다. 아주 먼 과거에서 현재를 보고, 미래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 책은 로마 건국에서부터 약 500년의 세월을 다루고 있다. 책 제목답게 인물을 중심으로 로마 역사를 풀어가고 있어서 흥미진진하다. 다만 흥미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여기를 바라보게도 해주고 있으니, 지구촌 또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로마 건국 시기가 머언 과거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사적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 역할도 하고 있다.

 

또 인물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리스 민주정치와 로마의 정치제도를 비교하기도 한다. 지금 관점에서 옛날 정치체제를 판단하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고대 역사학자들은 그리스 민주정치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리클레스와 로마를 다시 제정으로 이끈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를 거의 동등한 업적을 이룬 정치가로 보고 있음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는 그리스에 어울리는 정치제도를, 로마는 로마에 어울리는 정치제도를, 그리고 그 시대 정치제도에 걸맞는 훌륭한 인물들이 등장했음을, 그것이 바로 한 나라가 융성하기 시작할 때쯤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이런 우연들이 결국은 역사라는 필연으로 이끌었음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음 권으로 계속 여행을 하자...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그러나 끈기있게. 로마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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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18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이 책 때문에 결국
로마까지 갔던 기억이 나네요.

오랜 시간을 들여 완독한 기억입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감회가 무량했다는.

지금은 작가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아예 끊게 되었지만요.

kinye91 2019-02-18 19:40   좋아요 0 | URL
저도 천천히 완독해 볼 작정입니다. 그냥 제목만 알고 넘기기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카알벨루치 2019-02-18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카이사르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멈춘 기억이 납니다 레삭매냐님 로마까지 움직이시다니 역시👍👍👍
 

   시를 읽는 즐거움. 시를 읽는 곤혹스러움. 도대체 시가 무얼까? 언어로 표현했으나 언어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 눈으로 보이게 표현했으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말을 넘어선 말, 언어를 초월한 언어.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왜 시를 읽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찾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냥 읽을 뿐이다. 읽고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면 이해하고, 논리로 이해할 수 없으면 그냥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궁리하기보다는 그냥 실천하는 것. 행하는 것. 읽고 느끼고 받아들이고 거부하고 하는 모든 행위들이 시를 읽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문학상처럼 한 해 동안 문예지에 발표한 시들 중에서 수상작을 골라 실었을 때는 더 그렇다. 예심과 본심을 거쳐 수상작을 결정한다는데, 뒤에 심사평을 보면 이 수상시집은 예심 때 두 명의 시인이, 본심 때도 두 명의 시인이 서로 의견을 나눠 결정했다고 한다.

 

너무도 다양한 시들, 다양한 경향들, 다양한 경험과 연령 대의 시인들과 시들 중에서 각자 개성이 다른 시인들이 다양한 시인과 시들을 선정했을 테고, 그 시들 가운데 한 시를 결정하는 어려움을 겪었겠다.

 

그럼에도 수상시집에는 수상작이 있어야 하니, 이들은 고심 끝에 시를 골랐겠지. 그 시가 한 해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합당한 해설을 곁들이면서. 그렇게. 그 수상시집을 읽는 사람들은 때로는 선정위원들 말에 공감하고, 때로는 반대를 하면서 읽겠지. 나 역시 그랬으면 하지만, 해마다 발표되는 수상시집을 사지는 않고 간혹 헌책방에서 마주치면 사고 마니.

 

좀 늦게 한 해를 대표(?적어도 선정위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뽑겠지)하는 시를 읽지는 못하고, 나중에 읽게 되는 늑장을 부리게 된다.

 

그것이 좋다. 시류와 시는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대를 대변하는 시가 있고, 그 시대를 어루만져주는 시가 있다. 이 시집이 '2017 현대문학상수상시집'이니 주로 2015년도에 발표된 시들이 주를 이룰 것이다.

 

이 시집이 출간된 날짜를 보니2016년 12월이다. 예심 선정위원인 김경후가 시집 귀에 쓴 심사평에 의하면 '작년 한 해 동안 문예지에 발표된 시들을...'이라고 했으니, 수록된 시들은 2015년에 발표된 시들이다.

 

그래서 이 시집에 '세월호'를 생각하게 하는 시들이 많다.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또 국정 농단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바로 직전, 폭풍 전야의 그런 분위기를 다룬 시들. 대표적인 것이 최정례 '안내 말씀'이다. 너무도 직설적으로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그런 시.

 

그렇게 그 시기를 표현하는 시들이 있음에, 시의적절하게 읽을 필요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읽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한다.

 

다 떠나서, 시는 세월의 힘을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이겨낸 시들이 좋은 시로 우리 곁에 머물 수 있게 된다. 시집을 읽다가 그런 시를 만나면 좋다.

 

좋은지 좋지 않은지를 떠나 마음에 머무르는 시도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수상작이 된 '휴일'이다. 우리에게 과연 휴일이 왔을까? 휴일은 여전히 오고 있는 중. 우리에게 기대만을 주고 있는 중. 그래서 더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는 중이 아닐까.

 

휴일,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날. 우리는 그런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닐까? 촛불을 든 이유도 그것일텐데...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라고, 우리가 휴일을 맞이할 수 없다면 그건 촛불을 든 것이 아닐텐데... 여전히 휴일은 오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다.

 

휴일

 

  휴일이 오면 가자고 했다.

 

  휴일은 오고 있었다. 휴일이 오는 동안 너는 오고 있지 않았다. 네가 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는 채로 오고 있는 휴일과 오고 있지 않는 너 사이로

 

  풀이 자랐다. 풀이 자라는 걸 알려면 풀을 안 보면 된다. 다음 날엔 바람이 불었다. 풀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내가 알게 된 것을

 

  모르지 않는 네가

 

  왔다가 갔다는 걸 이해하기 위해 태양은 구름 사이로 숨지 않았고 더운 날이 계속되었다. 휴일이 오는 동안

 

2017 현대문학상수상시집. 현대문학. 2016년. 임승유, 휴일. 15쪽.

 

왜 이 시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대상들이 섞여 있는 이 시가 마음에 와 닿는지,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시에서 2014년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여전히 휴일이 오지 않았다는, 너와 나는 휴일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그런 상태. 그렇게 우리에게 휴일은 계속 오고 있는 중이기만 하다는, 그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치 않은, 그런 시.

 

하지만 휴일은 오겠지. 온다. 와야 한다. 오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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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에네이스
아우구스테 레히너 지음, 김은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 바로 [아에네이스]이다. 아에네이스라는 뜻은 아에네아스의 이야기라고 한다. 트로이 영웅 아에네아스가 트로이가 멸망한 다음 이탈리아까지 모험을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

 

아이네이아스라고도 하는데, 로마 표기를 따라 아에네아스라고 이 책에서는 번역을 했다. 그리스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나오고, 모험담이 나오듯이 지금은 이탈리아가 된 로마 역시 자신들의 이야기가 필요했나 보다.

 

아에네이스가 로마 시대, 그것도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지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결국 로마 역시 위대한 신화, 조상을 지닌 나라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에네아스의 모험은 오딧세우스의 모험과 비슷하다. 신들의 분노로, 특히 아에네아스는 헤라(이 책에서는 유노로 나온다. 그리스에서는 헤라, 로마에서는 유노라고 부르니까) 여신에게 미움을 받아 로마에 정착하기까지 온갖 고난을 겪게 된다.

 

하지만 로마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기원을 그냥 인간으로 둘 수는 없었나 보다. 아에네아스를 여신의 아들, 특히 아프로디테(비너스, 베누스)가 인간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하니, 그들도 신성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거다.

 

온갖 모험, 그러나 운명은 정해진 것.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바닷길에서 겪는 모험은 오딧세우스의 모험과 비슷하지만, 후반부에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겪는 모험은 트로이 전쟁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로마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정복한 민족들을 나름(?) 평등하게 대했다는 것이 이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후반부에는 온갖 전투 장면들이 나오고, 그런 처참한 전쟁 위에 건설된 것이 로마라는 것.

 

로마는 하루 아침에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1'에 나오는 유명한 말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여러 번의 예언이 나온다.

 

아에네아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어떤 예언을 듣게 되는데, 그가 온갖 고난을 겪게 되겠지만 결국 위대한 나라의 시조가 될 것이라는 것... 그의 아들, 아들, 아들... 주욱 가서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는 로마... 로마의 시조가 되는 아에네아스의 뒤를 이어 무려 몇백 년 뒤에야 로마가 건설되는 것이니...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저승에 간 아에네아스가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위대한 로마가 건설될 것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253-255쪽) 

 

오스트리아 사람인 아우구스테 레히너가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을 현대에 맞게 편역했다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가 아는 인물들이 안케세스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이 장면이 바로 로마 건국의 장대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온갖 모험을 겪은 아에네아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사랑과 모험, 그리고 전투, 평화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군인들이 불평하는 소리, 왜 저들 때문에 우리들이 죽어나가야 하는가 하는 말은 전쟁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해준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백성을 위한? 아니다. 진정 백성을 위한다면 전쟁을 피해야 한다. 자신들의 권력,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피하지 않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말로.

 

트로이 인들 중에 몇몇은 이탈리아까지 가기를 거부한다. 지금도 살 만한 곳이 있는데, 왜 이곳을 버리고 가야 하나? 이것은 정복을 거부하는 사람들 이야기로도 읽힌다.

 

이렇게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와 또 꼭 그렇게 다른 곳으로 가서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정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 작품이 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한 로마... 그 군사력 위에 자신들의 부를 쌓아올린 로마. 그러나 로마는 꼭 군사력만으로만 이룩된 것은 아니다. 군사력만으로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 어쩌면 아에네이스는 그 점을 생각하도록 하는 작품일 수도 있다.

 

전쟁으로 멸망한 나라의 영웅이 다른 나라에 가 다시 전쟁으로 나라를 세운다? 그 와중에서 겪게 되는 참화를 중심으로 우리는 이 작품을 읽어야 한다. 정복의 서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전쟁 비극의 서사로, 그래서 평화를 노래하는 작품으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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