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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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계속 헷갈렸다. 카이사르가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었어?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가 어릴 적에 읽었던 위인전기에 있던 인물이니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맞는데, 어릴 적 기억과 역사 시간에 배운 기억과는 다르게 이 책이 읽히는 까닭이 무엇일까?

 

상권에서 느끼지 못했던 헷갈림, 이율배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사르의 모습. 카이사르는 내게는 시저로 다가왔다. 다음이 케사르, 그리고 지금에서야 카이사르로 다가오는데, 발음만큼이나 그에 대한 평가가 자꾸 달라진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가지 생각할거리.

 

1. 민중파 지도자가 독재자가 된다?

2. 난세에는 법가가 평시에는 유가가 득세하는 것 아니었나?

3.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재능, 그리고 지적 능력과 세상을 내다보는 안목이 일치하지 않으면?

 

카이사르는 분명히 민중파다. 원로원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원로원을 개혁하려고 한다. 원로원이 귀족정치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데 일치단결해 있다.

 

원로원을 우리나라 국회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국정을 이끄는 한 축에 국회가 있는데, 그 국회의원의 숫자가지고 논란이 많다. 선출 방식 가지고도 논란이 많고. 예전 로마도 그랬다. 그 놈의 원로원 의원들이 제 권리를 지키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이, 참.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개혁하려는 세력이 맞붙으면 결국 힘을 지닌 쪽이 이긴다. 그런데 그 힘이 어디에 있는가? 군사력? 아마도 카이사르 시대 로마라면 군사력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냥 군사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폼페이우스같은 사람도 카이사르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의 평가에 의하면 카이사르는 군사적 재능에 정치적 재능까지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니, 그가 그 시대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대표로 원로원을 무력화시킨다. 그가 원하는 로마의 방향에 원로원은 이미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무력하게 하면서 자신이 종신 독재관이 된다.

 

국회가 제 구실을 못하니 대통령이 헌법을 개정해 자신의 집권을 영구화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차이는 카이사르는 이제 막 제국이 되어가는 로마를 이끌 방향으로 종신 독재관이 되려 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권력을 물려주어야 할 때 물러나지 않고 그것을 꼭 그러쥐려고 했다는 데 있다. 역사에서 누가 평가를 받는지는 역사의 흐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명확하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이 결국 독재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관용을 바탕으로 한 독재라고 해도 독재는 독재다. 카이사르가 민중파로 불리는 것은 로마가 더 지속해가기 위해서는 민중들의 삶이 나아지는 정책을 펼쳐야 하는데, 그것을 카이사르가 실시했기 때문이다. 귀족정치를 대변하는 원로원을 견제하는 쪽에 섰기 때문이기도 하고.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았을 때, 당대 지성인라고 할 수 있는 키케로는 카이사르 반대편에 선다. 그는 철저하게 원로원 중심의 정치를 원한다. 지식과 교양이 넘치는 키케로임에도 그는 귀족정치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그에게는 정치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안락한 생활에 빠져 민중들의 삶은 원래 그런 것이려니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달리는 차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꼴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잠깐 기쁨에 차 있던 그 역시 죽임을 당하니 말이다. 하지만 키케로가 꼭 잘못 판단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가 귀족정치에 눈 멀어 민중을 중심에 두는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는 민중들의 삶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다만, 그가 제정을 그렇게도 반대했던 이유는, 제정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너무도 막강한 권력을 준다는 데 있다.

 

늘 능력있는 황제가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고, 황제는 선출이 아니라 세습이니 갈등이 있고, 조금 더디더라도, 또 기득권을 누리려고 하더라도 많은 숫자 때문에 서로 견제가 가능한 원로원 중심의 정치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키케로를 시대 감각이 없는, 시대를 내다볼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이 과연 옳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여기에 더해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모두 용서해주었다. 로마인이 재판도 없이 사형당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가 종신 독재관이 되어서 한 일도 원로원 의원들의 서약을 받고 경호원들의 호위 없이 다니는 일이었다. 반대파에게도 이전 권한을 그대로 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법의 기반 위에 관용이라는, 법가라는 토대 위에 유가의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역사는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법으로만 제국을 이끌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 소련이 무너지게 된 이유, 민중파들이 정권을 잡고 종신 독재관이 되고, 법을 정비해서 반대파들을 숙청했지만, 결과는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는 것. 즉, 법만을 중시하면 유연함을 잃고 경직되기 쉽고, 경직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데...

 

관용 정치를 하려던 그를 암살한 사람들이 별다른 대책도 없이, 그저 한 사람을 제거한다고 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황제가 로마에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 카이사르를 암살했다고 하지만, 이들의 암살은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이어서 로마는 제정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카이사르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 기억은 참 얄궂어서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암살 당시 겨우 18세였음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겨우 18살의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가 죽어서야 유언장에 의해 양자로 입적이 되고, 그때부터 그가 여러 위기를 거치고 로마 최고의 존재로 서게 됨을 모르고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의도적으로 했든 아니든 그가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한 이유는 군사적 재능보다는 정치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하니...  

 

아마도 카이사르는 자기 대에서 전쟁을 끝내고 이제는 평화시대가 된 로마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종신 독재관으로서 로마를 이끌어가지만 그는 명확하게 로마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판단하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꽃을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가 피우게 되지만.

 

이렇게 먼 후대에 과거를 보면서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이미 흘러온 역사를 토대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 맞서 그 흐름을 막으려던 사람도 있다. 그때는 시대를 읽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받았겠지만 먼 후대에는 오히려 현대를 예측한 선구자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다.

 

귀족정치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작은 나라에서 패권국가로, 제국으로 넘어가는 로마의 격동기... 그때 등장한 인물, 카이사르.  그가 한 일과 그의 운명은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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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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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패권국가가 되면서 원로원과 평민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이 3권이었다. '승자의 혼미'라는 제목으로, 이제는 다른 국가체제를 마련해야 할 때임을 알려주는 그런 혼란.

 

이 혼란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역사에서 당연한 일인데, 이때 로마에서는 카이사르가 이 역할을 하게 된다.

 

가문은 명문이지만 자신이 속한 집안은 두드러지지 않았던 집안에서 태어난 카이사르.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하고, 어머니 아우렐리아만 잘 알려져 있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로서.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이탈리아 일반 고등학교에서 쓰이고 있는 역사 교과서에 이렇게 나온다고 한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 다섯 가지다.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10쪽)

 

이런 평가를 받는 카이사르지만 30대 이전에는 로마에서 이름을 날리지 못한다. 그는 30대까지를 힘든 상황에서 그 상황을 이겨내면서 견뎌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그 상황에서 허우적거렸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유쾌하게 지냈다고 추측할 수 있게 전개되고 있다.

 

돈이 없음에도 수많은 빚들 지고 살아가는 카이사르. 또 너무도 당당히 연애를 하는 카이사르. 사적으로는 온갖 여성들을 유혹하고 그들과 함께 지내지만 공적으로는 엄격함을 유지했다는 카이사르. 무엇보다도 그 많은 여성들과 교제했음에도 누구 하나 카이사르를 미워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 그에게는 인간적인 매력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활을 거치면서 그는 차근차근 준비했는지도 모른다.어쩌면 현재 정국을 개편하기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때부터 준비했다고 보는 편이 좋겠다. 정권을 잡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행운에 맡겨서도 안 되고, 또 기회만 기다려서도 안 된다.

 

착실히 준비하면서 자신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는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개혁을 할 수 있다. 이 점을 카이사르가 보여주고 있다. 그 준비성, 치밀함, 과단성, 집행력 등등.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행했던 사람, 카이사르. 그런 그에게도 자신이 꿈을 펼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으니...

 

4권은 카이사르의 유년시절부터 루비콘 강을 건너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40대가 되어서야 이제 자신의 이름을 드날리는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을 통해서 장군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며, 그런 전쟁에 대한 기록을 함으로써 문필가로서의 모습도 보여주는 카이사르. 부하 장병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며, 전쟁에서 지휘관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몸소 보여주는, 또한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너무도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하는 카이사르.

 

그러니 그에게는 지성과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과 지속적인 의지가 갖춰진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평이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4권에 나와 있는 카이사르의 모습은 황제가 되기 위한 카이사르가 아니라 평민들이 처지에 서서, 원로원 체제로는 로마의 본질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 평민파로서의 카이사르다. 그를 평민과는 정반대 입장에 서서 정치를 했다고 여기기 쉬운데, 그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4권이다.

 

사회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4권이었다. 이제 5권에서는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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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일이 낸 첫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다.

 

  시 하면 무언가 아름답고, 세련되고, 조금은 돌려 말하는 그런 표현방식을 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장정일은 첫시집에서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들이밀었다.

 

  특히 '낙인'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시에서 대중문화를 잘 융합시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음에 신선한 느낌을 받기도 했고.

 

  그는 어느 한쪽에 자신의 생각을 고정시키지 않고, 기존 관념을 넘어서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시인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내가 읽은 그의 시집은 달랑 두 권... 『햄버거에 대한 명상』과 『서울에서 보낸 3주일』이 다다. 소설도 썼지만 읽은 것은 없고,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그냥 그런 책을 냈구나 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다 다시 그의 초기 시집에서 뽑은 시들을 엮은 선시집을 발견하고는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중고서점에서 구입을 했다.

 

이 시집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현재는 절판된 『상복을 입은 시집』 (1987), 『서울에서 보낸 3주일』(1988), 『천국에 못 가는 이유』(1991)에서 가려 뽑은 것들이다. 여기 실린 시들이 내 시의 진면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 시집 가운데서도 일부러 가장 '내 것'다운 것을 빼고 평이한 형식과 친근한 주제를 가진 것들만 골랐다. 그만큼 '늙어, 힘이 빠졌다'는 뜻도 되지만, 현대시의 쇄말성과 난해함을 씻어보자는 뜻도 있다. (120쪽) 

 

2005년이면 장정일이 1962년생이라고 하니 43-44세 정도의 나이다. 시인으로서는 중견 시인이 될 때인데, 그는 시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다른 글쓰기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고, 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시귀'가 빠져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판된 시집들은 구하기 힘드니, 이렇게 그 시집들에서 자신이 뽑아서 실은 시들을 독자들이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이 시집은 시들 끝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았다. 왜 그런 시를 썼는지 알 수 있기에 장정일의 고민을 알 수 있어서 더 좋은 시집이다.

 

많은 시들 중에 '개'라는 시를 보자.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 시 끝에 있는 시인의 말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개

 

  코가 길고 귀가 껑충한

  엄숙하고 예절바른 개들의 사회에서

  함부로 으르렁대고

  함부로 이빨을 드러내 보이고

  함부로 짖고 물어뜯으며

  함부로 씹하고 사생아를 낳고

  하루 종일 놀고먹으며 빈둥대는 개를 가리켜

  저 개는 인간 같이 더러운 성질을 가졌군

  하고……

 

나는 개를 좋아한다. <벤지>라는 영화도 몇 번이나 봤다. <아이 필 러브>라는 주제곡도 기억난다. 길에서 개를 보면 저절로 발걸음이 멈춘다.

 

장정일. 주목을 받다. 김영사. 2005년. 38쪽.

 

개만도 못한 * 이런 욕을 많이 하는데, 지금도 이런 개만도 못한 *들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개들 처지에서는 인간 같은 개, 또는 인간만도 못한 개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이 될 수도 있겠다.

 

개나 다른 짐승들, 또는 생명들에게 인간에 빗대어 비난하는 욕들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할텐데...

 

이 '개'라는 시를 보면 어려운 말 하나 없다. 그럼에도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머리 속에서 계산을 하기 전에 이미 시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오는 것. 이런 평이한 시. 그러나 할 말을 다 하는 시. 장정일이 우리에게 보여준 시들이다.

 

다른 많은 시들 역시 이렇듯 머리 속에서 한참 궁리하기보다는 마음으로 그냥 파고들어 온다. 쇄말시, 난해시가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장정일이 쓴 시들은 이랬다. 그리고 그 시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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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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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포에니 전쟁까지 치르면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 이제 외부의 적은 거의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적이 외부에 있었을 때 결속되었던 단결이 외부 적이 없어짐으로써 내부에서 적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향했고, 그로 인해 내부 결속이 깨지는 과정이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일이다.

 

이 3권은 그 과정을 다루고 있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데, 정체(政體)가 경제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 상황. 또는 사회개혁을 하지 않으면 로마에 멸망당했던 나라들과 같은 전철을 밟을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시대.

 

시오노 나나미는 이 권의 제목을 '승자의 혼미'라 붙였다. 이제 로마는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 강대국이 된 로마를 어떤 나라로 만들 것인가가 논의되기 시작하는 때. 이 때 등장한 형제가 바로 그라쿠스 형제다. 무려 9살 차이가 나는 형제라는데, 두 형제가 모두 평민을 대변하여 정책을 펼친다. 그러다 원로원 중심의 권력자들에게 살해당한다.

 

이들은 전쟁이 없는 나라에서 이제는 경제, 복지 쪽으로 눈을 돌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지 않으면 로마도 다른 나라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한다. 그러나 개혁은 늘 방해를 받는다. 기득권 세력들에게 개혁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권리, 이익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국민들의 지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라쿠스 형제도 평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일 때 이 형제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라쿠스 형제에게는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을 비극으로 이끈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웠던 개혁정책들은 그들과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이어지게 된다.

 

형제가 죽은 뒤 마리우스가 등장하지만 정책면에서는 징집병을 지원병으로 바꾸는 것 외에는 별로 한 것이 없고,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할 뿐이다. 그와 술라의 시대에 여러 정책들이 입안된다. 그 중에 하나가 동맹국 사람들에게도 시민권을 주는 것. 그라쿠스 형제가 처음 제기했지만 그땐 통과되지 못했던 법안이 이때 통과가 되고, 이것으로 인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산다.

 

나나미는 이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건국하는 과정에는 어떤 나라도 이질분자를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패권국이 된 이후에도 이질분자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국가는 드물지 않을까.' (142쪽)

 

이것이 과거에 일어난 일만이 아님을 최근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주민의 나라라 할 수 있는 미국이 엄청난 장벽을 쌓고 있지 않은가. 역사는 이래서 현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로마가 앞으로도 더 오래동안 지속되는 이유는 비록 동맹시 전쟁이라는 전쟁을 겪었지만, 이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는 데 있다. 아직 로마는 발전할 여지가 더 있는 것이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다음 원로원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는 술라가 등장한다. 술라는 추방당하지만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한다. 내전이 시작된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 이 싸움에서 이긴 승자가 로마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이끈 군대들은? 나나미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란 오래 계속될수록 당초에는 품지 않았던 증오심까지 고개를 쳐들게 되는 법이다. 전선에서 싸우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게 된다. 오직 증오심만이 그들을 몰아세운다. 내전이 처참한 것은 목적이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173쪽)

 

또 미국이다. 노예제 문제로 남북전쟁을 겪은 미국. 이들도 내전을 겪었다. 내전을 겪을 당시 전쟁 당사자였던 민중들은 과연 노예해방이라는 대의에 대해 생각했을까? 아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적, 그 적을 물리치는 것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내전이 위험한 것이다. 끝나고도 그 상처를 치유하려면 오래 걸리니까.

 

술라, 그는 쿠테타로 집권을 하지만 그가 원한 로마는 공화제 로마다. 그는 이 점에서 확고하다. 평민들이든 귀족들이든 탁월한 누군가가 절대 권력을 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이 반대했지만 이미 실행되고 있는 법안들을 모두 폐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독재자였지만 시대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믿고 있는 공화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조건에서. 

 

따라서 술라는 공화제가, 원로원 중심으로 지속되게 하기 위한 법안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술라가 아무리 이런 법안들을 마련해 놓았어도 그것은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만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법안을 무력으로 깨뜨리는 모습, 무력으로 법안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술라가 죽자 그 후예들은 술라가 만들어논 법을 무시한다. 그들에게는 무력이 있다. 무력으로는 못할 것이 없다. 내전을 통해 술라가 만들어놓은 로마 공화제 원칙은 다시 그 후예인 폼페이우스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이제 로마는 절대자가 등장할 때인 것이다. 법이 아무리 정비되어 있어도 힘을 가진 자가 등장해 법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힘을 지닌 자가 절대자가 나오지 못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이런 모순 속에서 로마는 승자의 시대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시오노 나나미는 이 시대를 '승자의 혼미'라고 했다.

 

폼페이우스가 힘으로 법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이 절대자가 되고 싶어했겠지만, 절대자는 그가 만들어놓은 길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다음 권에 등장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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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8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집 제일 앞부분에 실려 있는 시인의 말이 곧 시다. 시인의 자세다.

 

  시를 쓰면서 늘 생각하는 비유란 / 결국 결합이다. /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를 접붙여 / 새로운 의미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 / 그런 게 시라고 배웠다./ (중략) /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 내가 앞으로 계속 시를 쓴다면 / 결합이 아니라 분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 그동안 너무 많이 붙어먹었다는 것부터 고백해야 한다고 (5쪽)

 

  시는 서로 다른 것을 연결시켜 준다. 연결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데, 시인의 말에서는 이제는 분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한다.

 

  왜? 그렇다. 분리가 그냥 잘라내는 것,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뭉뚱그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우리를 한계짓고,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언어에서 분리해야 한다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쉽게 어떤 말로 뭉뚱그려지지 않았던가. 또 뭉뚱그리려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개인이 지닌 개개인의 특성은 그 뭉뚱그림 속에 파묻혀 버리지 않았던가.

 

비유가 서로 다른 대상에서 비슷한 점을 찾아내거나 비슷하게 만드는 표현이라면 비유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리가 되어야 한다. 한 대상을 뭉텅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이 모여 있는, 융합되어 있는 부분들의 결합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분리를 통해서 다시 결합을 할 수 있다. 즉 분리와 결합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동전의 영면과도 같은 것.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시인의 말은 우리 사회가 결합에만 너무 치중하지 않았나, 하다못해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지 않느냐고...개개인의 특성을 생각하기 보다는 먼저 전체를 보고, 전체 속에 개인을 위치시켜 버리는 사고 습관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개인이 없는 전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자꾸 전체란 이름으로 또는 '우리'란 이름으로 부분을, '나'를 가두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란 시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앞부분 생략)

나와 애인의 얼굴을 하나로 뭉뚱그리려는 체제와 이데올로기는 사랑을 모른다 /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쳐놓은 막을 찢어버린 자리에서 사랑은 시작되고 / 그 길 끝에서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뒷부분 생략) - 33쪽

 

이런 시인이니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는 말에도 다른 생각을 한다.  '어떤 수업'이라는 시다.

 

(앞부분 생략)

꼭 숲을 이루어야 할까? / 숲 밖에 서 있고 싶은 나무도 있지 않을까? / 벌판에 키 작은 나무로 서서 / 더불어 숲이 아닌 / 지나가는 바람이며 길 잃은 새들에게 어깨를 내주는 ' 더불어 홀로의 삶도 괜찮지 않을까? (뒷부분 생략) - 158쪽.

 

뭉뚱그림. 결합만을 앞세웠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뭉뚱그림에서 부분을 찾아내는 것, 그 부분을 인정해 주는 것. 부분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함임을, 그래서 전체는 완전한 부분들의 결합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뭉뚱그림 속에서 지내다가는 어떤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지, 뭉뚱그림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일을 '자두맛사탕'이란 시에서 너무 잘 보여주고 있다.

 

자두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두맛만을 기억하고 그것만을 인정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로 뭉뚱그림의 사회다.

 

이런 뭉뚱그림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모습이 시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군상'이란 시가 그렇다. 2016년 촛불 시위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이응노 화백의 그림 '군상'과 연결시키는 것, 그렇다고 무작정 결합이 아니다.

 

독립된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이루듯, 우리 사회를 바꿀 힘을 보여주었던 것, 시인은 이렇게 뭉뚱그림에서 벗어나 다른 연결을 한다.

 

무엇보다 제목이 된 시 '등 뒤의 시간'

 

  등 뒤의 시간

 

봄이 와도

껶여 나간 나뭇가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봄이 왔다고 부산한 이들 가운데

지난겨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는 이 드물고

유난히 푸짐하게 내렸던

하얀 눈발을 은총이라 착각하며

껶여 나간 나뭇가지 같은 건

진작 잊어버렷을 게다

눈도 쌓이면 죄업의 무게를 이루듯

아름다움은 곧잘 배반을 동반하는 법

그러므로 새순이 돋는 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기도 하지만

그 앞에 무수한 죽음이 있었다는 걸

슬쩍 밀쳐내기도 한다

 

박일환, 등 뒤의 시간. 삶창. 2019년. 40쪽.

 

이 시에서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우리는 자주 우리 등 뒤의 시간을 밀쳐내고 살지 않는가. 마치 앞만 존재한다는 듯이. 이것 역시 시간들의, 삶들의 뭉뚱그림 아니겠는가. 이렇게 뭉뚱그려진 존재들을 시인은 하나하나 완전한 존재로 다시 불러내고 있다.

 

전체는 이러한 개별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음을, 쉽게 하나로 뭉뚱그려서는 안 됨을 이 시집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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