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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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계속 헷갈렸다. 카이사르가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었어?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가 어릴 적에 읽었던 위인전기에 있던 인물이니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맞는데, 어릴 적 기억과 역사 시간에 배운 기억과는 다르게 이 책이 읽히는 까닭이 무엇일까?

 

상권에서 느끼지 못했던 헷갈림, 이율배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사르의 모습. 카이사르는 내게는 시저로 다가왔다. 다음이 케사르, 그리고 지금에서야 카이사르로 다가오는데, 발음만큼이나 그에 대한 평가가 자꾸 달라진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가지 생각할거리.

 

1. 민중파 지도자가 독재자가 된다?

2. 난세에는 법가가 평시에는 유가가 득세하는 것 아니었나?

3.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재능, 그리고 지적 능력과 세상을 내다보는 안목이 일치하지 않으면?

 

카이사르는 분명히 민중파다. 원로원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원로원을 개혁하려고 한다. 원로원이 귀족정치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데 일치단결해 있다.

 

원로원을 우리나라 국회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국정을 이끄는 한 축에 국회가 있는데, 그 국회의원의 숫자가지고 논란이 많다. 선출 방식 가지고도 논란이 많고. 예전 로마도 그랬다. 그 놈의 원로원 의원들이 제 권리를 지키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이, 참.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개혁하려는 세력이 맞붙으면 결국 힘을 지닌 쪽이 이긴다. 그런데 그 힘이 어디에 있는가? 군사력? 아마도 카이사르 시대 로마라면 군사력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냥 군사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폼페이우스같은 사람도 카이사르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의 평가에 의하면 카이사르는 군사적 재능에 정치적 재능까지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니, 그가 그 시대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대표로 원로원을 무력화시킨다. 그가 원하는 로마의 방향에 원로원은 이미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무력하게 하면서 자신이 종신 독재관이 된다.

 

국회가 제 구실을 못하니 대통령이 헌법을 개정해 자신의 집권을 영구화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차이는 카이사르는 이제 막 제국이 되어가는 로마를 이끌 방향으로 종신 독재관이 되려 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권력을 물려주어야 할 때 물러나지 않고 그것을 꼭 그러쥐려고 했다는 데 있다. 역사에서 누가 평가를 받는지는 역사의 흐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명확하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이 결국 독재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관용을 바탕으로 한 독재라고 해도 독재는 독재다. 카이사르가 민중파로 불리는 것은 로마가 더 지속해가기 위해서는 민중들의 삶이 나아지는 정책을 펼쳐야 하는데, 그것을 카이사르가 실시했기 때문이다. 귀족정치를 대변하는 원로원을 견제하는 쪽에 섰기 때문이기도 하고.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았을 때, 당대 지성인라고 할 수 있는 키케로는 카이사르 반대편에 선다. 그는 철저하게 원로원 중심의 정치를 원한다. 지식과 교양이 넘치는 키케로임에도 그는 귀족정치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그에게는 정치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안락한 생활에 빠져 민중들의 삶은 원래 그런 것이려니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달리는 차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꼴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잠깐 기쁨에 차 있던 그 역시 죽임을 당하니 말이다. 하지만 키케로가 꼭 잘못 판단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가 귀족정치에 눈 멀어 민중을 중심에 두는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는 민중들의 삶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다만, 그가 제정을 그렇게도 반대했던 이유는, 제정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너무도 막강한 권력을 준다는 데 있다.

 

늘 능력있는 황제가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고, 황제는 선출이 아니라 세습이니 갈등이 있고, 조금 더디더라도, 또 기득권을 누리려고 하더라도 많은 숫자 때문에 서로 견제가 가능한 원로원 중심의 정치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키케로를 시대 감각이 없는, 시대를 내다볼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이 과연 옳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여기에 더해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모두 용서해주었다. 로마인이 재판도 없이 사형당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가 종신 독재관이 되어서 한 일도 원로원 의원들의 서약을 받고 경호원들의 호위 없이 다니는 일이었다. 반대파에게도 이전 권한을 그대로 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법의 기반 위에 관용이라는, 법가라는 토대 위에 유가의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역사는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법으로만 제국을 이끌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 소련이 무너지게 된 이유, 민중파들이 정권을 잡고 종신 독재관이 되고, 법을 정비해서 반대파들을 숙청했지만, 결과는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는 것. 즉, 법만을 중시하면 유연함을 잃고 경직되기 쉽고, 경직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데...

 

관용 정치를 하려던 그를 암살한 사람들이 별다른 대책도 없이, 그저 한 사람을 제거한다고 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황제가 로마에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 카이사르를 암살했다고 하지만, 이들의 암살은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이어서 로마는 제정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카이사르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 기억은 참 얄궂어서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암살 당시 겨우 18세였음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겨우 18살의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가 죽어서야 유언장에 의해 양자로 입적이 되고, 그때부터 그가 여러 위기를 거치고 로마 최고의 존재로 서게 됨을 모르고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의도적으로 했든 아니든 그가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한 이유는 군사적 재능보다는 정치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하니...  

 

아마도 카이사르는 자기 대에서 전쟁을 끝내고 이제는 평화시대가 된 로마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종신 독재관으로서 로마를 이끌어가지만 그는 명확하게 로마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판단하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꽃을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가 피우게 되지만.

 

이렇게 먼 후대에 과거를 보면서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이미 흘러온 역사를 토대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 맞서 그 흐름을 막으려던 사람도 있다. 그때는 시대를 읽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받았겠지만 먼 후대에는 오히려 현대를 예측한 선구자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다.

 

귀족정치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작은 나라에서 패권국가로, 제국으로 넘어가는 로마의 격동기... 그때 등장한 인물, 카이사르.  그가 한 일과 그의 운명은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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