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요즘 시대에 딱 맞는다. 코로나19로 대면이 줄고, 비대면이 는 시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고, 만나도 가급적 대화를 하지 않는. 5인 이상 모임이 계속 금지되고 있는 그런 시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감염병을 차단하는 가장 빠른 길은 만남을 막는 것. 그러나 언제까지 만남을 막을 수는 없다. 만남이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죽하면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써가며 홀로 지내는 사람들을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겠는가. 그렇게 인간은 만나면서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데, 질병으로 인해 그것이 힘들어지고 있으니, 사람들이 지니게 되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때 방구석에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이런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에는 또 큐알코드도 수록되어 있어, 스마트폰으로 큐알 코드를 찍으면 미술작품들을 감상할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또한 미술하면 서양미술을 떠올리는데, 이 책은 그 점을 넘어서 우리나라 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그간 우리가 소홀히 다루었던 한국미술. 한국미술가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 그 작가가 지닌 특성을 하나 뽑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 그 작가들의 개성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총 10명의 작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중섭, 나혜석, 이응노, 유영국, 장욱진,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 백남준, 이우환이 바로 그들이다.


제목을 보면 그 작가가 지닌 특성을 알게 해주는데, 제목에서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 호기심을 충족신키는 방향으로 책을 서술하고 있다. 


'소'를 그린 화가로 유명한 이중섭의 경우,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사실 그에겐 두 개의 사랑이 있었다?'


이런 제목을 보면 읽기 전에 추측을 한다. 두 개의 사랑이라? 하나는 분명 소일텐테, 그럼 하나는? 하면서. 읽어가면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답이 나오기까지 화가에 대한, 그림에 대한 설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혜석의 경우는 '인생의 황금기에 미스터리한 <자화상을 남겼다고?'>다. 나혜석이 그린 자화상이 어딘가 어두워보이는데, 그가 파리를 비롯한 세계여행을 할 때 그렸다는 자화상이 왜 이렇게 어두운 면을 보여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최초하는 수식어를 많이 달고 있는, 시대를 앞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나혜석의 삶에 대해서 알아가면 그 그림이 그렇게 표현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워낙 유명해서 알고 있는 작가도 있지만, 처음 들어보는 작가도 있다. 그 중 유영국 같은 경우는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사람이라고. 그가 이중섭과도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우환 역시 이름을 들어봤으나, 그의 작품은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되어 반갑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보게 되는 즐거움도 좋고 작가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는 책인데, 방구석 미술관이라는 말답게 어느 한 작가에 그치지 않고 여러 작가들을 소개해줘서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강명 소설은 재미있다. 우선 잘 읽힌다. 그리고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없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야 한다. 끝까지 읽고도 곰곰 생각하게 만든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주요 등장인물은 셋이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남자, 여자, 아주머니다. 구체성을 부여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이름과 상관없이 구체성이 살아난다. 읽어가면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또는 우리가 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이 '그믐'이다. 생소하다. 그믐이라니..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달. 그런 그믐을 제목으로 달고, 작게 다른 제목이 달려 있다.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140쪽)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그믐과 비슷하다는 얘기인데... 내가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이 아주 조금 확실할 뿐, 나머지는 다른 것에 가려져 불확실하다는 것. 사실 우리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은 왜곡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도 조작된다고 하는데...


한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 이런 다른 기억들이 만나도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기 어렵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아주머니의 아들을 죽였다. 소위 말하는 학교 폭력이다. 학교 폭력하면 패턴이 나타난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


학교 폭력을 바라보는 사람에 의해 학교 폭력은 일정한 패턴으로 그려진다. 가해자의 폭력에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거나, 가해자의 폭력에 참다참다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거나, 그렇게.


그 패턴이 진실인 양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되고, 진실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다른 것들을 만들어 간다. 기억조차도.


가해자, 피해자를 명확하게 나눌 수 있을까? 소설은 가해자인 남자가 피해자였음을 보여주는 쪽으로 가고, 피해자의 엄마인 아주머니가 가해자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진행이다. 그야말로 패턴이다. 패턴의 양 축이 있으면 중간이 있어야 한다. 그 중간에 여자가 나온다.


남자를 사랑하는, 아니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인 여자. 하여 이 소설은 각 장마다 세 개의 낱말들이 병치되어 나타난다. 남자-여자-아주머니를 연상할 수 있다.


여기에 신비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우주의 알'이란 것을 도입해, 남자는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남자. 그는 선택해야 한다. 미래를 알고 있기에 어떻게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를.


소설의 끝부분에 가면 반전이 있다. 그냥 중간에서 피해자로만 살아왔던, 다른 이름을 가진 동창들을 질투하고 부러워했던 여자가 다른 면에서는 가해자였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남자와 아주머니도 이제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렇게 우리 삶이 명확하게 구분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얽히고 설켜 있다. 이렇게 얽히고 설켜 있는 것에서도 명확한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에는 거짓이 섞여 들어가지 않는다.


소설은 학교 폭력에 또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은 어디까지인가? 그 죄는 과연 씻길 수 있는가? 피해자에게 가해진 피해가 과연 아물 수 있는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학교 폭력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 맺으며 했던 말과 행동들이 과연 자신의 기억과 맞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부분을 전체로 여기면서 지내왔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신의 기억 속에 갇혀 다른 면을 보지 못하고, 결국 그믐처럼 해가 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게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한아 시는 대체로 어둡다. 무언가 무거운 분위기를 풍긴다. 축제날이라고 할 수 있는 시 제목 축일도 끝부분에 가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축일인데 네가 죽어야 할 날이 이런 날이라니... 어쩌면 이것은 우리들에게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삶이 축제이듯, 죽음도 축제여야 한다. 장자를 예로 들 필요도 없다. 포레스트 카터가 쓴 "제로니모"에 보면 '죽기에 좋은 날'이라는 구절도 나온다.

 

  죽기에 놓은 날, 그날 죽는다면 그건 축제다. 행복이다. 그렇게 우리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살아간다.

 

죽음 이후는 도무지 알 수 없으므로. 죽음 이후를 기억할 수도 없으므로. 그러므로 기억을 통해 과거를 현재에 불러오지만, 미래를 불러올 수 없다. 기대, 예측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현재를 보라. 자연은 그 자체로 살아간다. 동물도 그 자체로 살아간다. 이들은 그날을 산다. 그들에게는 그날이 바로 삶이고, 축제다. 그게 다다. 더 무엇을 이야기하랴.

 

하지만 우리 사람에게는 오늘이 그날이 아니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린다. 오지 않을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소모한다.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이 얼마나 큰 낭비랴.

 

축제에 가서 다음에 올 축제를 기다리며 지금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축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과연 행복이 올까?

 

정한아 시 '축일 祝日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축일(祝日)

 

꿀벌들이 붕붕거린다

희고 붉은 꽃들이 재빨리 피어난다

까치가 귀가 아프도록 짖어댄다

대기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너는 오늘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네가 죽어야 할 날은 이런 날이다

 

정한아, 울프 노트,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2쇄. 25쪽.

 

지금은 삶이다. 지금은 오늘이다. 오늘은 축제날이다. 그런 축제날을 두고 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고, 축제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바야흐로 좋은 날들이다. 축일이다. 이제 나도 오늘을 즐겨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슐러 K. 르귄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달랑 세 권. 그럼에도 이 작가에게는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르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읽고 싶어지니 말이다. 아마도 "배앗긴 자들'이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 책은 르귄의 수필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 중에서 예술가의 자의식을 이야기한 이런 구절.


예술이 갖는 의미는 과학적 의미와 다르다. (68쪽)


글쓰기는 위험한 입찰이다.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다. 운에 맡겨야 한다. 나는 기꺼이 내 운을 걸었다. 그리고 그 자체를 너무 좋아한다. 내 글이 오독되고 오해받고 오역되더라도. (69쪽)


이보다 더 작가 의식을 드러낸 구절이 있을까 싶다. 그렇다. 글쓰기는 자신을 던지는 모험이다. 입찰이라고 하는 표현을 하면 낙찰이나 유찰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도 모험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독자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기나긴 여정을 떠나는 모험.


그러니 르귄이 자신의 글이 잘못 읽히더라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작가들이 이렇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우선. 독자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를 먼저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작가를 르귄은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은 해설이 아니다. 예술가는 예술을 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렇다. (69쪽)


이런 작가의 작품은 한 방향으로 고정되지 않아서 좋다. 어떤 방향으로 해석해도 좋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이 들 수 있다. 르귄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젊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 읽었을 때 다르게 느꼈다는 것으로 예술의 힘을 알 수 있다.


무의미한 보상의 끝없는 순환에 갇힌 인간의 상상력은 굶주림에 갇혀 회생 불가능해진다. (76쪽)


자,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이유는 자신이 또는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싶어서다.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보상이다. 무의미한 보상이 아닐지 몰라도 이렇게 보상을 바라고 작품 활동을 하다보면 결국 상상력의 고갈을 부른다. 


상상력의 고갈은 진부한 이야기만을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쉬운 길을 택하게 되면서 자신을 변명하게 된다. 르귄이 이렇게 지적한 것처럼.


용이함은 경솔함과 그럴싸함만 낳는다. (76쪽)


용이함, 편리함, 쉬움. 이런 것만 추구하면 어려움을 배제하게 된다. 그런데 쉬운 길로만 가면 결국에는 모두가 파멸하는 입구로 들어서게 된다. 성장, 성장, 발전, 발전 하고 외쳐왔던 인류가 지금 어떤 지경에 처해 있는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지구는 어려움에 빠져 있으며, 인류는 곤경에 처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어야 하는데.. 르귄은 그것을 양을 추구하던 세계에서 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마침내 시작한 '인류의 지배와 무한의 성장이라는 목표를 인류의 적응과 장기적 생존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사고의 전환이 바로 양에서 음으로의 전환이다. 그 사고에는 덧없음과 불완전함에 대한 수용도 포함되며 불확실성과 임시변통에 대한 인내도 포함된다. 물과 어둠, 그리고 땅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39쪽)


이렇게 사고의 전환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르귄이 자신의 예술관을 관철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남들이 보지 않으려 하는 것도 본다. 남들이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말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벌거벗은 임금님'에 등장하는 어른들처럼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눈 감고 있다. 보이는데도 보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본 것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냥 눈 감아 버린다. 그래서 세상은 더더 나쁜 쪽으로 간다. 


우리의 왕이 벌거벗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 한 아이가 왕이 벌거벗었다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의 버릇없는 내적 꼬마가 지껄이기를 참고 기다릴 셈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벌거벗은 정치인들을 아주 많이 보게 될 것이다. (199쪽)


이 구절을 읽고 얼마나 마음이 뜨끔했는지... 정말, 벌거벗은 정치인 투성이인데, 우리는 그들에게 벌거벗었다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옷을 입은 양 말하고 행동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그들을 탓하기에 앞서 눈 감고 지내는, 아니 눈 뜨고도 못 보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나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그들에게 분노만 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구절이 있다.


분노가 모욕과 무례의 올바른 대처법이긴 하지만 현재의 도덕적 풍토에 따르면 자신의 생각을 꾸준하고 단호하게 표현하며 도의적인 행동을 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보게 되는 것 같다. (214쪽)


바로 이 말. 그들에게 벌거벗었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그것이 왜 벌거벗은 모습인지를 보여줄 수 있게 꾸준하고 단호하게 도의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한다. 그냥 분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된 권리는 분노를 통해 강력히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분노로는 권리를 잘 이행할 수 없다. 권리는 집요하게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 (215쪽)


지금까지 권리를 찾기 위해 분노를 모아 사회 변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 더 집요하게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사회 정의의 실현은 지지부진하니말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책에 나온 르귄의 말을 가슴에 새기기로 한다. 나도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였으면 한다. 


나는 진실을 중요시하고 선을 나누는 행동이 내 나라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취급받지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나라가 남의 나라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186쪽)


이렇게 사회, 정치를 생각하게 하는 글들도 있지만, 고양이 파드와 지내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르귄의 수필집... 소설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글들이 많다.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너무 필요한 문학상'이라는 제목을 단 글을 읽으면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문학상을 두고 벌어졌던 일과 관련지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많은 날들이 있다. 일년만 해도 365일이 있다. 그런 날들 가운데 이름이 붙은 날들이 있다. 다 알지는 못하지만, 특정한 날들은 기억하고 기념한다.


  국경일, 명절 등등. 이런 날들 중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날이 있다. 바로 여성의 날. 남성의 날은 없냐고? 있다. 그런데도 남성의 날은 잘 기억하지 않는다. 잘 기념하지도 않는다. 


  왜냐고? 남성은 여전히 주류이기 때문이다. 주류이기 때문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농담으로 (아마도 진담일 수 있다) 3월 8일을 제외한 364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남성의 날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만큼 남성의 권력이 강하다는 얘기다. [빅이슈] 이번호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일본의 이토 시오리와 우리나라 브장, 디담 작가를 인터뷰한 글을 실었다.


여기에 이토 시오리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울린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데...


"함부로 사람을 범주화해 차별하지 않고, 그 누구라도 진심으로 나는 나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37쪽)


존중받는 사람으로서 함께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사회는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그들을 알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또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행동할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빅이슈]를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이번 호에서는 일본과 한국 두 작가의 인터뷰 외에도 늘 꼭지를 차지하고 있는 글들도 읽을 만하다.


읽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꼭 읽어야 한다.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요즘 대세가 된 유튜브에 관한 글도 좋았다. 자기 나름대로 삶의 방식을 선택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 다양성이 인정되는 그런 사회를 만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