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쟁 - 글로벌 인공지능 시대 한국의 미래
하정우.한상기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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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현재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화두이지만, 너무 부풀려져도 안 되고 너무 어렵게 받아들이거나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9쪽)라고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한상기는 말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면 결국 종속으로 가는 길만 남게 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습니다. 개인들은 인공지능의 능력과 한계를 제대로 알고 써서 나의 경쟁력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함니다. 아직은 초창기의 불완전한 기술입니다.' (345-346쪽)라고 또다른 저자인 하정우는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의 말은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없다. 이미 우리 곁에 온 인공지능이다. 거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계적인 추세와 우리나라의 상황을 살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이야기한 것이 이 책이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보니 우리나라도 인공지능 강국이라고 한다. 세계 10위 안에 드는 나라라고 하고, 이미 많은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니,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 다른 나라의 일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는 앞으로도 인공지능의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미 시작된 인공지능에 대한 개발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류에게 주어진 큰 화두라는 말과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어느 한 나라가 멈추었다고 해서 모두가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멈추지 않은 나라는 다른 나라들 위해 군림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어느 한 나라도 인공지능 개발을 중단할 수가 없다. 뒤처질 것이 뻔한 것을 알면서, 그러면 다른 나라에 종속될 것을 알면서도 개발을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공지능 개발의 윤리다. 사회적 합의, 숙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 무한정 앞으로 나갈 것이고, 인류에게 어떤 치명적인 해가 될지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개발된 인공지능만으로도 인류가 위협을 느끼기도 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움에 차서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공지능을 개발할 때 가이드라인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이드라인은 '인공지능은 사람의 목숨과 관련해서는 가치판단을 하지 말라'(310쪽)여야 한다고 한다.


사람의 목숨은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일에 인공지능이 가치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 이 사실 하나만은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이드라인을 지키면서 인공지능을 개발한다고 해도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에 대한 개발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처음에는 개발된 자료들을 공개했던 많은 기업들이 이제는 비공개로 돌아선다고 한다. 공개해서 인류가 협업을 해서 인류의 생활을 개선하는 쪽으로 나아가려는 목표를 지녔었다면, 이제는 돈이다. 자본이다. 이윤을 위해서 인공지능에 뛰어드는 기업이 늘어났다. 나라도 마찬가지고.


그런 이윤을 우선시하면 인류의 가치는 뒤로 처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 아닌가 한다. 


인공지능이 쓰이는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도 이 대담집에 잘 나와 있고, 그것의 한계에 대해서도 살피고 있다. 동의하지 못하는 내용도 있지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내용도 많다. 아직도 규제가 많은 우리나라라서 인공지능이 각 분야에 도입되는 시기가 늦춰지고 있다는 말에는 동의하는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미 벌어진 인공지능 개발을 없던 것으로는 할 수 없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 중 한 명인 하정우의 말처럼 자꾸 써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써보면서 개선점을 찾아가야 하는가. 그 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나라를 떠나서 인류를 위해서 모두 머리를 모아 이야기해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윤을 넘어서.


이윤을 넘어서지 않으면 인공지능이 재앙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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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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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라고 말했다. (436쪽)


명심해야 할 말이다. 과학 교육을 강조할수록 인성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함을, 아인슈타인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과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적이 좋다는 ('머리가 좋다는'과 '공부를 잘한다는'과는 다른 의미로) 학생들이 주로 의대에 간다. 의학을 공부한다. 그런데 이 의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지성-실력도 필요하지만 인성-사랑이 우선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재능을 ('성적을'이라고 쓰고 싶지만, 성적이 우수한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니까) 쓸 뿐, 그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쓴다고 할 수 없다. 비록 그가 실력 있는 의사라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훌륭한 의사라는 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든 사례 중 두 가지가 의학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얼음송곳으로 머리를 뚫어 뇌절개술을 한 의사. 또 성적 지향은 문화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자신의 뜻대로 아이들의 성을 결정해버린 의사. 과연 그들의 인성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수술이나 치료를 통해서 사람에게 유익함을 제공하겠다는 의지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일으킬 결과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못했다. 또 자신의 재능 (실력)에 도취되어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듣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 지성은 있어도 인성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지성만 믿고 남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결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다. 어디 이런 의사들만이겠는가.


과학-의학 분야에서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남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데... 박물학 분야에서 자신의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 노예 무역을 하는 상인들과 결탁한 사람도 있고, 의학의 발전을 이룬다는 목적으로 시체를 도굴해서 해부한 의사도 있으며, 성병을 치료한다고 사람들을 성병에 감염시킨 의사들도 있다.


이들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목적을 지니고 활동을 했겠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자신들에게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런 점에서 아인슈타인이 말했다는 지성보다는 인성이라는 말이 다가온다. 예전에 읽었던 '유나바머'의 경우도 이 책에 나온다. 그가 하버드 대학 재학 시절에 심리적 실험으로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 꼭 그것이 다는 아니겠지만 그러한 비윤리적인 방식이 사람의 행동을 왜곡할 수 있음도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은 이런 과학-의학 분야에서 일어난 비윤리적인 사건들을 다룬다. 처음 시도할 때는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들의 행위는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는 초래할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성찰은 듣기에서 온다. 다른 사람의 말도 그렇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말들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바로 인성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과학자-의학자에게는 지성보다 인성이 더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러면서 저자는 미래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멈추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현대 과학기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함을, 이 책을 통해서, 이러한 과학사-의학사를 통해서 살펴봐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 책을 맺고 있다.


'기술이 남용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악을 예방할 수는 없지만, 세계에 새로운 힘을 도입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완화시킬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458쪽)


이 말은 과학-의학에 삶을 투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또 그들에게 어떤 자세를 지니라고 해야 하는지를 지금 우리 사회를 살피는 거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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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규모의 의학 - 루돌프 비르효, 자유주의, 공중보건학
이안 F. 맥니리 지음, 신영전 외 옮김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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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의료 대란이다. 누구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겪어본 사람은 안다. 지금 우리나라 의료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음을. 그것도 생명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 소위 골든타임이라고 하는 시간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응급실 뺑뺑이! 이런 말이 통용되는 현실이라니. 이렇게 환자를 거부하는 의료진들이 있다니... 거부가 아니라 할 수 없으니,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과연 그들이 지금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살펴보면 답답한 마음만 든다.


공공의료라는 말은 말로만 존재하나 보다. 의료가 이익과 결부되었을 때 의료의 공공성은 사라진다. 공공의료보다는 민간의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받는다고 단체 행동을 할 때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그들의 선의에 맡겨야만 한다.


상대의 선의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누가 말했던가. 말만 번지르하게 하고 정작 필요한 분야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부작위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때 독일에서 공공의료(사회의료?)에 대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했던 비르효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했다는 이 말.


"의학은 하나의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거대한 규모의 의학과 다르지 않다." (17쪽)


정치가와 의사는, 동일한 사람도, 같은 분야도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적 상처에 대한 정치적 처방을 위해 협력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18쪽)


이 말을 빌리면 의사들을 비난하기 전에 정치가들을 비난해야 한다. 정치가들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그들은 의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의료 대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한마디로 사회적 상처에 대한 정치적 처방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치적 처방을 아예 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그러니 그들이 '거대한 규모의 의학'은커녕 작은 의료 행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의사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의사들이 사회적 책임을 지고 일할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정치의 책임이니, 우선 책임을 정치에 물어야 한다.


계속 비르효의 말을 보자.


의료개혁 운동은 언제나 사상과 이상주의의 하나였으며, 단순히 특수 이익을 위한 정치는 아니었다. (61쪽)


의료개혁은 사상과 이상주의의 하나라는 말. 우리 사회의 의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서 의료 개혁을 시도했으나, 개혁이라는 말이 의대 정원 증원이라는 문제로 국한되어 버린 지금. 아니다. 의사 수가 늘든 줄든 의사들은 우선 사람을 중심에 놓고, 그것도 치료를 받기 힘든 사람을 우선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비르효는 '의사들은 빈자들의 천부적 옹호자이며 사회 문제는 상당 부분 그들의 관할권 내에 있다.' (64쪽)고 하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의학적 개입이 진정한 사회의학의 가장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적용이며, 따라서 의료정치의 버팀대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선 의료 분야의 부적절한 제도로 인해, 전염병과 일반적인 가난이 증가했다고 하면서, 의료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비정상적 상황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9쪽.)고 한다.


이러면서 비르효는 의사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한다. 당시 의사들의 수입은 다른 직종에 비해 많이 낮았다고 하는데, 처우를 개선하면서 그들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상했다.


그렇다면 이미 의사들의 처우가 최상층에 해당하는 우리 사회는 어떤가? 그들의 임금은 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근무 환경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사들은 환자들을 더 잘 돌보기 위해서 자신들의 근무 환경을 좋게 바꾸어 달라고 주장해야 한다. 장시간 근무시간이라면 의사 수를 증원해서 교대 근무를 해야 하고, 시설이 열악하다면 시설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단지 의사 수 증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나라 의료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공공의료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너무도 적은 지금, 공공의료를 확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당시 비르효는 상수도, 하수도 시설에 대해서 이런 주장도 했다. 즉 공공시설은 민간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르효는 시 상수도 시설에 대한 그들의 서투른 관리와 재정을 민간 기업에 넘기려는 열망을 지적하면서, 이 새로운 운하와 연결하도록 하는 권한은 반드시 지역사회 자체에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15쪽.)


여기서 의료는 '공공'에 해당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의료가 공공에 해당한다면 민간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지자체가 담당해야 한다. 민간의료보다는 공공의료를 더욱 확충해야 한다.


공공의료 시설을 개선하고, 근무 여건을 좋게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응급실 뺑뺑이라는 말이 사라질 수 있다.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는 시설, 의사들도 확보해야 한다. 그들의 희생에, 선의에 기대지 말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의료의 공공성이고, 의사뿐만 아니라 환자들도 함께 좋아질 수 있는 길이다. 이러한 논의를 해야 할 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비르효에 관한 이 책을 읽으면서. 물론 지금은 그의 생각이나 또 이 책을 쓴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의료는 정치라는, 정치 역시 의료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가 '거대한 규모의 의학'이라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치가 정신차리게 해야 한다. 예전에 미국에서 나온 말을 비틀자.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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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9-27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치!
돈!

kinye91 2024-09-28 15:48   좋아요 2 | URL
정말 정치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돈! 이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로 풀어야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다. 폭염 일수뿐만이 아니라 열대야 일수에서도 다른 해를 넘어섰다.


  단지 폭염과 열대야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더위였다. 추석이 지났어도 더위는 한풀 꺾이지 않았으니...


  처서부터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모기도 기승을 부릴 때가 지났는데, 여전히 덥고, 모기도 많다. 이제야 조금 수그러들었다.


  기후가 변해도 너무 변했는데, 이러다가는 매해 올해가 가장 시원했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나 하는 두려움도 있다.


더이상 남 일이 아닌, 기후 변화, 기후 재앙이다. 폭염이나 열대야가 심해지면 더욱 고통받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더위,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더위일수도 있다. 이럴 때 이들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


경제? 아니다. 정치다. 정치는 그래서 중요하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닌가.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에서는 가난하다고 해서, 없다고 해서 더위나 추위에 목숨 걱정하는 일은 없다. 아예 그런 환경을 만들지 않는다. 그런 환경을 만들지 않고,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자 실시하는 정치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거꾸로 적용해보면 가난때문에 기후 변화로 인해 목숨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는 공동체라는 기반이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기후 재앙을 해결하는 것도 '정치'이고, 기후 재앙으로 인해 생명에 위협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도 '정치'이며,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는 것도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초고령사회가 되어 노인문제가 불거짐에도 걱정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정치'고, 후쿠시마 오염수를 비롯한 핵발전 문제도 '정치'고 점점 고사되어 가고 있는 농촌 문제를 살리는 것도 '정치'다. 그러니 [녹색평론]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모두 '정치'와 관련이 되어 있다. 


하긴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치'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정치'라고 하면 '민주주의'를 떠올린다. 민주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이는 우리가 동의하고 있는 정치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제대로 작동해야지만 기후, 전쟁, 초고령 사회 등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과연 그런가?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하는가? 지금처럼 '대의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녹색평론]의 답은 '아니다'다.


'대의'는 대신한다는 의미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이 된다는,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의미지, 자신의 권력을 남에게 양도한다는, 그래서 양도받은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여 이번 호에서 다시 '시민의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숙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또는 쉽게 말해서 '추첨'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제도에 대해서 말이다.


일명 '제비뽑기'라고 하는데, 무작위로 뽑힌 사람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다양한 의견을 들은 다음, 서로 토론을 통해 논의를 좁혀가고 의견을 최종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자는 것. 시간이 걸리고, 논쟁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을 하고 집행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기후' 문제에 대해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결정이 나올 수 없고,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전쟁을 찬성하는 결정이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인이나 농촌 문제를 어느 지역, 어느 세대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의견을 정해질 수도 없다.


그러니 '시민의회' 또는 '숙의, 추첨 민주주의'를 도입, 시행해야 한다고 한다. '정치'가 바로 서야 다른 문제들에 바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어떤 정치여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숙의가 필요하겠지... 그런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녹색평론]이고.


이번 호를 읽으면서 농촌, 또 초고령사회라는 문제에 대해서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늘봄 학교'라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저녁 7시 정도까지 머무르게 하는 정책이 실시 중인데, 이것보다는 오히려 부모들이 일찍 퇴근할 수 있게 노동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과 비슷하게, 농산어촌에 폐교들이 많은데, 이 폐교들을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농산어촌에 주로 노인들이 많이 사는데, 폐교를 그냥 방치하지 말고, 여기에 진료소를 마련하고, 또 각종 시설을 만들면, 가령 운동장에는 텃밭, 기술실에는 목공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들, 가사실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재료들, 도서실에는 책을, 또 빈 교실에는 각종 놀이 기구들을 갖추고, 간단한 카페나 음식점을 만들어 여기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고용해 늘 그곳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하면, 언제든 노인이든 아이들이든 청년들이든 학교에 들러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한다면, 노인들이 갇혀 지내는 삶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아이들은 노인들과 함께 지내니 돌봄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청년들도 할 일이 있으니 농산어촌에 머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여기에 간호법이든 의료법이든 바꿔서 간단한 진료 및 처방은 학교 진료소에서 할 수 있게 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의약분업이 되기 전에 가벼운 질환은 약국에서 진단받고 처방을 받았듯이, 학교 진료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한다면 일차 진료는 마을에서 해결할 수 있고, 또 마을 돌봄(노인과 아이들)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대도시 집중을 막고, 농산어촌도 살리고, 초고령사회에서 발생하는 노인 문제, 돌봄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고, 의료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 물론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지만...


농산어촌에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사회-문화-경제 기반 환경도 마련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적어도 폐교가 된 학교를 마을의 생활-문화 중심지로 만들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모아 정책을 마련하는 '정치', 그런 정치를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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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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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즘을 자아 도취로 보지 않고, 자기 이상을 향한 추구로 본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나르시스트가 된다. 자기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므로.


하지만 자기 이상이 무엇일지, 자기 이상의 옳고 그름은 어떻게 판단할지가 문제가 된다. 자기 이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준거가 외부에서 온다면, 그 외부에서 오는 준거는 무엇일까?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한방에 해결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외부에서 오는 준거는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틀은 자신의 내부에서 와야 한다. 자신의 내부에서 온 틀을 가지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 이상은 보편적일까? 사람이 저마다 개성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이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을 보편성이라고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고, 추구하는 이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여 보편성을 제외하고 개별성에 적용되는 특수성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특수성들은 다른 특수성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 특수성들을 인식하게 되면 나라는 존재 외부에 있는 외적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그런 외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이상을 정하게 된다.


어렵다. 나는 나로만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의 이상은 나의 이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이상이기에. 그러므로 나르시스트라고 해도 남을 배제할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볼 수는 없다.


즉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이 자신이 외적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설정한 또다른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상을 실현하기는 쉽지 않다. 하여 나르시즘을 실현하는 사다리로 저자는 '성공과 공동체'를 든다.


'성공'은 자기 이상을 실현했음을 의미하겠지. 그런데 자기 이상이 나만의 것이 아니니까, 이 성공이라는 말에는 남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남이 끼어든다면 이는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의 준거와 남의 준거가 함께 맞물려 있기 때문에...


여기에 공동체를 이야기하면 사람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나르시스트조차도 홀로가 아닌 남과의 관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공동체적 이상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자발적 복종이라고 해도 좋고, 동일시라고 해도 좋겠다.


이러한 공동체 속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이해한다면 나르시즘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가령 우리 사회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 사회에서 주요 화두로 작동하는 가치가 '공정'이다. 공정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으면 공정을 실현하려 한다. 그런데 이 공정에는 남을 배제할 수가 없다. 공정은 나만의 행위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정에는 공동체가, 남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자, 내가 공정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려 하지만 공정이라는 이상은 내가 한 발짝 다가가면 또 반 발짝 멀어진다. 나는 공정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지만, 공정은 거리는 좁혀지지만 닿지는 않게 된다. 


하지만 공정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이 자기 이상이고, 나르시스트는 결코 자신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정을 향한 무한한 내디딤. 하지만 결코 공정에 도달하지 못함. 그러한 공정이라는 가치에 자신을 복종시킨다. 자발적 복종이 된다. 나르시스트는 자발적 복종을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책임을 완수해야 하므로.


우리가 이러한 '공정'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 이상을 삼았지만, 그 이상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외적 모습에 혹해 진실을 살피지 않고 그의 '공정' 실현이 우리의 '공정 실현'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 하지만 한번 틀어진 길, 다시 나아가기가 더 힘들다. 지금이 그런 상황 아닐까.


이 책은 우리 내면의 이상을 '나르시즘'이라는 이름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것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준거라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고 실현하려고 하고 있음을. 또 그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이것이 잘못되면 자발적 복종으로 나아갈 수도 있음을. 그것을 조심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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