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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식인의 길, 육두피아 - 한국의 인텔리겐치아, 육두품에게 대한민국의 길을 묻다
정영훈 지음 / 팬덤북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지식인, 이들을 저자는 육두품이라고 한다.
왕족이 아닌 사람들이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한계.
결국 신분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그 자리에까진 올라가지만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어떤 한계를 지닌 존재, 그것이 육두품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대와 끊임없이 불화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이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 어떤 이는 시대를 변혁하려고 하고, 어떤 이는 시대에 영합하려고 하고, 어떤 이는 시대에서 벗어나려 하기도 한다. 이들을 모두 육두품이라 칭하지만, 저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육두품은 아무래도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육두품인 듯하다. 그리고 육두품들의 세상인 육두피아에서 그가 원하는 육두품들은 이 세 종류의 육두퓸을 모두 말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육두피아란 무엇일까?
처음에 이런 육두품으로 세 명을 불러내고 있다.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이들을 삼최라고 하고, 이들은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온 신라 말기의 지식인. 서로 삶이 달라 최치원은 은둔생활을, 최승우는 견훤의 편에, 최언위는 왕건의 편에 선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을 통해 육두품은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때의 육두품과 21세기의 육두품에 대하여.
여기서 한 가지 정말로 우리는 육두품이 되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육두품이라는 존재는 어떤 목표를 뚜렷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 경제, 사회 분야든 자신의 일이 사회지도층의 일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꼭 상위 몇 %가 되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모두가 육두품이 되는 사회를 육두피아라고 했는데, 이게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육두피아라, 모두가 지식인이 되는 사회라는 건가? 모두가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받는 사회라른 뜻인가? 이 개념에 대한 실질적 내용은 독자가 채워야 할 몫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에는 육두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정몽주, 정도전, 정약용을 불러내어 조금씩 논의를 구체화해나간다. 이들의 논의에서 21세기의 육두품은 '지식과 자본을 많이 가진, 그러면서도 풍부한 정신 세계를 향유하는 자'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지식과 자본을 많이 가진이란 말은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룬 사회, 제도를 구현해야 한다는 말이고, 풍부한 정신세계란 나만이 아닌, 인간만이 아닌, 자연과 우주와 인간을 아우를 수 있는 정신세계를 지닌 인간이란 뜻이리라. 결국 육두피아는 모든 국민이 경제적인 고민이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제도와,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제도가 갖춰진 사회에서 풍부한 영성을 지닌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육두품이라고 다같은 육두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육두피아에 살 육두품은 누구와 같은 더 구체적인 내용은 역시 독자가 채워야 할 몫일밖에.
그 다음에 또 불러내는 세 명은 이익, 신채호, 박은식이다. 이들을 불러내는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의 정통성에 대해,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앞에서 정리한 내용에다 실현의 과정에 대한, 방법에 대한 생각을 덧붙이면 육두피아란 정통성과 정의가 넘치는 사회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머스 모어, 사마천, 정도전을 불러내 육두피아에 대해서 더 자세한 논의를 하려 한다. 이들이 꿈꾸었던 세상과 지금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상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구, 조만식, 조봉암을 불러내 한반도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적어도 육두피아를 꿈꾼다면 남북문제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을 불러내 남북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통일을 위한 노력을 어떤 식으로 해야하는지 이야기 하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통일논의는 현재진행형이기에 우리 자신도 이 저자의 논의에 덧붙여 우리들의 논의를 첨가해야 한다. 그래야만 통일이 남 얘기가 아닌 우리 얘기가 되고, 어느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결실이 된다. 이렇게 되어야지만 충격이 덜 할 테니까.
끝부분은 언뜻 보면 사족같지만...저자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육도사를 불러내 함으로써 이 땅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세 명씩(마지막 장은 빼고) 불러내 이야기를 해서, 어느 한 주장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이들의 논의가 치밀하게 전개되지 못한 관계로 이들의 대화에 숨어있는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즉 많은 것이 나타나 있지 않기에, 대화를 통해서, 또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작가가 꿈꾸는 육두피아가 어떤 것인지, 내가 꿈꾸는 육두피아는 어떤 것인지 덧붙여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는 재미를 찾을 수도 있다. 저자의 주장을 죽 따라가는 것이 아닌, 그건 아닌데, 아냐, 여기에 이런 내용을 더 붙이는 훨씬 좋을 거야 하면서 읽은 맛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즐거움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