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하나 하나의 꿈과 사랑과 추억의 깊이를 만나고 그것들이 내 시의 혼곤한 밑그림이 될 수 있을 때만이 진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무렵의 나는 행복했었다.' (후기에서. 121쪽)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산천... 하나하나 돌면서 그를 시로 표현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덩달아 우리네 삶도 아름다워질 수 있을텐데...
그런데 이제 과연 그런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너무도 많은 아름다움을 사라지게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진흙탕에서도 피어나는 연꽃과 같이 아름다움은 그 어떤 비루함 속에서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찾는 일, 그것이 시인의 일이고, 우리들의 일일지도 모른다.
'사평역에서'에 이어 읽은 곽재구 시집. "참 맑은 물살"
그가 만난 마을들, 그가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가 느낀 점들이 담담하게 아름답게 시에 표현되어 있는데...
사실, 그냥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이 시집을 펼쳤다가, 얼마나 좋은가, 참 맑은 물살, 이미 마음을 씻어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다, 첫 시에서 탁 막혔다. 꽉 막혔다. 도대체, 왜, 이 시가 처음인거야? 왜? 왜?
그냥 제목만 읽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시가, 세상에 그 놈의 작은 제목 때문에... 울컥해버렸는데...
과연 이제 이 아름다움을 여기서 느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다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 팽목... 팽목항...
봄언덕
팽목에서
냉이꽃들이 바람에 하염없이 흩날리네
황톳길 칠십리 하룻길은 아직 멀었는데
눈에 부딪는 산과 강 다 그리워
버리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가네
사랑하는 사람아
냉이꽃밭 위 찢긴 몸 그대로 누워라
조선의 사월의 가장 맑은 바람
이 꽃밭 속에 숨어 사나니
내 그 바람 한 줄기 불러다가
최루가스 짓물린 네 눈물자욱도 닦아주고
엄지손톱 끝 머릿니랑 서캐랑 뚝뚝 눌러주고
곤봉으로 피멍든 첫사랑 이야기도 들어주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해 저물면
마을에 내려가 더운밥 한 그릇도 얻어다 줄게.
곽재구, 참 맑은 물살. 창작과비평사. 1995년. 8쪽.
유족들이 팽목항에 도착하여 세월호 인양을 외치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데...
입춘이 지났는데.. 이제 봄이 와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네 가슴은 차디찬 겨울이니...
작고 여린 냉이꽃들이 함께 모여 아름다움을 과시하듯이, 그 냉이꽃에서 맑은 바람이 나오듯이, 사월의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듯이 그렇게 세상이 아름다워야 하는데...
이제 우리의 사월은 누구의 시 말대로 '잔인한 달'이 되고 말았으니...
이 시와 세월호가 겹쳐지면서, 냉이꽃과 바닷속에서 스러져간 넋들이 겹쳐지면서 마음이 애잔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봄은 온다. 봄이 오게 해야 한다. 팽목에도 봄이 오게 해야 한다. 그래서 정말로 이제는 눈물자욱 닦아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잊어서는 안된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다시 사월이 오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