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는 깊다 1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1
전우용 지음 / 푸른역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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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역사를 뒤로 돌리는 행위는 하나의 희극(코미디)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코미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웃지도 못하고, 분노도 못하고, 황당함에 입을 다물고만 있다.

 

역사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 역사에 무지한 사람, 유교가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역사를 공부해야 했고, 임금들의 필수 학문에도 역사가 있었는데, 이 나라 정치인들은 역사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역사의 바퀴를 뒤로 돌리면서도, 사회를 퇴행시키면서도 그것이 퇴행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학자들... 사회에서 존재가 미미한 사람들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 이제는 '인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때인데... 이런 인문학 중에서도 '역사학'은 더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펼치면 이런 구절이 먼저 나온다.

 

"이런 학문이 어떻게 여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

 

역사학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말라죽어가는 학문인데, 이런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학문이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신기해 하는 다른 학자의 말에 이 책의 저자는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수치화되고 실용화된 학문이 아니면 취급이 되지 않는 사회에서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학문은 이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씁쓸하지만, 이것이 현실임을 어찌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학문이 살아남는다. 그래서 우리 역사는 '깊어진다'

 

이런 '깊은 우리 역사' 알면 우리가 지금을 잘살 수 있다. 아니, 잘살기 위해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의 우리가 그냥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시공간의 축적'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러니 역사를 모르는 사람, 역사에 무지한 사람, 역사를 무시하는 사람은 지금을 제대로 살 수가 없다.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바뀐 교과서를 다시 국정으로 되돌리려는 정치권이 그런 교과서 편찬의 역사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듯이 역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중요한 학문이다.

 

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의 1권은 1월부터 7월까지 중에서 우리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일들을 다뤄주고 있다.

 

바로 첫 장이 '경복궁 잔디밭과 일제의 공간정치'(1월 7일)이고, 마지막 장이 ''위생'의 이름으로사생활에 개입하는 국가, 생체 정보 유출의 위험성'(7월 15일)이다.

 

각 날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겠는데, 이를 60개로 추려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과거의 역사가 현재에도 지속됨을 각 장마다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를 이렇게 기술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고, 역사가 과거에 머문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현재에도 작동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첫장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지금 우리들은 마당있는 집을 꿈꾸고, 그 마당에 파란 잔디를 심기를 꿈꾸지만, 우리나라 전통에서 잔디는 한자어로'사초(莎草)'라고 하고, 이 명칭에서 '사'자는 '죽을 사'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회피했다는 사실.

 

즉, 잔디는 죽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풀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일제가 경복궁을 헐고, 그 자리에 잔디를 심은 것은 조선이 죽었음을 우리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유래는 이런데, 우리는 지금 잔디를 못 심어 안달이니... 역사를 몰각한 모습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1권에 30개의 역사적 장면이 있는데... 하나하나 다 읽을 만하고, 현재하고도 잘 연결이 되어서 역사학은 결코 죽어서는 안될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덧글

 

이 책의 1권은 알라딘 이벤트 이 달의 출판사 응원 댓글에 당첨되어 받았다. 이렇게 좋은 책을 보내준 출판사 '푸른 역사'에 고마움을 표한다. 푸른 역사,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하는 '청사(靑史)'다. 앞으로도 좋은 책을 많이 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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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식탁 - 독성물질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나
마리 모니크 로뱅 지음, 권지현 옮김 / 판미동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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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은 우리가 살기 위해 차리는 밥상이다. 이런 식탁에 무시무시한 수식어가 붙어 제목이 되었다.

 

"죽음의 식탁"

 

그 식탁에 앉으면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그 식탁은 무엇일까? 바로 농약으로 오염된 작물이 올라오는 식탁...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겠지만...

 

사실, 우리가 농약으로 오염된 식탁에 앉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말로 몰라서 앉게 되거나, 아니면 굶주려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농약에 오염되어 있음을 알고도 먹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이 죽음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정부기관에서 최대허용치를 정해놓고, 그 허용치 범위내에 들어있는 화학요소들은 안전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식품의약안전청'쯤 되는 정부 기관이 이 음식은 먹어도 된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먹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그 기준에 따르면 과연 안전한가?

 

이 점을 세밀하게 따져서 추적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결론을 말하면 기준은 기업에서 온다와 그 기준을 따라도 절대로(!) 안전하지 않다이다.

 

그러면 우선 기업은 왜 안전하지 않은 기준을 제시하는가? 그것은 이윤 때문이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에게서 인간의 삶이나 인간의 건강을 목표로 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습다.

 

이런 기업에 근거를 제공해주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기업에서 막대한 연구자금을 받으며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는 연구결과를 만들어낸다.

 

이것보다 더 안 좋은 점은 이 과학자들은 다른 과학자들이 그 기업 제품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면, 반대 결과를 도출하는 연구 결과를 어떻게든 만들어내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업의 임원들이 정계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정부의 규제기관의 책임자나 수장으로 일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작은 제목인 '독성물질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나'에 대한 답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과 그 기업에 봉사하는 과학자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되어 있는 관료들에 의해 우리의 식탁에 오르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결탁이 우리의 식탁을 '죽음의 식탁'으로 만들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일일최대허용량이라는 허구다.

 

일일최대허용량은 하루에 그 이하로 섭취했을 경우에는 인체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를 비판하는 증거들이 이 책에 많이 나와 있다.

 

사람마다 다른데... 그의 기질이나 건강상태, 신체조건, 또 유지해온 식생활 등등이 모두 다른데, 이들을 일괄로 처리해서 일일최대허용량을 정한다는 것도 우습고, 독성이 과연 어느 정도 양이 차야지만 독으로 작용하느냐 하는 문제도 있고.

 

이 책에서 이를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0+0+0=기형 60%다. 전혀 무해하다고 알려진 화학요소들이 여럿이 결합하면 인체에 해로운 결과가 나올 확률이 60%나 된다는 사실... 이를 확장하면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아주 조금씩, 공식기관의 발표대로 일일최대허용치보다 적은 양을 섭취하더라도 인체에는 해로운 확률이 60%이상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야말로 죽음의 식탁이 된다. 이런 죽음의 식탁은 특히 어린이들에게 치명적임을 잘 보여주고 있고.

 

이런 죽음의 식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 농약 사용 금지를 전면화하는 것... 그리고 유기농 제품을 먹어야 하는 것. 각종 화학제품들의 생산을 줄이고, 사용을 하지 않는 것.

 

이렇듯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무서워지는 책이다. 도대체 무얼 먹어야 할지, 아니 먹지 않아도 내 주변에서 내가 만지고 호흡하는 것들 중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 몸에 들어와 나를 서서히 죽여가고 있는 것들이 있음을, 그것도 모자라 다음 세대에까지 죽음을 물려주고 있음을 알게 하니 말이다.

 

이렇게 '죽음의 식탁'에 대해 알게 되면 생활습관을 고쳐야 한다. 자신의 생활습관을 돌아보고 고치고, 또 사회 환경을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적어도 내 건강이므로, 과학자들이 제대로 된 연구를 하고, 자신의 연구결과에 책임을 지는 윤리적 자세를 지니도록 압력을 넣을 수도 있어야 한다.

 

당연히 공적 기관이 규제기관에서는 제대로 규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기업이 단지 이윤만이 아닌, 사람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도록 감시의 눈을 감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쓴 목적이리라. 너무도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이대로 가다간 나뿐만이 아니라 내 후손들까지도 고통에 시달리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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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 차이를 넘어 금지를 깨트린 감각의 목소리와 문화다원주의
양효실 지음 / 시대의창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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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권력은 단일성을 추구한다.

 

통일, 질서, 안정, 단순함, 명료함... 이런 것들은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시행하는데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다.

 

이들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려는 것들에 대해서 권력은 가차없이 응징을 한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권력은 자신에 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용서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이 작용하더라도 어디선가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다른 물결이 몰아쳐 오게 된다. 그런 균열을 내는데 문화만큼 좋은 것은 없다.

 

문화의 기본이 바로 다양성이고, 변화이고, 단순함을 넘어서는 복잡함이며, 해석불가능성, 해석다양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를 어느 하나로 귀착되게 하지 않는다. 하여 문화가 융성한 민족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서로를 용인하는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단일 권력이 횡행할 수는 없게 된다.

 

이 책은 닫힌 사회에 구멍을 내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운동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앞으로의 문화운동이 아니라, 예전에 일어났던 문화운동을 찾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그런 문화운동에 대해 알면, 닫힌 사회에서 그냥 눈 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이 할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굳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아도, 자신을 지키면서도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68혁명부터 시작한다. 서양의 문화운동이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문화운동으로는 홍대 근처 '두리반'에서 있었던 문화운동만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문화운동에 굳이 동서양을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화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맞는 문화운동을 해야만 하고, 지금까지는 서양에서 더 많은 문화운동이 일어났을 뿐이다.

 

이제 우리도 다양한 문화운동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점점 꽉 막힌 사회로 가고 있다는 인식을 하면 할수록 그 막힘을 뚫을 수 있는 문화운동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68혁명에서부터, 힙합, 히피, 흑인차별철폐, 멕시코인들의 정체성 찾기, 에이즈에 대한 운동들, 그리고 여성미술가들에 대한 운동인 게릴라 걸스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우리나라 두리반 문화연대까지 나아가고 있는데...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변화가 필요한 지점에서 문화운동은 일어났다. 변화가 필요하기에 문화운동이 일어났는지, 문화운동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순서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문화운동으로 인해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날로 막혀가고 있는 사회에서는, 틈을 낼 수 있는 문화운동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 어떻게에 대한 답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사회의 문화적 역량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 역시 다양한 문화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를 좀더 열린 사회,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로 만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어떤 문화운동이 사회를 변화시켜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어서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문화운동이 필요할까에 대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덧글

 

소소한 오타. 그러나 정확해야 하는 오타.

49쪽.  1971년 노동자 전태일이 부당한 노동조건에 맞서 분신한 사건은...

전태일의 분신은 197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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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 - 신혜정 시인의 대한민국 원자력발전소 기행
신혜정 지음 / 호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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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이 글에서 따왔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란 책에서 인용한 구절이라고 한다.

 

  "바람이 그쪽으로 안 불어 다행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시내로 키예프로.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벨라루스로 향할지는 아무도몰랐다. 나와 나의 어린 유리크에게로……. 바로 그날 아이들과 숲에 놀러 가서 괭이밥을 뜯었다.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  68쪽

 

이 글을 읽으며 선뜩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몇 년전 2011년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우리나라도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바람이 우리 쪽으로 불지 않는다고.

 

살아오면서 가장 강조해서 배운 것이 지구는 둥글다였는데... 둥글다는 의미는 다들 통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지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면, 바람의 방향이 중요한 것은 아닌데...

 

설령 바람의 방향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 방향이 바뀌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대책도 없이 그냥 손 놓고 있는 상태 아니었던가.

 

그 때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우리나라는 엉뚱하게도 '원자력 르네상스'라고 해서 핵발전소 폭발사고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더 건설하려고만 하지, 다른 대체 에너지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중이다.

 

이게 뭔가? 도대체 왜 그러는가? 왜 우리에게는 무언가 말해주는 사람이 없는가.

 

아니다. 말해주는 사람, 많다. 행동하는 사람, 많다. 단지 언론에서 깊이 있게 다뤄주지 않을 뿐. 정치권에서 무시할 뿐. 원자력 관련 단체에서 연구 비용을 받는 학자들이 그에 유리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뿐.

 

그런데 원자력발전소(정확한 명칭은 핵발전소 또는 핵력 발전소라고 하는데... 워낙 광범위하게 원자력발전소가 알려져 있으니 그걸로 쓴다)의 실상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

 

그러니 시인인 저자가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빌려 책을 내지 않았는가. 시인다운 감수성으로, 과학적 지식이 아닌, 시인이 이해할 수 있는, 따라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원자력 발전은 아니라고...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원자력 발전의 대안은 있는가가 아니라, '탈원전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184쪽)

 

그렇다. 질문에 원자력을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다.

 

이게 시인의 주장이다. 옳은 말이다. 우리는 탈원전의 방법을 찾아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전의 문제점을 알아야 한다.

 

적어도 홍보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홍보는 과장과 허위를 품고 있으므로, 그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 기본을 알고 있어야 한다.

 

기본은 바로 원자력발전이 원자력발전 혼자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원자력발전에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으니, 그것에 대한 이해가 우선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그것들로부터 시작한다.

 

즉, 양수발전소(원자력 발전은 쉴 수가 없기 때문에... 남아도는 원자력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만든 인공 저수지 두 개- 아래의 물을 남아도는 원자력 전기를 이용하여 위로 올리고, 전력이 부족할 때 물을 아래로 내려 전력을 운용하는 수력발전이라고 보면 된다)

 

송전탑(원자력 발전소는 전력을 필요로 하는 곳보다는, 바닷가 근처 한적한 곳에 세워진다. 그곳에서 대도시까지 전력을 보내기 위해서는 고압 송전선이 필요하고, 그런 송전선을 이을 송전탑이 필요하다. 원자력 발전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이 송전탑으로 원자력 발전과 연결이 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

 

그리고 폐기물(어떤 것은 30만년이나 되어야 방사능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지만 겨우 반만년이다. 그런데 그것의 60배나 되는 기간을 보관해야 한다. 과연 안전하게 보관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대로 그것에 신경써야 하는 후손들은 도대체 무슨 죌까?)

 

얼핏 원자력발전과 상관없을 것 같은 이것들이 원자력발전의 필수요소고, 이것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지,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과학적인 서술이 아니라, 시인의 감수성이 살아 있는 서술로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여기에 원자력 발전소가 왜 바닷가에 위치해 있는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인 7번 국도에 왜 몰려 있는지, 서해안은 77번 도로에 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운의 숫자로 생각하는 7에 인간 재앙의 산물인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 있다니, 이것도 참 아이러니다.

 

그런 발전소들을 찾아 주변 사람들을 만나보고, 원자력 발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시인의 감수성이 살아있는, 그래서 더욱 마음에 와닿는 원자력 발전에 관한 책이다.

 

한번 읽어보자. 왜 우리가 원자력 발전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지... 후손들이 왜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했냐고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질문을 바꾸자.

 

"탈원전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자. 그리고 행동하자. 그게 나에게, 후손에게, 자연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될 출발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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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슬람과 중동 문제의 모든 것
서정민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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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라고 한 말이 뭔데?" 하는 생각이 드는 제목이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종교가 이슬람일텐데, 좋은 쪽이 아닌 안 좋은 쪽으로 언급이 되고 있으니,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쓴 책이라는 생각이 제목을 보면 우선 들게 된다.

 

IS라는 이슬람국가라는 테러단체(우리는 테러단체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슬람 국가라고 국가로 선포했다)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이들이 단순한 테러단체였으면 벌써 세력이 약화되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최근에 IS에 관한 책이 여러 권 나온다. 그 책들을 읽어도 IS의 실체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감은 잡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라니, "그렇게"에 궁금중이 확 인다. 책을 읽다보면 "그렇게"라는 말에 대한 답은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적어도 이슬람이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종교는 아니라는 생각은 하게 된다.

 

다만, 여러 정파들이 이슬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저자는 이슬람 국가들 역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었음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그렇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진다. 읽다보니 여러 번 강조되는 말이 있다. 바로 "지하드"에 대한 의미 풀이다.

 

'지하드'를 나는 '성전'이라는 싸움의 의미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지하드를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누고 있고, 큰지하드는 바로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종교가 자신을 철저하게 성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이 '지하드'란 말은 좋은 말이다.

 

작은 지하드는 바로 자신을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다. 즉, 지하드는 공격의 개념이 아니라 방어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에서 언급하는 지하는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도 "저들이 먼저 너희와 싸움을 걸어온다면 살해하라. 이것이 신앙을 억압하는 저들의 대가"라는 구절이 있다. 외부의 침입과 점령으로부터 이슬람의 땅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에 임하라는 것이다. 더불어 성전에 있어서도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민간인을 살상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유린하는 것은 금지된다. 자살 폭탄 테러도 이슬람의 교리에 어긋난다. 이슬람 종교는 자살을 금한다. 창조물 인간의 목숨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창조주 알라일 뿐이다.  276-277쪽

 

이런 말에 따르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추구한다. 무함마드 시대에도 초기 칼리파들의 시대에도 그들은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들을 포용하려는 정책을 폈다고 한다.

 

그런 이슬람이 과격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세계 대전 이후 준비되지 않은 근대국가로의 진입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불안,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는 집단에 의해 이슬람이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이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군사적 개입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이 여유로울 때 군사적 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IS가 세력을 확장하는 곳을 보면 다 정치적 불안으로 인한 생활의 불안정이 심각한 곳이다. 이런 곳에서는 강한 주장이 살아남는다. 지지를 받는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로 인해 자신들의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여 IS의 세력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중동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또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중동 사람들의 생활이 향상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 책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몇 권 읽지 않았지만, 이슬람에 대해 간결하게 잘 정리해 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슬람의 역사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테러단체로 분류했던 조직들을 개관할 수 있는 책이다. 여기에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시각도 바로잡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고.

 

막연히 언론에 비친 이슬람만으로는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에서 적어도 '지하드'에 대한 개념만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해도 이슬람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은 가시지 않을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슬람 이해에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이다. 이슬람에 대해 개관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고마운 일이다. 책을 받는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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