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삶이라는 직업이라니... 우리 삶이 직업인가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직업이 바로 우리들 삶을 지탱해 주니까.


  직업을 일이라고 한다면, 워라벨 (work and life balance 라고 하며 이 단어가 합쳐진 뜻. 일과 삶의 조화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요즘, '삶이라는 직업'이라고 말한 시인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삶이라는 직업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직업이다. 버릴 수 없는 직업. 이 직업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삶을 살지, 또 자신을 갉아먹는 삶을 살지, 반대로 남에게 도움이 되고, 자신의 삶도 윤택해지는 삶을 살지 선택해야 한다.


삶이라는 직업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삶을 선택하고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삶이라는 직업에서 얼마나 많은 소리들을 듣는가?


소리 없이 살기는 힘들다. 하지만 소리가 심하면 더 살기 힘들다. 요즘 층간 소음 문제로 심각한 갈등 에 빠진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는데... 소음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부정의 뜻이 담겨 있으니.


그런데 소음 가운데서도 긍정의 의미를 지닌 소음이 있다. 바로 '백색소음'이다. 이런 백색소음은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하는데...


시인의 이 시집을 읽다가 백색소음을 만났다. 빛의 삼원색은 섞이면 흰색이 된다고 하는데, 많은 소리들이 섞여 백색소음이 되면 그것이 우리들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시를 보자.


세상 모든 원소들의 백색소음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세상을 가져온다


  바나나가 그려진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열어 음악을 들으면 눈밭 위에 앉아 짹짹거리는 작은 새들의 소리처럼 그리운 소음


  소음이 그리운 날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빠져나와 하루 종일 닉 케이브를 듣는다


  닉 케이브라는 소음의 천사를 나는 예전에 알았다


  그가 전직 천사였다는 것을 안다


  너무 아름다운 노래 때문에 타락 천사가 된 그를 나는 인간적으로 듣는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소음 속에서 침묵을 추구한다


  한없이 떠들어야만 더욱더 견고한 고독이 완성되므로 여전히 사랑에 빠져 노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다


  왜 그가 타락 천사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말해준다


  사실 말은 필요 없는 것이다


  세계가 우리의 비극을 감싸 안으므로 우리는 장엄하게 아름다운 비극이다


  여기까지다, 시인이 할 일은 세상 모든 원소들을 백색소음에 데려다주는 일


  그 다음은 이 세계의 일, 모든 소리의 가청 주파수대를 의미하는 백색소음 속에서 시인은 침묵과 고독이라는 물질로 새로운 시의 원소를 만드는 연금술사


  여기까지다, 여기까지가 침묵의 음악이고 그 이후는 침묵을 또 다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순간 누군가 안쓰럽게

  이 시를 읽고 있을 것이다


  타락 천사이었거나

  전직 천사였거나

  아마도

  당신이 음악이었거나


박정대, 삶이라는 직업, 문학과지성사. 2015년 초판 7쇄. 87-89쪽.


그렇게 이 시를 끝까지 읽어내려가다 보면 나도 천사나 음악이 된다.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시 다시 읽자. 천사가 되고 싶다면.


'시인이 할 일은 세상 모든 원소들을 백색소음에 데려다주는 일 // 그 다음은 이 세계의 일, 모든 소리의 가청 주파수대를 의미하는 백색소음 속에서 시인은 침묵과 고독이라는 물질로 새로운 시의 원소를 만드는 연금술사 // 여기까지다, 여기까지가 침묵의 음악이고 그 이후는 침묵을 또 다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시를 우리에게 삶과 일을 합쳐 백색소음을 만든다. 그렇게 시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을 하나로 만든다. 그런 시를 읽는 우리는 백색소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어찌 천사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가끔은, 시를 읽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목이 '천 문'이다. 한자어가 병기되어 있지 않고 그냥 한글로만 되어 있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게 한 것이 시인의 의도라면 이해하겠지만, 차례를 살펴보면 천문(天文)이라고 한자어가 나와 있다. 그것도 같은 제목의 시가 두 편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자를 보고 뜻을 유추할 수 있다. 하늘의 글. 또는 하늘의 무늬라고 하는... 한문에서는 문(文)과 문(紋)을 함께 쓴다고 하니, 글과 무늬는 같다고 봐야 한다.


  맞다. 글은 무늬다. 글은 바로 우리들 마음 무늬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글은 말과 더불어 마음 무늬를 형상화하는 존재다. 그러니 글이나 문이나 함께 할 수밖에 없다.


  하늘의 말이나 하늘의 무늬를 시집 제목으로 삼고 있으면, 시각적인 표현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시각적 표현이라고 해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표현들이 넘쳐 나고 있다.


오죽하면 해설에서 이 시집에 나타나는 표현들을 '그의 문장들이 비롯되는 기저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험의 세계가 아니라 조연호에 의해 창세기가 씌어진, 따라서 달리 말하자면 조연호식 문법에 따라 새로운 통사적 관계를 맺는 어휘들에 의해 새겨지는 세계'(150쪽)라고 하겠는가.


이 정도면 나은데, 이 시집을 관통하는 표현을 해설하는 문학평론가는 '우주가 음사(音寫)된 우리의 세계'라고 하고 있다. (조연호, '아르카디아의 광견' 중 이 시집에서는 94쪽에 나온다)


한 마디로 말하면 참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 조연호 시를 읽을 때는 '마치 문법책 없이 외국어를 배우는 이가 개별 발화들의 경험에 의해서만 어휘의 의미와 대상어의 문법을 정립해가는 것과 같은 수고로운 과정이 조연호 시의 독자에게는 필요하다'(153쪽)고 한다.


시를 읽을 때 시인이 자신의 언어로 재창조한 세계를 우리들의 언어로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어렵다. 시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이런 시들을 읽는 재미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직. 내게는 천문보다는 인문.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무늬를 쉽게 보여주는 시들이 더 와닿으니...


이 시집에 나온 시 가운데 '악마의 정원사'라는 시를 보자. 정원사는 사람이 아니라 한자를 보면 정원의 역사다. 자신들의 언어로 시인의 언어를 다시 그려서 무늬를 만들어 보길...


    악마의 정원사(園史)


그때 악마는 자신의 정원에

경험한 대로의 천상을 만들고

폭설로서의 나무를 심고 있었다


처음으로 열 손가락 모두를 세우고 자기 얼굴을 할퀴며

붉은 과실은

정신의 타액에 물질의 근심을 섞는다


거식에 대한 남다른 재주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재주

훨씬 적게 상대를 걱정하는 편지를 쓰는 재주

그런 재주가 오늘의 허기를 눈송이로 채우고 있었다


운동화와 사다리를 합친 나이쯤

애벌레는 헐거운 객지에 대해 어버이가 될 준비를 하고


그때 악마는 정원의 쐐기풀에 종아리가 부어오르고

자기의 거울이 착한 사람을 비추지 못해 엉엉 울었습니다

하지만 가설이기 때문에 아프진 않아요


그가 자신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 두 개와 싸우던 길 위엔 다만

오랫동안 심지를 올려둔 저녁놀의 온도로

나무가 날아오른다 곧 정육이 될 짐승처럼 따뜻한 콧김을 품으며

저길 봐, 정든 낙엽이 떨어진다


조연호, 천문. 창비. 2010년. 62-63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1-02-20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은 말과 더불어 마음 무늬를 형상화하는 존재다.˝ 와! 마음 무늬를 형상화...오늘의 문장으로 기억하고 갑니다.

어려운 시는 역시나 어렵습니다. 저에겐^^;;

kinye91 2021-02-20 09:42   좋아요 0 | URL
저도 시는 참 어려워요. 특히 이런 시는. 그래도 마음에 들어오는 시들이 있어 위안이 돼요.
 

  올해는 작년과 달리 삶이 보였으면 한다. 물론 삶은 늘 보였겠지만, 작년엔 코로나19로 인해 암담하지 않았던가. 우리들 삶이 전세계를 덮친 감염병으로 가려져 있지 않았던가.


  감염병조차도 평등하게 작동하지 않음을 우리는 한 해 동안 똑똑히 겪어보지 않았던가. 그런 감염병의 시대에 삶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평시에도 삶이 잘 안 보이던 사람들이었음을... 그나마 그들이 볼 수 있던 쪽창도 감염병은 막아버리고 말았음을 온몸으로 겪었던 한 해였다.


  '삶이보이는창 124호'는 겨울호지만 새해 시작을 알리는 호이기도 하다. 그러니 추운 겨울에서 새로운 시작을 보고, 봄을 기대하게 하는 책이기도 한 셈.


  이 책에 실린 글들 역시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희망을 지니기 위해서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하니, 우리 사회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대변하는 잡지라고 해도 되지만, 대변이라는 말보다는 그들과 함께 하는, 또는 그들이 만들어 가는 잡지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래야 '삶이 보이는 창'을 우리들 모두가 지니게 될 테니 말이다.


특히 '삶이 보이는 창'에는 '노동'에 관한 글이 빠지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노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노동없이 살아갈 수 없음에도 노동을 천시하고 있었던 것이 현실 아니던가. 그러니 노동을 강조한다기보다는 노동이 제 자리를 잡도록 해야 한다는 삶창의 글들은 여전히 소중하다.


'노동'에 관한 글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잘 실려 있는데, 이번에 '시인의 눈'에서 다룬 이주노동자들의 시는 우리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을 다루고 있는 방송들을 보게 되면, 그들로 인해서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절에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논조로 방송을 이끌어가면서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노동하러 온 사람들 아닌가.


그 나라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들어 하는 일들을 했던 사람들이 파독 광부, 간호사들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지금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힘든 일들, 남들이 많이 꺼리는 일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기본적인 노동을 그들이 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기본적인 인권,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그러니 그들이 쓴 시집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떤 감정을 지니고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삶이 보이는 창'은 우리에게 삶을 보여준다. 우리들이 가끔은 눈 감아 버리는 삶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도 자신들의 삶이 있음을, 그들도 삶을 볼 수 있게 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함을 여러 글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래, 올해는 모두에게 '삶이 보이는' 그런 한 해였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야콥스키, 나는 마야코프스키로 알고 있던 사람. 러시아 이름이 길기도 하지만, 풀어서 쓰기도 하고 붙여서 쓰기도 하니, 어떤 글을 읽었느냐에 따라 사람 이름이 약간은 달라지기도 한다.


  마야콥스키 하면 러시아 미래파 시인이라는 기억만 남아 있다. 그의 시를 읽은 적도 없고. 우리나라에서 카프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인용이 되기도 했다는 기억은 있는데...


  중고서점에서 그의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제는 소련도 해체되고,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거대한 실험을 하는 나라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고, 그에 따라 사회주의를 주요 내용으로 삼던 문학가들도 문학사에서 하나둘 이름이 지워지기 시작했는데...


  왜 마야콥스키인가? 그냥 단순히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까? 아님,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을까? 사회주의 혁명을 열렬히 찬양했던 시인이 사회주의 국가가 실현되자 자살을 한다? 이런 모순된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하는 호기심.


그러다 이 선집을 읽으며 마야콥스키가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 견딜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선집에 실린 시 중에 그런 생각을 강하게 하는 시들이 있다.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혁명 이후 사회에서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그 시들 제목을 들면 회의광(1922년), 관료주의(1922년), 수뢰자(1926년), 관료주의자의 공장(1926년), 자아비판에 대한 비판(1928년), 아첨꾼(1928년)이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때부터 나타난 현상. 혁명의 배반. 그것은 혁명의 지속, 또는 혁명의 유지라는 이름을 걸고 나타난다. 마야콥스키는 그 점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시를 통해서. 


그는 러시아 혁명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로, 뒤로 복고로 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보았기에 이런 시들을 썼을 것이다.


혁명은 순식간에 전 사회를 뒤집는다. 그런데 뒤집은 다음이 문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냥 과거를 뒤집을 뿐이다. 그러니 혁명을 이룬 사람들은 초조해 진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혁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고, 자칫하면 혁명은 실패하고, 혁명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만이 혁명을 완수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아첨꾼을 낳고, 관료주의를 낳는다. 오로지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려고 하는 회의광들이 생기게 되고, 자아비판이 무슨 만능인 것처럼 판치게 된다. 마야콥스키는 그 점을 보았다. 그래서 시를 통해 이렇게 변해가는 사회가 과거 사회와 어떻게 다른지를 꼬집고 있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는 참 힘들다. 그래서 마야콥스키가 쓴 시는 지금도 유효하다.


혁명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전 정권과 다른 정권이 집권했을 때 그들이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전철을 밟는 모습이 너무도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집권한 정당, 또 사람은 더욱 어려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길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에 나타날 수 잇는 장애들이 무엇인지, 마야콥스키의 시를 통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마야콥스키의 시가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한 시대만을 대표하고, 그 시대로 끝나는 시가 아닌, 우리들 삶에서 반복되기 쉬운 점들을 시로 표현하여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집에 실린 비록 마야콥스키와 실제로 대담한 것은 아니지만, 가상 대담이 실려 있다. 번역한 이가 여러 책을 참조해서 마야콥스키의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마야콥스키의 이름을 빌려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마지막에 나온 말.


그래서 마야콥스키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말...


'나의 유토피아는 숨 막히는 완전 사회에 대한 꿈이 아니며, 독일의 철학자 블로흐가 주장한 것처럼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지향입니다. 여기 번역된 나의 시가 지금의 한국 독자들에게는 '언젠가 그 안에 담겨 있었을 진정성과 절실함은 휘발되어버리고 단지 우스꽝스러운 기표로만 남겨진' 시대착오적인 구호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믿고 있습니다.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시도 문학도 새로운 힘과 사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295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2-04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완전 강렬해요! 따귀 얼얼한 느낌!!ㅎㅎ
 

  컨택트, 언컨택트, 언택트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나 보다. 우리는 직접 만남에서 소리를 통한 만남으로, 그 다음에는 소리가 아닌 문자를 통한 만남, 그것도 아닌 그냥 비대면이라고 하는, 서로가 접촉을 하지도 않고 물건을 통해서만 만나게 된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서 배달음식들도 이제는 용기를 회수해 가지 않는다. 배달하는 사람들도 그 업소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특정 플랫폼에 소속되어 있으니, 어떤 물건을 통해서 우리는 소속감을 느낄 수도 없다.


  그냥 문자로 신청하고, 내게 온 물건을 소비하면 끝이다. 그 물건을 만든 장소가 어디인지, 누가 배달했는지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비대면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없다. 그냥 물건들만 돌아다닐 뿐이다.


함성호 시집에서 '자장면은 전화선을 타고 온다'는 시를 읽고 이 시가 지금 우리 현실을 앞서 경험했다는 생각을 했다. 


자장면은 전화선을 타고 온다


자장면 왔습니다

자장면집 배달원이 자장면을 가지고 왔다

거기 놓으세요

가장 어린 직원이 신문지를 편다

야근을 자장면 먹듯이 하는 때

우리는 둘러앉아 자장면을 먹는다

만 사천 원입니다

덤으로 튀김만두도 가져온 배달원은

빈 철가방을 들고 나갔다

우리는 자장면을 먹으며

자장면집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다

어느 집이나 다쿠앙의 맛은 다 비슷하고

배달 오토바이의 종류도 다 비슷하다


우리는 자장면을 먹으며

비닐 랩이 없던 시절에도 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그 초절 기교의 배달원들을 생각했다

그때도 자장면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장면을 다 먹고 빈 그릇을 복도에 내놓으면

언제 와서 가져가는지 모르는

과연 그 자장면집은 어디인가?

전화를 걸어

"자장면"

하면, 오는

말이 이루어지는


함성호, 너무 아름다운 병.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4쇄. 54-55쪽.


이 시 역시 언택트라고 하는 비대면의 상황을 말해준다. 자장면집이 어디인가? 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 물음은 자장면집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비대면의 시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비대면의 시대와는 다른 점이 이들은 함께 모여 자장면을 먹는다. 지금은 자장면을 시켜도 함께 먹을 수 없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바꿔놓은 풍습이다. 여기에 배달원은 자장면집 소속이 아니다. 그리고 그릇을 이제는 가져가지 않는다. 


더더욱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 어디를 가도 '셀프'라는 이름으로 '키오스크'라고도 하는 기계 앞에서 사람과 만나지 않고 일을 처리하게 된다. 그런 시대가 되었다. 물건들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사용이 되고 나면 이제는 재활용품이 되거나 쓰레기가 된다.


그렇게 시대가 변했다. '말이 이루어지는'이라고 했는데, 이때 말은 그래도 사람의 실체를 어느 정도 담고는 있다. 지금은 말도 아니다. '앱'을 통해 다 해결하게 된다. 


20년 전에 쓰인 이 시를 읽으며 지금 시대를 생각하게 되니, 앞으로는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1-30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30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