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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는 도시에서 더 심하다. 실질적으로 발표되는 온도는 서울이 늘 최고는 아니지만, 도심에서는 온갖 물질문명으로 인해 몸이 느끼는 온도는 엄청나다. 그것도 기분 좋은 더위가 아니라, 몸에 끈끈하게 달라붙는, 기분까지도 끈적거려지는 더위다.

 

이런 도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긴 나도 잘 버티고 있으니 뭐라 말하긴 그렇지만... 도시의 일상을 시로 표현한 시집은 없을까? 왜 없겠는가? 다만 요즘 서점에서 시집 코너가 사라지거나 축소되고 있듯이, 시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살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아서 그런 시집을 찾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일 뿐이지.

 

언젠가 눈에 들어온 한 시 때문에 사게 된 시집이 바로 김기택의 "사무원"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도시의 삶을 이토록 냉철하게 관찰하고 표현하는 시인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단지 도시의 생활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지만,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을 시인은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고 또 이를 시로써 표현해내고 있다. 이 관찰력, 이것은 애정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우선 내 눈에 들어온 한 시.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이 시를 읽으며, "그래, 정말 그래." 했었는데...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날개 없이도 그는 항상 하늘에 떠 있고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나설 때

잠시 땅을 밟을 기회가 있었으나

서너 걸음 밟기도 전에 자가용 문이 열리자

그는 고층에서 떨어진 공처럼 튀어 들어간다.

휠체어에 탄 사람처럼 그는 다리 대신 엉덩이로 다닌다.

발 대신 바퀴가 땅을 밟는다.

그의 몸무게는 고무타이어를 통해 땅으로 전달된다.

몸무게는 빠르게 구르다 먼지처럼 흩어진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가기 전에

잠시 땅을 밟을 시간이 있었으나

서너 걸음 떼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새처럼 날아들어 공중으로 솟구친다.

그는 온종일 현기증도 없이 20층의 하늘에 떠 있다.

전화와 이메일로 쉴새없이 지저귀느라

한순간도 땅에 내려앉을 틈이 없다.

 

김기택. 사무원, 창비.2010 초판 10쇄.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전문

 

원시시대 때 맹수들의 위협을 피해 나무 위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 땐 땅을 밟는다는 행위는 위험에 자신을 내보내는 행위였을텐데... 이후 도구의 사용과 직립 보행으로 땅을 밟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행위가 되었는데... 고도화된 산업사회, 특히 도시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땅을 밟을까? 정말로 우리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지 않을까? 그나마 밟는 땅도 흙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덮여 있는 땅이니...이렇게 도시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 그는 도시인의 삶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이 도시에서의 삶은 인간적인 삶과는 좀 거리가 있다. 따라서 그가 도시의 생활을 시로 표현했을 때는 우리의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암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이미 생활이 아닌 생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이젠 생활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 땅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송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사무원'을 보자.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따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김기택, 사무원. 창비. 2010 초판 10쇄. 사무원 전문

(한자어, 순서대로 손익관리대장경, 자금수지심경, 장좌불립)

 

새보다도 땅을 적게 밟고 산 결과 그는 다리를 여섯개가 가진, 그러나 걷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맡겨야 하는 노동자들의 삶, 우리네 삶을 이토록 아프게 표현해낼 수 있다니... 그래도 이것은 좀 낫다. 뒤에 가면 이런 사무원은 결국 '화석'이 된다. 그 자리에 붙박혀 더이상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화석.

 

그는 언제나 그 책상 그 의자에 붙어 있다.

(중략)

겨울이 지나고 창 안 가득 햇살이 들이치는 봄날,

한 젊은이가 사무실에 나타난다. 구둣소리 힘차다.

그의 옆으로 와 멈추더니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그는 기척이 없다.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붙어 있다.

젊은이가 더 크게 소리치며 굽은 틍을 툭툭 친다.

먼지가 일어나고 등이 조금 부서진다.

젊은이는 세게 그의 몸을 흔들어댄다.

조그만 목이 흔들리다가 먼저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이어 어깨 한쪽이 온통 부서져내린다. 사람들이 몰려온다.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버린 그의 몸을 들어낸다.

재빠르게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하고 새 의자를 갖다놓는다.

 

김기택, 사무원. 창비. 2010년 10쇄. 화석 부분

 

평생을 일해도 그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는 한 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물에 불과하다. 그의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그는 가차없이 버림받는다. 여기에는 피가 흐르는 사람의 모습은 없다. 젊은이는 그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 역시 세월이 흐르면 화석으로 변하고, 곧 치워져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네 도시의 삶은 이렇다.

 

하지만 이런 삶 속에서도 시인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런 희망을 어린이에서 찾는다. 어린이의 존재 자체가 싱그러움이다. 희망이다. 삶의 활력이다.

 

이 어린이들이 자랐을 때 사무원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다. 시인은 그래서 이러한 희망과 희망이 없는 일상이 반복되는 현재를 병치해놓고 있다. 희망 없음 속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신생아 3

 

아기의 맑은 울음소리

시냇물 소리로 듣는다

바람 소리로 듣는다

어두운 귀 열어

그 원시림을 한껏 들이쉬니

사각의 아파트 실내가 문득

깊어지고 울창해진다

 

김기택, 사무원. 창비. 2010년 10쇄. 신생아 3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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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흐리다. 무더위가 조금은 꺾이는 듯하다. 계속해서 시집을 읽고 있는 중.

 

시는 노래다.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시는 이야기다.” 그러면 무슨 소리하느냐고 다시 한 번 쳐다보는 사람은 많다. 그만큼 시는 노래와 가깝고, 이야기라고 하면 시를 통해 대표되는 운문이 아닌, 주저리 주저리 말을 풀어내는 산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는 말 그대로 말을 압축해서 표현하는 갈래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에, 사람들이 “시는 노래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는 이야기다.”하면 갸웃거리게 된다.


그런데도 “시는 이야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들도 시는 노래라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것을 전제로 시에도 이야기가 있다고, 시도 이야기처럼 쓸 수 있다고 할 뿐이다.

그런 시를 우리는 ‘이야기시’라고도 하고 ‘리얼리즘시’라고도 하며, ‘단편서사시’라고도 한다.


아마 이 논쟁이 일제시대 때 임화의 시부터 시작되었을 텐데...

임화 시에 나오는 그 이야기성은, 우리에게 시를 한 편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게 임화의 시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풍습을 우리말로 잘 표현했다고 알려진 백석 시에도 이러한 이야기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시 “여승”은 한 편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런 점을 보아도 시에는 노래의 요소도 이야기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성이 강한 시와 노래 쪽에 가까운 시로 나뉠 수 있을 뿐이다.


난 이야기시의 대표로 최두석의 시집을 꼽는다. 서정춘의 시집 제목이 “죽편”이었다면 최두석의 시집 제목은 “대꽃”이다. 둘 다 대나무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면, 서정춘의 대나무는 개인적이고 서정적이라면, 최두석의 대나무는 역사적이고 현실적이며 집단적이다.


또 서정춘의 짧막한 시들이 ‘노래’ 쪽에 가깝다면, 최두석의 시는 이야기 쪽에 가깝다. 아니, 본인은 이야기시를 쓴다고 직접 이야기한다.


그가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밝힌 다에 의하면 그의 시는 이야기라 해도 좋다.

이 시집에 수록된 상당수의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 내가 실화에 얽매이는 것은 이 질퍽거리며 끈적거리는 흙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최두석, 대꽃, 문학과지성사. 1989년. 3쇄 자서에서


처음 에 나는 아무 생각없이 이 자서를 읽었을 때 실화를 설화로 읽었다. 그만큼 이 시집에는 설화적인 요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자서를 보았더니, 그 조그마한 글씨가 세상에 설화가 아니라 실화다.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고 시인이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설화도 우리들이 있어왔다고 믿거나 우리의 의식을 규정한 이야기로서 어느 정도는 실화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니, 그게 그거라고 생각해도 좋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말은 노래보다는 이야기에 중심을 두고, 우리의 마음보다는 뇌에, 이성(理性)에 호소하겠다는 이야기다.


하여 시집의 첫 시가 바로 노래와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는 시인이 자서에서 한 말을 시로써 보충해주고 있다. 다음부터 나올 시는 그래서 이야기에 중심을 두고 읽으란 얘기로 받아들여도 된다.

노래와 이야기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최두석, 대꽃, 문학과지성사, 1989년 3쇄. 노래와 이야기 전문


우리가 겪어온 험난한 세월을 시인은 노래로써 심장으로써 느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이미 노래로 다스릴 수 있는 상처는 아니기에. 그렇기에 이야기로 상처를 다스리려 한다. 뇌수는 곧 이성의 힘이다. 이성의 힘으로 차분히 분석하고, 힘을 키우고,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개인의 심장만 울리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 시대를 불문하고 퍼져나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는다. 그랬었지. 그랬었어. 그렇군.  그래야겠어 하게 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힘이다.


이 힘이 대나무로 나타난다. 대나무로 의인화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대꽃’이란 연작시다. 이 시집에는 1부터 8까지의 대꽃 시가 있다. 주로 동학 혁명을 다루고 있고, 대꽃의 마지막으로 오면 4.19가 나온다. 우리의 역사, 민중의 힘이 대나무로 등장한다.


대꽃 8

- 대꽃


  이루어진 지 스무 해쯤 되어 보이는 대숲에는 삼십대의 상인도 오십대의 품팔이도 들어가 섰읍니다. 철 모르는 어린이도 섞였읍니다. 대숲이 출렁거리더니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읍니다. 서걱이는 행진의 걸음마다에 외마디 외침이 폭발했읍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귓속으로 파고드는 이 소리는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곧장 달려갔읍니다. 소리가 부딪친 전방 바리케이트에서는 돌연 총포가 난사되었읍니다. 이에 대나무들은 쓰러지며 대꽃을 피웠어요.


한 송이 피면

또 한 송이 거품 뿜으며 피고

이꽃 저꽃 저꽃 이꽃 우르르우르르 무리져 피는

피다가 모두 죽은

대꽃. 


최두석, 대꽃, 문학과지성사, 1989년 3쇄. 대꽃․8 전문

(80년대 후반에 맞춤법이 개정되어 ‘-읍니다’는 모두 ‘-습니다’로 바뀌었다. 그래도 시인이 쓴 표기를 존중하여, ‘읍니다’로 그냥 표기한다. 혹 개정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는 시의 내용이나 시의 표현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기에 아마도 개정판이 나온다면 모두 ‘습니다’로 바꿀 것이라 생각하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 시에 4.19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을. 이 대꽃들이 몇 십년 뒤에는 찬란한 촛불로 다시 피어오르게 됨을... 아직도 진행형임을...


또 이 시집은 고은이 쓴 “만인보”의 전신이라고 할 만큼 시인이 알고 있던 실제 인물들이 시 속에 등장하여 우리네 삶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에 등장한다. 그래서 이 시집은 내용에서도, 소재에서도  리얼리즘시를 구현한 시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내가 갖고 있는 최두석 시인의 시집엔 이상하리만큼 “꽃”이란 낱말이 모두 들어가 있다. 그만큼 시인은 사람이 꽃처럼 피어나는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그 시집들을 이야기하면 이 “대꽃”을 비롯하여, “성에꽃”,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꽃에게 길을 묻는다”다. 안치환의 노래를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세상, 우리가 만나야 할 세상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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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말이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로 반복되었다. 좋은 말도 자꾸 하면 듣기 싫은 소리가 된다는데, 무더위, 무더위 하다 보니, 이젠 무더위 소리만 들어도 땀이 솟는다. 시원한 빗줄기가 그립다.


기우제라도 드려야 하나. 예전 같으면 왕이 기우제를 올렸을 텐데... 자신의 책임으로 통감하고 몸둘 바를 몰랐을 텐데. 기우제로 실제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적어도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려고는 했는데... 누구나 다 아는 말인, 녹조야 더위가 오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걸 다들 알기에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 대책을 세우는 것 아니겠는가.


서정춘의 시집을 읽었다. 마음에 비가 내리게. “죽편”과 “봄, 파르티잔”

워낙 짧고 또 분량도 적어서 이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읽는 일은 다른 시인의 시집 한 권을 읽는 일보다 시간이 적게 걸린다. 단지 물리적인 시간만을 따지면.


그러나 시 한 편 한 편이 만만치 않다. 백 편, 천 편, 만 편의 시보다는 영원히 남을 시 한 편 쓰기를 원하는 시인답게, 시는 짧고 양은 적지만 무게가 상당하다. 책 표지에 나와 있는 말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 되어야지,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써서는 안된다’는 말을 몸으로 실천한 시인이다.


그의 시 중에 이번 무더위와 관련된 시가 있다. 무더위 보다는 가뭄에 관련된 시지만, 지금은 한 줄기 비가 그리운 때이니...


가뭄타령


하늘이 독약같이 멀어 버렸다

어느 무덤을 파고

어느 빈 항아리를 묻어야 비가 오려나

아트홀 호암 콜렉션에 틀어박혀서

목이 마르다 실토를 하듯

금이 쩍쩍 가고 있는

청화백자운용문항아리

이것을 훔쳐서 묻어 주면

비구름을 몰고 청룡은 날고

청화백자난국문항아리

이것을 묻어 주면

물 먹은 산야(山野)에 도로 난초는 푸르고

야국(野菊)은 필까 말까

아즐타, 건곤(乾坤) 삼천리가

푸르 청(靑)이리


서정춘, 죽편, 동학사. 2002년 2판 가뭄타령 전문

(원래 시집에 있는 시에는 한자어가 그냥 쓰였다. 이것을 한글로 바꾸고 괄호 안에 한자로 집어넣었다. 본래는 시인이 쓴 대로 그냥 읽어야 더 맛이 나는데..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더 많아지는 세상이니...)


재미있는 발상 아닌가. 문화재에 새겨진 그림에 기대어 비를 소망하는 모습. 지금은 무엇에 기대어 소망해야 하나... 우리가 초래한 일이 더 많으니 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나라는 이 시의 마지막처럼 푸르 청이다. 푸르 청(靑). 푸르르다. 너무.


이 시집에서 압권은 역시 제목인 죽편이다. 그것도 죽편1. 짧은 시행에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죽편(竹篇) 1

- 여행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 동학사. 2002년 2판 죽편1 전문


대나무와 기차, 외형상 유사성이 있다. 여기서 착상을 했나 보다. 그러나 대꽃이 피는 마을이 어디일까? 시인의 고향? 아니면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 어디든 상관이 없다. 다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을 100년으로 치면 우리는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멀고 먼, 길고 긴 여행을 해야 한다. 이 시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대꽃은 웬만하면 피지 않는데, 그 대꽃이 한 번 피면 대나무는 죽고 만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는데.


다른 시집인 “봄, 파르티잔”도 마찬가지로 짧은 시들이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 이런 기막힌 시가 있나 한 생각이 들게 한 시


우리나라 수평선


우리나라여거울에금간삼팔선이여하늘반물반이여모든쪽빛이여우리나라수평선이여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화시학사. 2001년. 초판. 우리나라 수평선 전문


기가 막히지 않은가! 수평선은 다 똑같은 수평선이어야 하는데, 시인은 우리나라 수평선의 특수성을 찾아내고 있다. 그걸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제목보다도 한참 작은 글씨로 한 줄로 가로 지르는 수평선을. 그 속에 우리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으니... 이 짧은 한 줄에 분단된 우리나라의 모습이 들어가 있으니.


다른 시에서도 시인은 수평선의 이미지를 시에 많이 등장시킨다. 그 때마다 다른 모습의 수평선이 나오는데...‘유리창’이란 시에서도 수평선이 나오고, 아예 제목이 ‘수평선’인 작품도 있다. 또 이 시집에는 도마뱀이 나온다. ‘도마뱀붙이’, ‘도마뱀을 좇아서’, ‘도마뱀을 살려라’,‘도마뱀이 피아노를 치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생각해 볼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서정춘 시인의 사랑에 관한 시 한 편.

아, 우리의 사랑은,

이 놈의 사랑은 정말.


당신


당신, 돌을 던져서 쫓아버릴 수 없고

당신, 칼로 베혀서 쳐버릴 수 없다

차마, 사랑은 물로 된 육체더라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화시학사. 2001년. 초판. 당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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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시원하게... 

땅도 적시고, 나무들도, 풀들도, 그리고 따끈하게 데워져 있는 강물들도, 열로 확확 달궈져 있는 콘크리트, 아스팔트들도 적시고, 무더위에 지쳐 있는 사람들 몸도 마음도 적시게.

 

그런데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파란 하늘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이 무더위 때문에 태풍도 피해간다고 하지 않는가.

 

거기에 강들은 녹색으로 덮이고 있다고 하고... 더위에는 장사 없다. 오뉴월 늘어진 개처럼 우리들도 늘어질 수밖에 없다. 이젠 시원한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마음이 시원해질 수 있는 시가 무엇이 있을까 책장을 훑어본다. 어떤 시를 읽으면 조금이라도 시원해질 수 있을까. 난해한 시는 제외한다. 머리를 써야 하고, 그 시를 갖고 고민해 빠져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덥다. 이럴 땐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시, 그런 시가 오히려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렇다면 별로 망설이지 않는다. 서정홍의 시집이다. 무엇이 있나? 찾아보니 두 권이 있다.

"58년 개띠""내가 가장 착해질 때"

 

사실, 이 더위에 신경질이 많이 늘었다. 그럴 때 '내가 가장 착해질 때'라는 시는 어떨까? 어떨 때 가장 착해질까? 시인은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맞다. 이럴 때 우리는 착해지고, 또 더위로 인한 짜증도 누구러뜨릴 수 있다. 요즘 도시에서는 참 하기 힘든 일이지만.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서정홍,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나라말, 2008. 초판.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전문

 

흙과 더불어 사는 사람, 착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얼마나 흙에서 멀어져 왔는가. 흙에서 멀어져 온 결과가 이렇게 더위를 더욱 더 심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서정홍 시인의 이 두 시집은 각기 다른 생활을 그리고 있다. "58년 개띠"는 좀더 시인이 젊었을 때 낸 시집으로 이 시집의 주요 배경은 공단이다. 노동자의 삶이다. 그는 노동자로 오랫동안 일해왔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들이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반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시인은 자신을 출세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출세는 우리가 말하는 출세와는 다르다. 그의 시집 제목이 되기도 한 '58년 개띠'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 맞바꿀 수 없는 / 노동자가 되어 / 땀 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 한 푼 깎거나 / 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 / 공짜 술 얻어먹거나 / 돈 떼어먹은 일 한 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 노동의 대가 훔친 일 없고 / 바가지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서정홍, 58년 개띠, 보리, 2003 고침판 1쇄. 58년 개띠 5-7연에서

 

말 그대로 세상에 나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고 있는 모습이 시에 나타나 있다. 그런 시인이기에 없는 사람,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반면에 있으면서도 군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체하는 사람들까지도.

 

하여 시인은 시란 어렵게 써서는 안된다고 한다.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 노동을 하는 사람들, 노동자이건 농민이건 어리건 나이 들었건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시 '우리말 사랑1-4'를 보면 이런 시인의 생각이 너무도 잘 나타나 있다.

그래, 그래, 시는 이래야 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는 시인이 농사를 지으면서 농부로 살아가면서 이웃과 함께 어울리고 느꼈던 점들을 그려내고 있다. 노동자 시절에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던 시인이 농민으로 살아가면서, 흙과 같은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더욱 따뜻해지고 있다. 이 따뜻함이 무더위에 시원함으로 다가온다.

 

여기에 두 시집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아내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진정 행복한 가족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바로 우리 이웃이 곁에 있는 것처럼, 때로는 미소를 머금게 하고, 때로는 눈물을 짓게 하는 시들이 넘쳐나고 있다. 어느 한 시 어렵지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 않고... 곁에 두고 언제든지 펼쳐보아도 좋은 시들이다.

 

서정홍 시인이 생각하는 시인으로 마무리 한다.  

 

시인이란

 

시인이란

쉬운 걸

어렵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운 걸

쉽게 쓰는 사람이다.

서정홍,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나라말, 초판, 시인이란 전문

 

 

시인

 

그저 바로처럼

외롭고 눈물 많은

사람입니다.

 

그 눈물로

세상을 적시고 싶은

사람입니다.

서정홍,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나라말, 초판, 시인 전문

 

서정홍 시인의 시가 내 마음을 시원하게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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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덥다, 더워. 이 말도 이제는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같은 말도 자꾸 하면 효력이 떨어지는데...이제는 더위를 몸이 받아들여야 하는지... 더위에 계속 시집을 읽고 있다. 어쩌면 이 여름이 가기 전까지는 계속 읽을 수밖에 없으리라.

 

이 더위에 방학을 생각한다.

만약 방학이 없었다면 학생은 어떻게 지낼까? 나는 학생 때 방학이 없었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내 어릴 때는 여름이 견디기 더 쉬웠다. 젊어서였을까? 여름엔 놀 거리들이 풍부했고, 해는 길었으며 우리는 힘이 넘쳐났다. 더위 쯤이야 땀 한 번 뻘뻘 흘리고, 냇가에 가서 물에 한 번 풍덩 들어갔다 나오면 됐는데... 그래도 방학이 없는 학교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에게 방학이 있는가? 방학 때 더위를 식힐 만한 곳이 있는가? 또 놀 시간이 있는가? 밖에 나가보면 학원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 학원으로 가는 아이들, 그리고 길가에 주욱 늘어서 있는 학원 차량들이 보인다. 이 아이들에겐 방학도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구나. 하여 이 아이들은 방학을 이중으로 받아야 한다. 학교에서 하는 방학과 학원에서 하는 방학.

 

덥다고 공부를 안 할 수야 없지만, 적어도 방학기간 만큼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밖에 능소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능소화가 요즘은 왜이리도 잘 보이는지... 여름이면, 아니 여름이 되기 전부터 여름까지 능소화는 그 주황색의 꽃을 우리게에 보여준다.

 

담장을 넘어서든지, 아니면 가로수 옆을 타고서든지, 예전엔 양반꽃이라고 했다던데... 양반이 국민의 대다수가 되고, 이제는 아예 없어진 사회를 반영하는지, 우리에게 이 능소화는 잘 보인다. 그래 야안과 상민이 어디 있고, 꽃 중에 양반꽃이 어디 있어.

 

길을 걷다가 능소화를 보고 눈이 즐거워지고, 더위를 잠깐 잊기도 한다. 이 더운 여름에 저 꽃들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구나. 나도 버텨야지 하면서.

 

윤재철의 "능소화"란 시집을 펼치다. 반성 시리즈 두 권을 읽었더니... 갑자기 학생들이 생각이 나고, 풍요로움 속의 비루함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집단이 학생들 아니던가. 윤재철 시인이 교사라는 생각과, 예전에 이 시집에서 매우 많은 학교 관련 시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펼쳐보다.

 

그래 방학이란 본래 학교를 놓아버리는 기간인데... 학생들은 학교를 놓아버리되, 학원을 놓아버리지 못했고, 이들은 공부와 비슷하지만 공부는 아닌 공부를 하느라 이토록 고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 

 

시집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도, 생각도, 서정도 담겨 있지만, 학생에 중점을 두고 읽은 이 시는 2부가 압권이다. 우리나라 학교의 모습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래 이게 바로 학교다. 이게 바로 우리 교육현실이다. 

 

획일화, 경쟁, 생각 하지 않음, 통제, 일방적 지시 등등.

 

다양성, 협동, 생각 함, 자율, 토의와 토론을 통한 일처리 등등은 사라지고 없다. 참 암울한 모습이다. 이 암울한 모습 속에서 시인은 그래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제도를 바꾸려고 투쟁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준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하여 오히려 그런 시들 속에서 우리는 교육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반드시 바뀌어야 함을 인식하게 된다. 슬픈 교육현실, 그 현실을 더위 속에서도 피어나 자신의 모습을 알리고 있는 능소화란 제목의 시에 담고 있다. 그래서 슬프다. 덥다. 그렇지만, 꽃은 피어나고, 학생들은 자라난다. 덥다고 나가떨어지지 않고, 물방울 하나 떨어뜨려 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교사 아니던가.

 

이 시에 나타난 학교 현실을 보자. 우선 시험 때 이런 학생이 있다.

'중간 고사 수학 시험지 받자 마자 / 쭉 한번 훑어보더니 / 번호 이름 쓰고 그냥 엎드려 잔다'('지성이' 1-3행) 특별한 아이인가. 아니다. 학교에서 시험 때면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모습이다.

 

여기에 '교문 지도 하는데 / 한 녀석이 반은 사복이고 반은 교복인 채 / 가방도 없이 쓰레빠만 신고 들어오길래'(겁먹은 송아지 1-3행) 이런 학생도 있고,

'공부하는 놈들은 처음부터 젖혀 두고 / 힘자랑 하는 놈들끼리 / 서로 다른 중학교 출신들끼리 / 불알을 늘어뜨리고 눈 부라리며 / 뿔싸움을 한다'(각축 2연)고 학기 초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순위 정하기 싸움이 있으며,

'환호작약 해방/ 더러는 이리 튀고 저리 튀며 / 식용유 붓고 밀가루 뿌리고 / 교복을 찢는다'(졸업식 2연)고 뉴스에도 나왔던 졸업식 모습도 보이고,

'학교에는 1,710개 번호가 산다네 / 컴퓨터도 이름은 모른다네 / 단지 오엠알 카드 까맣게 칠한 / 번호로 1,710명 얼굴을 기억한다네 / 학교에는 번호들이 하루 종일을 모여 산다네'(번호들의 세상 마지막 연)이라고 익명으로,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고 번호로 존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지내는 아이들, 비대화된 학교의 비인간적인 모습 아니던가. 우리는 작은 학교를 추구해야 하는데,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학교을 없애려고 하는 모습은 교육과는 배치되는 모습 아니던가.

 

이 밖에도 학생부에 끌려와 부모님이 빌고 있는 모습과 머리카락을 왜 단속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 매점에서는 살아있는 아이들, 수능 때 몇 십만의 아이들이 똑같은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그 비인간적인 모습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시인은 이것들을 어떻게 고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사실들을 사실적으로 우리에게 교사인 시적 화자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본다는 것이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보여지길 꺼려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일, 이 또한 시인의 일이 아니겠는가. 자,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지는 우리 몫이고, 시인은 이런 학교의 현실을, 생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지금 아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 한 편. 과연 이것이 아이티 강국의 모습일까. 생각해 보자.

 

내공

 

휴대폰을 늘 손에 달고 다니며

틈만 나면 귀신 같은 손놀림으로

자판 눌러대는 아이들을 보면

엠피 쓰리 귀에 꽂고 볼펜 돌려가며

시험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허전하다

 

도무지 혼자 있지 못하는 아이들

아이티 상품이 없으면 젖꼭지 빼앗긴 듯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

수염은 거뭇거뭇 덩치는 코끼리만 한 녀석들이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티 기기 속에 파묻혀

없다

 

옛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 문화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만 안테나 달고

도무지 내공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허전하다

이 문명이 참으로 허전하다

 

윤재철, 능소화, 솔, 2007. 내공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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