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천 문'이다. 한자어가 병기되어 있지 않고 그냥 한글로만 되어 있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게 한 것이 시인의 의도라면 이해하겠지만, 차례를 살펴보면 천문(天文)이라고 한자어가 나와 있다. 그것도 같은 제목의 시가 두 편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자를 보고 뜻을 유추할 수 있다. 하늘의 글. 또는 하늘의 무늬라고 하는... 한문에서는 문(文)과 문(紋)을 함께 쓴다고 하니, 글과 무늬는 같다고 봐야 한다.
맞다. 글은 무늬다. 글은 바로 우리들 마음 무늬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글은 말과 더불어 마음 무늬를 형상화하는 존재다. 그러니 글이나 문이나 함께 할 수밖에 없다.
하늘의 말이나 하늘의 무늬를 시집 제목으로 삼고 있으면, 시각적인 표현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시각적 표현이라고 해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표현들이 넘쳐 나고 있다.
오죽하면 해설에서 이 시집에 나타나는 표현들을 '그의 문장들이 비롯되는 기저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험의 세계가 아니라 조연호에 의해 창세기가 씌어진, 따라서 달리 말하자면 조연호식 문법에 따라 새로운 통사적 관계를 맺는 어휘들에 의해 새겨지는 세계'(150쪽)라고 하겠는가.
이 정도면 나은데, 이 시집을 관통하는 표현을 해설하는 문학평론가는 '우주가 음사(音寫)된 우리의 세계'라고 하고 있다. (조연호, '아르카디아의 광견' 중 이 시집에서는 94쪽에 나온다)
한 마디로 말하면 참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 조연호 시를 읽을 때는 '마치 문법책 없이 외국어를 배우는 이가 개별 발화들의 경험에 의해서만 어휘의 의미와 대상어의 문법을 정립해가는 것과 같은 수고로운 과정이 조연호 시의 독자에게는 필요하다'(153쪽)고 한다.
시를 읽을 때 시인이 자신의 언어로 재창조한 세계를 우리들의 언어로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어렵다. 시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이런 시들을 읽는 재미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직. 내게는 천문보다는 인문.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무늬를 쉽게 보여주는 시들이 더 와닿으니...
이 시집에 나온 시 가운데 '악마의 정원사'라는 시를 보자. 정원사는 사람이 아니라 한자를 보면 정원의 역사다. 자신들의 언어로 시인의 언어를 다시 그려서 무늬를 만들어 보길...
악마의 정원사(庭園史)
그때 악마는 자신의 정원에
경험한 대로의 천상을 만들고
폭설로서의 나무를 심고 있었다
처음으로 열 손가락 모두를 세우고 자기 얼굴을 할퀴며
붉은 과실은
정신의 타액에 물질의 근심을 섞는다
거식에 대한 남다른 재주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재주
훨씬 적게 상대를 걱정하는 편지를 쓰는 재주
그런 재주가 오늘의 허기를 눈송이로 채우고 있었다
운동화와 사다리를 합친 나이쯤
애벌레는 헐거운 객지에 대해 어버이가 될 준비를 하고
그때 악마는 정원의 쐐기풀에 종아리가 부어오르고
자기의 거울이 착한 사람을 비추지 못해 엉엉 울었습니다
하지만 가설이기 때문에 아프진 않아요
그가 자신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 두 개와 싸우던 길 위엔 다만
오랫동안 심지를 올려둔 저녁놀의 온도로
나무가 날아오른다 곧 정육이 될 짐승처럼 따뜻한 콧김을 품으며
저길 봐, 정든 낙엽이 떨어진다
조연호, 천문. 창비. 2010년. 6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