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면 공포에 휩싸이고.

 

세상엔 왜 이리도 끔찍한 일들이 많은지.

 

그런 일들이 하나하나 내 가슴을 파고들어, 내 마음의 파장을 깨고 있다.

 

굳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신문을 보아도 좋은 얘기는 별로 없다.

 

세상의 비리들이, 그것도 모범이 돼야 할 사람들의 비리들이 무슨 감자줄기에 감자 딸려 나오듯 줄줄 나오는데...

 

하야 프로포폴이라는 이상한 약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얘기가 나돌고.

 

삭막한 세상,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어쩌면 제대로 된 눈물을 흘려보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눈물조차도 만들어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눈물이지 않을까.

 

마음 속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을까.

 

그러한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씻어내줄텐데...

 

가식적인 눈물이 아닌, 마음 전부인 눈물.

 

그런 눈물이 그립다.

 

그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세상에 그립다.

 

문정희의 이번 시집에서는 "눈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왜 이리도 눈물이 많은지... 그런데 이 눈물은 가식의 눈물이 아니라 진실의 눈물이다.

 

마음의 눈물이다.

 

그래서 마음에 와 닿는다.

 

시인은 왜 이리도 눈물을 지니고 있었을까...

 

지금 세상, 다시 이런 눈물이 우리의 마음에 넘치는 것은 아닌지.

 

그런 눈물 중에 이 한 시... 길게 여운을 남긴 시...

 

비록 눈물이라는 말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이 시에서 눈물이 보인다.

 

눈물이 느껴진다. 아주 깊고 슬픈 눈물이...

 

아들에게

 

아들아 / 너와 나 사이에는 /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 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 네 뒷모습에 대고 /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 우리 사이에 다만 /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문정희, 찔레, 북인, 2008년. 29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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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전쟁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다.

 

20세기를 극단의 세기라고 했는데, 폭력의 세기라고도 하고, 그래서 21세기는 평화의 세기, 공존의 세기가 되어야 하는데...

 

평화와 공존은 아직도 먼 이야기인가?

 

한 때 남북 정상들이 회담을 하면서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듯하던 남북관계가 경직되기 시작하더나, 이제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전시상황에 준해서 판단하고 행동하겠다느니, 전면전은 가능하면 피하려 하겠지만 도발한다면 가차없이 응징하겠다느니, 서로 위협을 극대화하고 있다.

무섭다.

 

이런 무서운 상황에서도 국민들이 경직되지 않은 것을 보면 한반도에 평화가 많이 정착이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안보 불감증에 있는 것인지, 이러한 일들을 양치기 소년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인지...

 

오히려 이럴 때 평화를 위한 노력을 더 해야 하는데, 미국의 최신 공격 무기가 한반도에 와서 훈련을 한다고 하니... 이것이 평화를 위한 노력이 될지...

 

우연한 계기로 정현종의 시집을 다시 읽게 되었다.

 

정현종 하면 좀 어려운 시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읽었을 때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으니.. 이것이 시대와 맞물려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인지...

 

시인은 시대를 앞서가도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대변한다고 하더니, 정현종 시인도 이러한 위협시대를 대변하는, 그래서 평화와 공존을 역설하는 시를 일찌감치 발표하고 있었다.

 

그 시, 지금 이 때, 정말로 마음에 와 닿는다.

 

위협과 공포가 아니라 평화와 공존. 이것이 필요한 시기.

 

제발 시 좀 읽자.

 

 

                         요격시1

          - 정현종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폭탄에

도요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

굴뚝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포탄에

뻐꾸기를 무기 공장에

비둘기를 무기상들한테

따오기를 발사합니다 정치꾼들한테

왜가리를 발사합니다 군사 모험주의자들한테

뜸부기를 발사합니다 제국주의자들한테

까마귀를 발사합니다 승리 중독자들한테

발사합니다 먹황새 물오리 때까치 가마우지.....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死神들한테

 

 

요격시 2 

  - 정현종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떨어지면서 새가되어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스커드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크게 뉘우쳐 자폭했습니다.

재규어 미사일은 떨어지는 순간 꽃이 되었습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비둘기가 되었습니다.

지이랄 미사일은 바다에 떨어져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도라이 미사일은 사막에 떨어지면서 선인장이 되었습니다.

자기악마 미사일은 어떤 집 창앞에 떨어지면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디스페어 미사일은 어떤 집 부엌으로 굴러들어가 숟가락이 되었습니다.

플레이보이 미사일은 어떤 아가씨 방으로 숨어들어가 에로스가 되었습니다.

머어니 미사일은 어느 가난한 집 안방에 들어가 금이 되었습니다.

우라누스 미사일은 땅에 꽂히는 순간 호미가 되었습니다.

제구덩이 미사일은 저를 만든 공장으로 날아가 그 공장을 날려버렸습니다.

머커리 미사일은 아주 작아져 어떤 아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속삭였습니다.

이걸로 엿이나 바꿔 먹어.

··············

우리는 저 시체들의 폐허 위에서 부르짖습니다.

(UN의 힘을 훨씬 더 강화하면서)

UN은 무기 개발을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증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라!

 

정현종, 한 꽃송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이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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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쿼터스 시대가 온다고 한 지 몇 년이 지나, 우리는 정말로 유비쿼터스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이제는 직장에서도 집 안을 훤히 볼 수 있으며, 집 안에 있는 전자기기들을 직장에서도 조종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하고 통제가 가능한 시대. 이런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었고, 광고들도 이러한 유비쿼터스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방송국과 은행의 컴퓨터가 마비되는 일이 있었다. 주요 방속국의 컴퓨터가 갑자기 정지하고, 부팅이 되지 않는 일과 은행 컴퓨터가 마비된 일.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몇 시간동안 대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해커에 의한, 해킹에 의한 마비라고 하는데, 해커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고, 그래서 북한의 소행이다, 아니 다른 해커의 소행이다 논의만 분분한 상황.

 

세계에서 가장(?) 전산망이 잘 만들어져 있는 나라. 국민들 대다수가 초고속인터넷망을 가지고 인터넷을 하는 나라. 하다못해 휴대전화(핸트폰)로도 인터넷을 하는 나라. 이 나라에서는 컴퓨터라는 편리한 기계가 우리들의 생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은행도, 기업체도, 관공서도, 방송국도, 학교도 모두 컴퓨터가 없으면 마비가 되고 만다. 이쯤되면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 무서운 사실은 컴퓨터로 제어되는 온갖 장치들이 많은 나라에서 이번처럼 해킹으로 인한 컴퓨터 정지가 대규모로 일어난다면, 더욱 주요한 기관의 컴퓨터가 고장난다면? 혹 교육기관의 컴퓨터가 먹통이 되고, 서버의 자료가 날라간다면... 이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직한 재난이 될 것이다.

 

정말 북한의 소행이라면? 이제는 재래식 무기나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한 나라를 마비시키는데는 컴퓨터 해킹 프로그램이면 끝이라는 얘기가 되고.. 이것은 우리나라 안보에도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킹을 방지할 방법만 찾지 궁극적인 해결책은 찾지 않는다. 물론 지금 모든 컴퓨터를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갑자기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컴퓨터에 의존하는 삶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은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해킹 방지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경찰 열 명이 도둑 한 명을 못 막는다"는 속담처럼, 해킹 방지 프로그램이 발전할수록 해킹 기술도 발전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사건이 터진 다음에 치료는 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방어는 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컴퓨터로 인해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어 아무 때나 어느 곳에서나 접속하여 움직일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인 환상이, 반대로 아무 때나 어느 곳에서나 파괴할 수 있는 디스토피아 세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번 사건이 깨우쳐주고 있다.

 

유비쿼터스 시대를 계속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웬델 베리처럼 컴퓨터 없는 세상을 꿈꿀 것인가?

(웬델 베리,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

 

이 극과 극의 삶의 방식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어떤 삶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가? 어떤 삶이 우리의 삶을 더욱 안전하게 하는가?

 

어떤 삶이 우리의 삶을 사람다운 삶으로 만드는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때다. 이번 해킹 사건을 계기로 삶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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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불량식품이 4대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근절하겠다고 한다. 앞의 세 가지는 폭력이 들어가니 당연히 근절되어야 하고, 불량식품은 우리들의 건강을 해치니 역시 근절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량식품하니, 웬지 어릴 적 생각이 난다.

 

학교에서 늘 학교앞 가게에서 과자류들을 사먹지 말라고 했었다. 불량식품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들은 싼 값에, 또 먹을 것이 귀했던 탓에 그것들을 사먹곤 했었는데, 가끔 단속에도 걸리고 했었다.

 

불량식품이라고 하는 것이 그 때 그 수준의 과자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에 다른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국민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에 늘 관리를 해야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런 폭력, 폭력, 폭력과 함께 놓이려면 다른 폭력을 앞에 놓고 척결하겠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있는 자들의 없는 사람에 대한 폭력...(자본의 폭력, 공권력의 폭력 등등). 이걸 4대악에 포함시켜 척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앞의 세 폭력은 전부 힘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 아니던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힘있는 자본들이 힘없는 중소자본을 잠식해서 그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현실을 고쳐야 하지 않나?

 

힘있는 자본가들이 돈 몇 푼에, 사실 그들이 이윤으로 가져가는 그 돈에 비하면 노동자들의 복지에, 또 정규직 전환에 드는 돈은 푼돈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를 쉽게 결정하는 그러한 일을 방지하도록 해야 하지 않나.

 

비정규직 보호법이 오히려 비정규직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상황.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한직으로 밀리거나 해고당하고 있는 현실,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 삶터를 잃고 쫓겨나갔는데, 그곳이 겨우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 그러한 현실을 고치려고 해야 하지 않나.

 

지금 우리 사회는 정말 흉흉하다. 우선 북한의 위협이 뉴스에서 연일 나오고 있으며, 마치 70년대 텔레비전을 보는 듯하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또한 곳곳에서 폭발사고가, 가스 누출사고가 일어나 노동자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며, 산불로 졸지에 집을 잃은 사람들... 몇 년 전 해고되어 아직도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한 문제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

 

이 문제들에 그냥 눈감을 것인가?

 

"삶창"에서는 눈을 감아선 안된다고, 늘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고, 이번 호 특집처럼, 이런 일들이 우리들의 눈에 밟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하나 고쳐가야 한다고, 그런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한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는 '강유위'의 개혁이 왜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는 김경윤의 '동양철학의 이 한마디'라는 꼭지를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지난 번 정권을 심판하는데 이 강유위처럼 행동하지 않았는가. 강유위와 같은 사람에게 우리의 기대를 전부 넘기고, 우리의 행동을 전부 넘기고 우리는 뒤로 빠지지 않았는가 반성해야 한다.

 

반성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반성은 결코 뒤로 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앞으로 가기 위한 잠시 멈춤, 숨고르기, 그리고 나아갈 준비하기. 이것이 바로 반성이다.

 

삶창에서 그런 빛을 본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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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의 말이던가? 아니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라면 그 사회성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회 속에서 제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웃을 좀더 확장하면 다른 마을 사람들, 다른 나라 사람들, 다른 대륙 사람들이 된다. 그들을 사랑하라. 그것이 인류가 살아남을 길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는 그래서 인류의 생존이 달려 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이 말이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증오의 세기"라고도 하고 "극단의 세기"라고도 하는 그런 세기를 우리는 거쳐오지 않았던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증오와 공포와 탄압과 전쟁이 있었던가?

 

그런 파국을 맞지 말자고 유엔이라는 국제기구까지 설립했지만, 인류의 평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여기에 한 나라로 지내다 각 민족들로 분열되어 온갖 갈등을 겪는 나라가 있다. 옛날 유고슬라비아.

 

한 때 이웃으로서 얼굴을 맞대고 미소를 짓던 그들이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던 나날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이 책에는 온갖 학살들이, 온갖 증오들이 나온다. 바로 이웃들에게서.

 

어쩌면 이런 증오는 이웃이기에 더 잘 드러나는지도 모르지만, 이웃이기에 사랑으로 함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이 책의 도처에서 나온다. 그리고 책은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도 그렇게 살래?"

 

아니,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건 과거에 그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회적인 일일 뿐이라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심상치 않다. 언론에서는 연일 전쟁 위험을 언급하고 있다. 전면전이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국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북한에서는 매일 전쟁을 언급하고 있다고...

 

이게 무언가? 남북 정상이 만나 합의를 하기도 했고, 그 무엇보다도 우린 엄청난 비극을 겪었는데, 그것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다른 민족도 아니고 같은 민족인데, 같은 언어를 쓰고, 갈라져 있는 기간보다는 함께 했던 기간이 더 많았던 민족인데, 왜 서로를 돕지 못하고 서로 잡아먹으려 으르렁거리는지...

 

그걸 현명하게 해결할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니, 지도자가 나서지 않으면 국민이 지도자로 하여금 움직이게 해야 한다.

 

우린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우린 이런 극한으로 치닫는 갈등상황을 원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라고. 평화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도자의 역할이라고.

 

그러한 평화를 바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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