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83호, 특집이 공교육에 대한 이야기다.

 

대안교육과 공교육, 그리고 공교육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혁신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늘 이야기가 되고 있고, 유력한 대선 후보들도 교육에 대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 교육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공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번 호에도 나와 있지만 공교육과 대안교육은 같은 층위에서 논의할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혁신교육과 대안교육도 같은 층위에서 논의될 사항은 아니다.

 

즉, 대안교육은 공교육과는 다르게 새로운 교육을 지향하는 것이고, 이는 공교육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해야하니, 공교육의 체제와는 전혀 다른 교육을 하게 된다. 따라서 대안교육은 체제 밖에서 또다른 삶을 추구하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공교육과 혁신교육은 체제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으로 체제 내에서 어떻게 교육을 바꾸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지금 공교육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신교육은 공교육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고, 이런 혁신교육의 방법들을 대안교육에서 배워올 수는 있지만, 혁신교육이 대안교육과는 같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고, 이러한 혁신교육이 공교육에 퍼지면 또다른 혁신교육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대안교육은 공교육 너머에 있어서 공교육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혁신을 고민하게 하는 그런 교육이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공교육과 대안교육은 둘 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지금처럼 공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공(公)교육이 아니라 (空)교육이 되니, 교육을 진정한 공교육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공(空)교육이 공(公)교육이 되는 날, 공(公)교육은 대안교육과 더불어서 공(共)교육이 될 것이다.

 

때마침 대선과도 겹쳐 제대로 된 교육정책을 제시하는 후보가 누구인가도 판단해야 하고,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일도 찾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 사는 길이다. 아이들이 사는 길이다. 그리고 부모들이 사는 길이다. 제대로 된 교육,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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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에 대한 논쟁, 그리고 NLL에 대한 논쟁,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논쟁,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논쟁...

 

정말 이번 대선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네 과거는 이랬다... 어쩔래? 하는 모양.

 

물론 과거를 묻어버릴 수는 없지만, 과거에 매달려서도 안된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미래를 제대로 기획하기 위해서이다. 과거로 끄집어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재는 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배태하고 있다고 한다면, 과거에 대한 철저한 공부는 필수적이다. 과거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을 뿐더러, 과거는 과거일뿐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과거를 과거로 내버려두자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과거에 넌 이랬으니까 앞으로도 이럴 거야, 네 과거는 이랬어, 너는 그런 사람이야 하고 규정짓고 새로움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문제다.

 

우리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지금 이 자리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과거는 과거로, 즉, 역사는 역사로서 철저하게 공부해야 한다. 검증해야 한다.  과거에 대한 공과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냥 두루뭉수리하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런데.. 도대체 역사가 뭐지?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단재의 말도 있고,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란 E.H.카의 말도 있는데...

 

과거가 어떤 실체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이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과거를 알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사실(이게 참 어렵다)에 대해서는 공통의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온 유력한 세 명의 후보들... 기본적인 사실들에 대해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을까? 만약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과거에 대한 공통된 인식과 누가 가장 가까울까 그 점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기본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거의 기사식으로 정리해놓은 책.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난 4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읽었는데... 이 시대에 대한 공통인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선은 가장 문제가 되는 60-70년대에 대해서 기본적인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공통인식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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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군인이 휴전선을 넘어 우리네 초소에까지 와서 노크를 하면서 귀순을 했다고 한다.

 

아직은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북한 군인이 우리네 초소까지 오는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게다가 우리네 군인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이 북한 군인이 초소에와서 노크를 할 때까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했다는 것, 이것은 국방에 심각한 위험이 있다는 신호로 보면 정말 무섭다.

 

확실히 우리는 평화의 시대에 살지 못하고,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북한군과 총부리를 마주 대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인들이 그렇게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전방에서 지내는 군인들이 별다른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얘기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그냥 그렇게 마음 놓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넘어가는데 후방에 있는 우리는 국방이 뚫렸다, 안보태세에 구멍이 생겼다고 호들갑을 떠니, 우리 안에 어떤 공포가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직접 겪고 있는 사람들은 만성이 되어 있고, 후방에 있는 사람들은 공포를 내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그 뉴스를 보고 갑자기 한 편의 영화와 소설이 생각이 났으니, 이건 무슨 오지랖이냐.

 

심각한 문제에 그러한 작품들을 떠올리다니... 사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우리네 마음 깊숙한 곳에는 어떤 "공포"가 자리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지금 평화롭게 지내고 있지만, 이 평화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그것도 바로 저 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 생각이 바로 "공포"이고, 이 "공포"가 어느 순간 튀어나오면 우리는 집단적으로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는 생각.

 

평시에는 가만히 숨어 있다가 한 번 나오면 나도 모르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현재 웃으며 함께 지내지만 언젠가는 나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그럴 땐 나도 나를 지키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영화 한 편,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이 영화의 원작인 박상연이 쓴 "DMZ"

 

소설에서는 바로 이 "공포"가 어떻게 발현이 되는지, 그리고 그 공포를 우리가 마음 깊숙한 곳에 지니고 있기에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는 이런 "공포"의 문제가 빠져 있지만.

 

함께 보고 읽으면 좋은 작품들이다. 지금 이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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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길상사에 다녀오다.

한성대입구 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가 한참을 걷다 보면 길상사가 나온다. 아직은 단풍이 들지 않았지만, 성북동에 자리잡은 안온한 자태를 뽐내는 곳이다.

 

법정 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곳이기도 하고, 시인 백석과 관련이 있기도 한 곳.

 

아니, 시인 백석이라고 하기보다는, 백석을 사랑했던 한 여인과 관련이 된 곳.

 

길상화, 김영한(이름이 김진향이라고도 하고, 자야라고도 한다). 백석을 사랑했던 여인. 그리고 백석을 잊지 못했던 여인.

 

백석이 우리나라에서 한 동안 잊혀진 시인이었기에 그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지 못하다가, 백석이 해금된 이후에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여인.

 

백석의 시 중에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라고 말했던 여인.

(어떤 책에서는 나타샤가 서로 나라고 하는 여인들이 셋이나 된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내 사랑 백석"이란 책에서 자야는 나타샤가 자신임이 분명하다고 한다. 이 책에는 백석과 만난 자야의 이야기가 소상하게 실려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기생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 말로 하면 종합예술인 정도 될텐데, 자신이 번 돈으로 만든 '대원각'이란 음식점(사실 술집이라고 요정이라고 해야 옳을 듯)을 법정 스님에게 맡아달라고 전부 기증을 했다는 여인.

 

그래서 절 이름이 길상화에서 따와 길상사가 되었다는.

 

길상사에 가면 법정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도 있고, 자야와 백석을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백석을 생각할 수 있는 곳, 그곳이 이곳말고 또 어이 있으랴. 백석은 고향이 북쪽이니 말이다.

 

법정 스님과 백석을 모두 생각할 수있었던 곳.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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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 뭐, 뉴스나 신문만 보면 어지러운 기사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야말로 복마전이다. 이건 지옥도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이었어?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건사고야 예전에도 존재했을테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계속 보도를 하니 더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험사회, 울리히 벡의 책 제목이기도 하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교회들이 있고, 절들이 있는 신들이 늘 함께 하는 나라에서 웬사고들이 이리 많담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는 '신과 함께'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절은 '신과 함께'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무교회운동을 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또 무속신앙을 믿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우리나라는 '신과 함께'하는 나라 아니던가.

 

그렇담 신은 무엇하고 있나? 혹시 신이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신이 있다면 이것은 분명 신의 직무유기다. 신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심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하길 바라기 전에 신이 먼저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어쩌면 오래 전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래 신은 인간세상에서 추방당했을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신이 인간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왔다가도 인간에 의해 다시 추방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흔히 부모들에게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자식을 싸질러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신이 추방당한 사회라고 하면 이는 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얘기다. 그 많은 교회와 성당과 절들이 있는데, 점집도 있는데...

 

어떤 신이든, 신을 다시 불러올 필요가 있다. 아니, 신의 존재를 제대로 믿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가끔 저승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악해지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웹툰에서 시작하여 단행본으로 나온 책이 있다. 바로 주호민의 "신과 함께"

 

"티벳사자의 서"를 읽기 힘든 사람, 이 만화를 보면 좋겠다. 아니 우리 아이들이, 어른들이 다 보았으면 좋겠다. 저승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동이 조금은 변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 신이 어떤 신이든, 자신이 믿는 신에 대입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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