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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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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모두 수용소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가 인간이 지닌 권리 중에 하나이고,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가 생각하면 꼭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다.

 

지구라는 거대한 틀 속에 갇혀 있거나, 죽음이라는 결론을 향해 달려간다거나 하는 것, 결국 우리의 자유는 한계지워진 자유일 수밖에 없다.

 

자유인으로 산다고 하지만,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떤 틀 속에서의 자유고, 자유의지다.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그 틀을 인식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틀을 강하게 의식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사회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어떤 사회는 제약이 심해 틀을 심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고, 어떤 시대는 이런 틀을 강하게 유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유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는다. 자유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삶, 그것은 노예의 삶이다. 비록 자유라는 것이 명백한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한계 속에서도 자유는 우리에게 소중하다. 이러한 자유를 잠시 구속하는 경우, 이것이 바로 수용소의 삶이다. 요즘은 교도소라고 하나...

 

장소의 제약, 행동의 제약을 심하게 받는 곳, 그곳이 바로 수용소이다. 이런 수용소에서는 자유는 심하게 침해받는다. 그런 곳에서의 삶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수용소에서도 최소한 자유는 있다. 일탈이 있다.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주어진 대로만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사회를 거대한 수용소라고 보아도,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조건이 똑같아도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입력과 출력이 일치하는 기계와 다른 점이다.

 

솔제니친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쓴 이유가 당시 소련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든, 아니면 우리의 삶이 이러한 수용소에 갇힌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썼든, 자유를 제약당한 삶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소설은 10년형을 언도받고,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힌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를 이 소설에서는 이 이름으로 부른다. 물론 다른 수용소 인물들은 슈호프라는 이름이 아니라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의 하루를 서술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동안에 수용소에서 겪은 일들, 그것이 새로운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라는 점을 소설의 끝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 수용소의 하루하루를 멀리서 보면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다. 그러나 그 하루하루 동안에는 너무도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세상에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똑같은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비슷한 행위들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멀러서 보면 똑같은 일들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텐데, 그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에게는 다 다른 일들이다.

 

결국 슈호프가 수용소라는 작은 공간에 갇혀 있다고 하면, 우리들 대다수는 지구라는 좀더 큰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슈호프는 10년이라는 세월을 갇혀 있었지만, 우리는 길게는 100년 정도를 갇혀 지내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를 잃은 삶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유를 찾아 생활하는 슈호프의 모습,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는 슈호프의 모습을 확대한다면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될 테고, 이를 더 확대한다면 지구라는 틀에 갇혀 사는 우리들의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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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5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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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5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장편동화 재미있다! 세계명작 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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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삐삐' 시리즈로 알게 된 작가다. 말괄량이 삐삐, 얼마나 우리의 동심을 자극했던지. 드라마로 보면서 삐삐의 행동에서 통쾌함을 느끼면서 어린 시절의 환상을 키워갈 수 있었다고나 할까. 보통 사람과는 다른, 독립해서 살아가는 그런 삐삐의 모습에서 말이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어린 시절에 읽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것이 1983년이라고 하니, 꽤 오래된 책임에도 말광량이 삐삐만큼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소년이 온다"의 작가 한강이 노르웨이에서 한 강연의 원고를 읽으며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한강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소설. 어쩌면 이 소설에 나오는 형제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소년은 통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

 

읽게 되자마자 한 순간에 책의 끝부분에 도달했다. 세상에 이승에서 저승에 해당하는 낭기열라까지 가는데 순식간에 가듯이, 또 낭기열라에서 또다른 세상인 낭길리마로 가는데 순식간이듯이, 소설 역시 순식간에 읽힌다.

 

그만큼 흥미진진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독재권력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자꾸 떠올리게 하고, 벚나무 골짜기 사람들과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이 함께 교류하며 잘 살다가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을 억압하는 텡일이라는 독재자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자꾸만 우리나라가 겹치게 되기도 한다.

 

자유를 다시 찾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 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거는 일, 두려운 일이다. 주인공인 동생 칼은 이런 두려움을 느낀다. 아니, 형인 요나탄도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두려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들은 나서야 했다. 특히 요나탄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맨 앞으로 나서야 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으므로.

 

동생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너무도 어린 나이 아닌가. 죽음을 앞에 두고 자유를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것에는. 그럼에도 요나탄이나 칼은 이런 생각으로 싸움에 나서게 된다. 아니 자신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인데, 만일 그걸 하지 않으면 쓰레기처럼 하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230쪽)

 

그렇다. 사자왕 형제는 이런 생각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 이들은 하잘것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소년이 온다"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죽음 앞으로 다가간 사람들이 나온다. 주인공 소년인 동호 역시 마찬가지다. 왜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수가 없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영화 "화려한 휴가"를 다시 봤다. 도청에서 나갔다가 진압 전날 밤, 다시 도청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죽을 줄 알면서도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사람들. 남아야 했던 사람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고 절규하는 주인공.

 

그렇다, 이들이 남을 수밖에 없었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 폭도가 아니라고 절규하는 것,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죽어가는 것, 이들의 선택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용기다.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것.

 

이 소설의 주인공인 형제는 바로 이런 사람다움을 잃지 않으려 한다. 사람다움의 기본은 무엇인가. 바로 자유 아니던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 그 자유를 독재자가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해 침해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고 다시 되찾는 것. 되찾은 다음, 자신이 영웅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 아니던가.

 

사자왕 형제는 그래서 '낭기열라'에 남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낭길리마'다. 형제는 그곳에서 평온한 삶을,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그곳에는 독재자는 없으니까.

 

이 소설의 묘미는 우선 재미다. 재미있게 아이들이 읽을 수 있다. 읽으면서 두려움을 이겨나가는 칼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겪게 될 일을 미리 경험할 수 있다. 두려움 앞에서 누구나 떨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을 인정하고 앞으로 한 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용기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으면 앞으로 겪게 될 일에 해보지도 않고 미리 주저앉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이 용기인지 알 수 있게 되니까.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렵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그래야 쓰레기같은 하잘것없는 삶을 살지 않게 될 테니까.

 

한강 덕분에 좋은 작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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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 너무 멀리 나간 교실 실험
토드 스트라써 지음, 김재희 옮김 / 서연비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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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간에 나치의 만행에 대한 영상을 보여준다. 학생들이 질문한다. 왜? 도대체 왜? 그런데 역사 선생은 대답할 수 없다. 대다수의 독일 사람들이 어째서 나치에 동조했는지, 그 이유를 본인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역사 선생은 실험을 하기로 한다. 일사분란. 나치의 모습을 수업에 재현하는 것이다. 처음에 아이들은 장난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더 확산이 되어 이제는 "파도"라는 조직이 된다.

 

"파도"에 가입한 아이와 가입하지 않은 아이가 극명하게 갈린다. "파도"는 조직의 이름으로 개인들을 통제한다. 개인의 자유는 없다. 오로지 공동체란 이름으로 활동할 뿐이다.

 

이쯤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학생이 나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란 100%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인간, 그런 성찰하는 인간이 꼭 있다. 아니, 꼭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찰하는 인간, 의문을 제기하는 인간은 공동체에서 배척당한다. 그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왜냐, 공동체의 결속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파도"에 대해 비판적인 학생들에게 위협을 하기 시작한다. "파도"에 가입하지 않은 학생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위화감과 두려움. 공동체에서 밀려날 것 같은 두려움.

 

자연스레 "파도"는 학교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 된다. 집단 최면에 빠진다. 이때 수업을 시작한 교사는 끝을 내려 한다. "파도"의 지도자가 나타난다고 한다. 학생들이 기대하고 있는 그 순간. 그 지도자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

 

세상에! 자신들이 수업시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지 과거에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현대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것.

 

자신들 역시 그런 광기 속에서 생각없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성찰하지 못하고 조직의 흐름에 그냥 휩쓸려 가고 말았다는 것, 깨달음은 한 순간에 왔다. 하지만 과연 그 깨달음이 성찰의 결과였떤가?

 

아니다.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교사에게서 주어진 또다른 해답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결과 학생들에게 성찰의 힘을 보여주었지만,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준 사람은 역시 교사다.

 

소설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애초에 벤 로스가 시작한 건 역사 수업을 듣는 하나의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소한 실험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실험을 통해 벤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믿음을 남의 손에 내맡기는지를 확인했다. 그것은 분명 몹시 시리고 아픈 경험이었지만, 그러하기에 벤 로스는 교사로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의 본성에 그처럼 허약한 면이 있다면, 이른바 자기 성찰의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자 임무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만약 교사들이 그 일을 방기하면 언제라도 같은 비극이 반복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249-250쪽)

 

벤 로스 선생은 실험을 끝냈다. 그것은 실험을 끝냈을 뿐이다. 교육은 그리고 배움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면서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쉽게 속에서 개인을 말살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지혜의 차원이다. 온몸으로 배우고 익힌 것이다. 이런 학생들은 이제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개인에 대한 침해에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지니게 된다. 적어도 한 번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성찰하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벤 로스 선생이 목적한 바일 것이다. 이게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성찰하는 힘, 이것이 결국 교육의 목표 아니던가. 지식은 이런 성찰을 하게 하기 위한 기반에 불과하지 않나. 따라서 학교는 지식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지식을 기반으로 생각을 하게 하기 위한 곳이다.

 

인용한 말에 교육의 본질, 교사의 자세가 담겨 있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무리 교육적 의도가 좋아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고려해 보아야 한다.

 

벤 로스 선생은 말한다.

 

"전적으로 제 실수였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역사 수업은 과학 실험과는 다르다는 걸 깊이 깨달았습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특히 실험의 일부가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시작한 건 더 큰 잘못입니다." (227쪽)

 

그렇다. 소설 속에서 벤 로스 선생은 이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학생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해서 그들의 마음을 치유해야 했을 것이다.

 

"푸른 눈, 갈색 눈"이라는 차별에 대한 수업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에게 차별이 얼마나 쉽고 간단하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인지시켜주기는 했지만, 이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 로스 선생의 실험은 실제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라고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 경험을 통해 깨우치게 한다고 하지만 경험을 할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될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찰의 중요성을 알까? 바로 이런 소설을 통해서다. 소설을 읽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집단이라는 이름에 넘어가는지, 집단 속에 숨어서 다른 개인을 공격할 수 있는지,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명해진 말, '악의 평범성'을 이런 소설을 통해서 인식하고, '성찰의 힘'을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왜 올해에야 번역되었는지... 독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소설이 학교에서 수업 교재로 쓰이고 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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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0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0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7-07-1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66872, 저 비댓이 이걸지도 모르겠네요-_-;;;
2006년 번역되어 나온 책을 제가 읽었거든요^^

린(隣) 2020-03-2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2006년에 번역된 책입니다.
 
바다로 간 별들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박일환 지음 / 우리학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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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소설은 내가 살지 않은 삶을 등장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실제 삶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라도 소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소설은 나로 하여금 다른 인생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며, 다른 인생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소설을 읽게 만든다. 비록 마음을 힘들게 할지라도 소설을 통해서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으니까.

 

세월.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약인 '망각'이 작동해서 고통도 약해지고, 슬픔도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세월은 우리를 치유로 이끈다. 이마저도 없다면 우리 인간은 슬픔의 바다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죽게 되고 말리라. 

 

이처럼 세월이 우리를 치유로 이끄는데, '세월호'는 여전히 우리를 슬픔으로 이끈다. 지속적인 슬픔. 아직도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전히 미수습자로 남은 사람들이 있기에... 비록 3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세월호는 망각이라는 약이 통하지 않는다. 

 

아니, 통해서는 안 된다. 세월호에는 망각이라는 약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약이 통해야 한다. 그 약을 우리는 평생 간직해야 한다. 그 약은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 고통을 주겠지만, 오히려 그 약이 바로 세월호의 슬픔을 이겨내는 힘이다. '망각이 아닌 기억'

 

하여 세월호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만났다. 그럼에도 읽기에 망설여진다. 쉽게 책장을 펼치지 못한다. 여러 번 마음을 추스린다. 다잡는다. 읽어야 할까, 말까... 공연히 읽어서 눈시울을 자극할 필요가 있을까, 분명 읽으면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떨글텐데... 아직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가.

 

제목에서 슬픔이 뚝뚝 묻어난다. 별들이 하늘로 가지 않고 바다로 갔으니, 그래서 읽어야 한단 생각을 한다. 별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바다로 간 별들"이라고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던 별이 바다로 떨어진 것이라고, 그렇게 주인공은 민지는 생각한다.

 

너희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 게 아니라 거꾸로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너희를 삼킨 바다 위로 말이야. 한꺼번에 바다로 간 별들, 그게 바로 너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지난 4월의 바다는 슬픈 바다, 통곡의 바다가 되었던 거고. 그렇다면 하늘의 별을 보며 너희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바다로 가 버린 너희의 영혼을 먼저 건져 올려야 하는 게 순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209-210쪽) 

 

읽기로 마음을 정한다. 바다로 간 별들의 영혼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슬픔을 외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눈물 방울이 더 떨어져 눈물의 힘으로 건져 올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눈물을 흘려도 좋으리란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때로는 이들의 좋았던 추억에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하고, 이들에게서 웃음을 빼앗아간 그 사건에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며, 살아남은 친구들의 슬픔에 공감을 하기 한다.

 

그렇게 소설은 주인공 민지를 중심으로 중학교 때 만났던 아이들이 등장한다. 친했던 친구 수경, 민지를 좋아했던 남학생 민석, 민지와 직접 관계를 맺지 못하지만 같은 반이었던 경호. 그리고 '오죽하면'이라는 팀이름으로 함께 춤을 추던 친구들.

 

이 중에 단원고로 진학한 수경, 민석에 대한 이야기를 민지를 중심으로 펼쳐가고 있다. 단원고 학생이 아니었음에 살아남아 친구를 잃어야 했던 민지, 그 민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친구들. 이런 민지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민지가 겪었던 일들을 함께 겪게 된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기억하게 된다.

 

어른의 관점이 아닌 친구의 관점에서 세월호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겨나가는 모습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그래서 더 생생하다. 바로 이들의 이야기이고, 이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민지를 통해 '세월호'를 겪어가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을 극복해가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하여 슬픔을 통해 슬픔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민지는 잊지 않기로 한다. 기억을 해야 한다. 슬픔 역시 외면하지 않는다. 슬픔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슬픔을 자신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이들에 대한 기억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래야만 세월호는 잊히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다.

 

그러나 아무리 슬픔을 이기려 해도 소설 속 슬픔이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거부해서도 안 된다.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자. 그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자. 그렇게 마음 먹고 소설을 읽는다.

 

작가 역시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이 소설을 너무 슬픔으로만 읽어 내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슬픔을 넘어 그들이 미처 펼치지 못한 꿈들을 받아안고, 그들을 대신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223-2224쪽)

 

세월호에 관련된 소설... 그렇다. 소설을 슬픔으로만 읽지는 않는다. 슬픔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바꾼다. 슬픔을 '기억'으로 바꾼다. '기억'을 '행동'으로 바꾼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기에...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고, 책임자가 응당한 처벌을 받고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우리가 '기억'할 수 있게 '행동'해야 함을, 소설을 통해 온몸으로 느낀다.

 

소설의 끝부분, 민지의 생각으로 마무리한다.

 

잊지 않을 거야. 내 친구들을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간 모든 것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눈물이 나지만 참을 거야.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도 그건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눈물이 될 거야. 속으로 뇌고 또 뇌었다. 울컥, 하는 날들이 오래도록 이어지겠지만 그런 순간들조차 슬픔을 넘어서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 줄 거였다. (218쪽)

 

이 소설, 그런 디딤돌이 될 것이다. '바다로 간 별들'이 이제는 하늘에서 영롱히 빛날 수 있게, 그들의 영혼이 하늘로 갈 수 있게, 우리가 기억하고 행동하게 하는 디딤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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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5
윤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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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의 [작가의 객석]을 읽다가 윤중호를 발견했다. 발견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나는 그를 수필가나 또는 기자로서 문학판의 주변을 관찰하고 글로 써서 남기는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책에서 윤중호가 시인이라는 사실, 그 시가 왜 가슴을 울렸는지, 무언가 슬픔이 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그런 시를 만났다.

 

그럼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소개로 윤중호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윤중호의 글을 통해서 만나야 한다. 시인이니 그의 시를 읽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인을 만나는 태도다. 어떤 시를 만나는가는 독자의 마음이니, 나는 그의 유고시집을 골랐다.

 

제목도 '고향 길'이다. 고향, 그리움을 자아내는 말. 그러나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들이지 않은가. 이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없다. 고향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현대인들은 뿌리뽑힌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고향 길'이라는 시가 마음에 와 닿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물리적인 고향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는 모두 마음의 고향이 있다. 그런 고향에 대한 정서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도 좋고,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와야만 하는 미래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도 좋다.

 

하여 '고향 길'이라는 제목은 아득함과 아늑함을 동시에 주고 있다. 시집을 읽으면 시 한 편 한 편이 마음을 파고든다. 시집 뒷부분에 있는 김종철이 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시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어려운 낱말이 하나도 쓰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충청도 사투리가 여과없이 드러나 있는 시가 있음에도 시들이 모두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그냥 그렇게 아득한 과거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아늑함이라니.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시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듯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시.' ('영목에서' 부분. 10쪽)

 

이게 젊었을 때 우리 모습 아닌가. 과거를 치열하게 부정하며 오직 현재와 미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젊은시절. 산업화로 과거를 모두 밀어버리던 우리나라 현대사의 모습. 그러나 이런 시는 없다. 이런 삶은 없다.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것, 티나지 않은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우리 삶은 그렇게 무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어 왔고, 무언가를 이루지 않고 물 흐르듯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영목에서' 부분. 10쪽)

 

'아무 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영목에서' 부분. 11쪽)

 

이게 바로 이 시의 핵심이다. 무언가를 억지로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흔적을 억지로 남기려 하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그 삶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자연스러움은 산업화된 현재가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사람들끼리 함께 살던 공동체가 살아 있던 과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니다. 단지 과거가 아니다. 이 과거는 바로 미래다. 오래된 미래. 윤중호는 나이를 먹어서야 이 오래된 미래를 보았다. 우리게에 보여줬다. 이 시집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아무 것도 이룬 바 없는 사람, 이것은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얘기다. 자연스럽게 살아왔다는 이야기. 그런 사람의 삶은 자연과 사람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다. 시인은 완두콩에서 바로 생명의 원초적인 모습을 본다.

 

  완두콩

 

콩깍지 속에

새파랗게 빛나는 완두콩 여섯 개

곰실곰실 누워 있다가

콩깍지를 터니, 부시시 깨어나

서로 몸을 기대며 웅크립니다.

무심코 콩깍지를 훑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완두콩마다, 콩깍지에

허연 탯줄을 달고 있었거든요.

 

윤중호, 고향 길, 문학과지성사. 2005년. 초판 2쇄. 65쪽.

 

이토록 아름다운 시라니. 완두콩에서 발견하는 공동체, 또한 생명의 모습. 어떻게 감히 생명을 하찮게 여길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시인이 함부로 무엇을 이루려고 할 수 있을까.

 

자연스레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 그것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나. 단 몇 분도 흙을 밟지 못하는 삶, 하늘을 올려다 볼 시간을 거의 갖지 않는 삶.

 

주변 사람을 돌아보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는 삶.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들은 모두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판단하는 그런 세상. 그런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시인의 이 시집은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이 지니고 있어야 할 탯줄은 무엇인가. 우리는 탯줄을 아무 생각 없이 잘라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고향 길... 단지 떠나온 곳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는 얼굴들 모두 신작로 따라 대처로 떠나고, / 이제 내가 아는 얼굴 되어, 신작로 끝 / 빈집, 불 밝혀야 하나.'('고향 길 2' 부분. 23쪽)라고 하고 있다.

 

시인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이제는 고향 길에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빈집, 불 밝혀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윤중호, 그는 뜻하지 않게 갔지만, 그의 시는 남아서 이렇게 우리에게 불을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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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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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0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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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0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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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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