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1873년 브뤼셀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프랑스어 원본 수록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이한이 옮김 / 그여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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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다. 랭보 시집인데 초판본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여기에 프랑스어 원본까지 실려 있으니 랭보 시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시집이다.

 

그러나 랭보 시집이라고 해서, 많이 유명하다고 해서 마음에 쏙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이 시집 역시 랭보가 젊었던 시절에 쓴 시집인데, 그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의 시집은 대부분 젊은 시절의 격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들이 실려 있다고 보면 되듯이, 직설적인 감정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젊은 시절 삶은 희망으로 충만해 있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으로 꽉 차 있기도 한다. 바로 랭보가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시집에 나오는 절망들, 지옥이라는 말들이 젊은 날 랭보가 얼마나 고뇌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 시를 번역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지만, 사실 시는 번역불가능하고, 오히려 시 번역은 새로운 창작이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만큼 시가 세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바꾼 것인데,그것을 또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은 창작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두 번의 창작과정을 거친 시를 읽으면서 이해하기는, 또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참 어렵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시다.

 

무언가 감정과 욕망이 흘러넘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내가 랭보의 시에서 알고 있던 모음에 색깔을 덧씌운 시가 바로 이 시집에 있었다는 것.

 

'망상2 - 언어의 연금술'에 이 시가 나온다. 아니 이 책은 시집이라고 하기 힘들다. 아마도 그냥 읽으면 수필을 읽는 듯한 느낌, 그냥 그렇게 산문을 읽는데, 그 산문 속에 시가 들어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모음에 색깔을 부여한 것이 나중에 '모음들'이라는 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는 행구분이 전혀 없이 그냥 줄글로 나가고 있으니...

 

이렇듯 랭보를 유명하게 해준 시집을 읽었는데, 그다지 감흥을 못 느끼고, 왜 당시 사람들이 랭보의 시에 열광했을까 하는 생각.

 

당시 감정들을 감추고 속이고 온유하게 표현하는 풍조에서 자기 감정을 직설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랭보의 시가 충격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냥, 그렇게, 읽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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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6 1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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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6 19: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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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4 1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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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05: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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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가 살던 별 문학동네 청소년 36
김선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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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요즘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는 동물이다. 산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사람이 사는 도심지까지 내려와 사람들을 위협하는 동물. 그래서 허가 받은 사람들에 의해 사살되거나 포획되는 동물.

 

메나 뫼라는 말이 산이라는 말이니, 멧돼지는 산돼지라는 말이다. 사람이 길들여서 집에서 가축으로 기르는 돼지가 아니라 산에서 자유롭게 사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이런 멧돼지가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온다? 이유는 단순하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먹을거리가 없을까? 그 이유도 명백하다. 사람들이 모두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멧돼지가 살아가는 공간을 인간들이 하나하나 침범하고 그곳에 건물을 세우고, 숲을 밀어버리기 때문이다.

 

멧돼지도 인간들이 좋을 리가 없을텐데도 사람 근처로 내려오는 이유는 그들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 길을 막아놓아 살기 위해 내려오는데 유해동물이라고 피하고 또 죽이기까지 한다.

 

완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멧돼지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사람에게 투영한다면 어떻게 될까? 힘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가 멧돼지를 바라보는 관점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잡아서 가두거나 눈에 띄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죽여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해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것이 이 소설 "멧돼지가 살던 별"을 읽으면서 멧돼지 취급을 받고 사는 '유림'이란 아이에게서 느낀 점이다.

 

아버지 홍기수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자기가 아이에게 뭘 잘못했느냐고... 보호자로서 아이가 잘되게 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것 밖에 없다고.

 

그 폭력이 철저히 자기 입장에서만 판단한다는 점을 생각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을 휘둘러야지만 더 잘 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이를 패면서 아이에게 쓰게 하는 것이 바로 '명심보감'이다.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마치 독재정권이 어떤 독재를 해도 국민들 먹고 살게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처럼, 지금도 누구가 경제개발을 이루었다고 그가 저지른 폭력들은 별것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처음에 유림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아빠에게 맞으면서 지내듯이, 그렇게 국민들도 지낼 수 있음을... 결코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면.

 

눈 뜨고 행동하는 사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다행히 유림이 곁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 유림이는 캄캄한 세상에서 밝은 빛을 보게 된다.

 

밝은 빛을 본 사람은 시커먼 어둠 속에서만 살 수 없다. 이제 그 어둠에서 나와야 한다. 유림이가 목숨을 걸고 아빠에게서 탈출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유림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물, 멧돼지 산바가 등장한다. 소설의 처음-중간-끝에 산바는 유림이와 또 유림이를 돕는 주호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동물로 등장한다. 그 역시 유림이 아빠 홍기수에게 자식을 잃고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슬픔들이 모여 서로 공명하여 관계를 이룬다. 이들은 공존할 수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것.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이들은 서로 마음이 통한다. 마음이 통하니 대화를 할 수 있다.

 

대화가 없는 곳에서 폭력이 이루어진다.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정권이 독재를 하듯이, 대화가 없는 집에서 폭력이 일어나듯이, 홍기수 역시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용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런 폭력, 홍기수와 같은 직접적인 폭력은 이 사회에선 더이상 용납이 되지 않는다.

 

홍기수가 죽음으로 사라지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더 큰 권력 '박대령'은 어떻게 되는지 나오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는 세련된 폭력으로 살아남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세련된 폭력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경제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는지도 모른다.

 

또다른 주인공 류화신은 홍기수와 같은 드러난 폭력에는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숨어 있는 세련된 폭력과 싸우기는 힘들다. 그래서 어쩌면 이를 피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일. 유림이 일을 통하여 류화신은 변한다. 아마도 그는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도 하겠지만, 세련된 폭력과 맞서는 일에도 참여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류화신은 지금 삼청교육대로 추정되는 정화학교에서 3개월을 교육받는다. 무참한 폭력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류화신이 쓴 것도 바로 '명심보감'이다. 공권력이 얼마나 이런 책들을 이용했는지. 좋은 말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얼마나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명심보감'이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에게 쫓겨나는 멧돼지, 아빠의 폭력에 죽어가는 아이, 가정이 해체되어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년,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어른이 함께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소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결국 멧돼지별로 가버린 산바지만, 그래서 멧돼지가 살던 별이 된 이곳이지만, 이제는 사랑으로 함께 공존하는 그런 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화를 하지 못하는 상황, 얼마나 비극적인지, 그리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서로가 마음을 열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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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아우성 - 청소년 테마 소설 문학동네 청소년 33
김민령 외 지음, 유영진 엮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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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찾기 시작하는 나이에 접어들면 아이에서 청소년이 된다. 물론 아이라고 해서 자아가 없지는 않지만 통칭 청소년기를 그렇게 이야기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하지만 이 말은 좀 문제가 있다. 아이라고 해서 자신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고, 어른이라고 해서 늘 자아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해 놓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하나 더 설정해 놓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흘러가는 시간을 계절이나 달, 날, 시간으로 쪼개놓듯이 우리들 인생도 이렇게 단계로 구분을 해놓고 있다. 이런 구분에 의하면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다. 몸과 정신이 모두 어른이 되기 위해 달려가는 시기.

 

이 시기에 이들이 겪는 일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청소년들을 어른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지 않나. 그래서 어른들 관점에서 벗어난 청소년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지 않나.

 

그들을 그들 자체로 봐주는 눈을 지닌 어른들이 있어야 하지 않나, 아니 어른들은 자기들 처지에서 청소년을 보지 말고 청소년 처지에서 청소년을 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자꾸만 강요하게 된다. 어른 관점에서 청소년을 보면. 그들 자신이 자신들 삶을 살아가기에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얼마나 고투하고 있는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미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자아정체성을 스스로 찾지 못하고 강요된 정체성만을 찾게 되는 청소년들이 많은 사회가 우리 사회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어진 것을 찾아 해나가는 청소년들. 그렇게 만드는 어른들,

 

이 소설집은 이런 청소년들의 존재를 주제로 삼아 일곱 편의 소설을 묶었다. 모두 주인공이 청소년들이고 자신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청소년들의 존재라고.

 

영어나 공부로 주변에서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그것을 잘 극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영희 '미스터 보틀') 미국까지 가서도 간섭에서 벗어나지못하고 그 중압감에서 헤어나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모습(이금이 '실족') 소설.

 

무엇 하나 잘하는 것 없이 그냥 그대로 튀지 않는, 존재조차도 잘 인식되지 못하고 지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도대체 청소년기에는 공부를 잘하든, 운동을 잘하든, 아니면 싸움을 잘하든, 하다못해 청소녀들은 화장, 염색이라도 진하게 해야 자기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데, 이 중 어느 하나에도 끼지 못하면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지내는, 애써 찾아야 보이고, 그나마도 곧 잊혀지고 마는  (김민령 '뷰 박스') 그런 청소년의 모습을 그린 소설.

 

가난한 생활에서 소박한 꿈을 지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고등학생이 호주로 갈 꿈을 꾸지만 그 역시 환상임을, 자신이 지닌 처지를 알아가고 다시 일상에서 살아가는 모습 (진형민 '호주 갈 사람?') 결코 이들의 생활이 한 방으로 나아질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소설.

 

힘들 때 정말로 힘들 때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존재. 어쩌면 비슷한 고민을 하는 그런 사람들. 세상에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 이것은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최서경 '같은 사람') 소설.

 

나를 '나' 하나로만 말할 수 없다고 나는 수많은 '나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최상희 '유나의 유나') 어느 하나로만 규정하지 말라고 하는 소설.

 

그리고 세월호, 청소년들이라면 도저히 빗겨갈 수 없는 그 사건.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동생들이 기억하는 언니, 형. 함께 부딪히며 울고 웃으며 지냈던 그런 사람을 기억해야 함을(전삼혜 세컨드 칠드런) 보여주는 소설.

 

이렇게 다양한 청소년들이 제각각 지닌 고민들을 보여주고 그 상황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청소년들을 어른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청소년들 바로 그 자리에서 보고 있다.

 

소설에서 그렇게 청소년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것은 청소년들만이 읽을 청소년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자꾸만 자기들 관점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치려고만 드는 어른들이 읽어야 할 소설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명색이 청소년 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 너무 영어 제목이 많다. 이 점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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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09: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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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1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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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로 된 무지개 - 다시 읽는 이육사
도진순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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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로 된 무지개' 이육사 시 '절정'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지개인데 강철로 되었다니, 이 말로 안되는 역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로 이육사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고심을 했다. 다양한 해석을 하고, 교과서에서 통용되는 해석도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을 쓴 도진순은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바로 무지개에 대한 해석. 이 시에 나오는 무지개를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형가에 대한 이야기에서 해석하는 단초를 찾아온 것.

 

흰무지개. 이는 반역이라는 것. 당시 일제시대에 흰무지개라는 표현은 금지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이육사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한 것은 겨울이 일제시대를 가리킨다면 강철로 된 무지개는 이런 일제시대를 깨부술 아주 강한 무기 또는 신념이라는 것이다.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육사는 일제에 대항하는 삶을 살았는데, 시에서 일제에 굴복하는 듯한, 절망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겨울로 상징되는 혹독한 시련은 오히려 그 시련을 이겨낼 의지를 벼려내고, 무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작동한다고 이육사가 이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더 내디뎌낼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이육사였을테고, 그런 삶을 시로 표현한 것이 '절정'이고, 절정의 마지막 부분 표현이 바로 이런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육사 시에 대해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한 부분이 많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시 '청포도, 절정, 광야'에 대한 해석이 새로워서 읽으면서 감탄을 할 때가 많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지지 때문이다. '청포도'에서 '청'자에 관한 문제... 푸른 포도를 의미하지 않고 '풋'이란 의미를 지닌 아직 익지 않은 포도라고 하는 것. 결국 청포도는 미래를 노래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교과서에서 배웠던 글자가 하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참,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광야를 넓은 들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고...

 

결코 광활한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고 삶을 살아가던 터전인 광야라는 것. 이 광야를 잃어버렸는데, 이제 다시 찾아 먼 미래에 그곳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해석.

 

좋다. 이렇게 이육사 시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이 하나 더 덧붙여졌다. 단지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육사 시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이육사가 한시에,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것, 이런 면을 이육사 시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을 새롭게 알려주고 있다.  

 

하나 더 시를 꼭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역사를 전공한 학자가 이육사 시가 지닌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도 있다는 것, 그런 것을 알려주는 책이니, 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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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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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얼마 되지 않아, '아, 쌍용이구나!'하는 신음이 튀어나오게 된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슬픔이 다시 스멀스멀 밖으로 새어 나온다. 이제는 좀 잊혀졌나 싶었는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일 수밖에 없다.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으니... 여기에 지금은 미국에 본사가 있는 지엠이 군산 공장을 폐쇄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들도 희망퇴직을 받고 있으니...
 
근 10년이 되어가는 그때의 일들을 소설을 읽으며 상기하는 일은 별로 유쾌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잊어서는 안 되고, 또 이 일이 단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겠지만, 전국 각지에서 또 세계 각지에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으니, 소설을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현실이 슬프다.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어서 제목만 가지고는 쌍용차 파업 사건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쩌면 노동자들은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경영에서도 배제되었고, 또 파업을 할 때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집단으로 우리 사회 안정을 해치는 집단으로 매도되지 않았던가.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하나의 점으로 인식하게 그들을 철저히 고립시키지 않았던가. 그 고립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 소설은 용역의 시점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무오, 김무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인 김씨 성을 따고, 이름은 무오다. 한자어인지, 한글인지 모르지만 제목과 연결을 시키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제목과 연결을 시키면 무오는 한자어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무오(無吾), 내가 없는 사람. 즉 자의식이 없는,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 이런 무오같은 사람이 많으면 노동자들은 점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다. 연결이 된 선이나 면, 입체가 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여기서 무오는 그렇게 나온다. 그에게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다.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이 없는 그에게 친구가 있을 리가 없다. 이런 그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 이부. 이름 참, 고약하다. 이부라니...
 
그냥 뜻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기껏 생각하면 두 번째 아빠나 다른 아빠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없는 무오에게 용역일을 시키는 사람. 무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 그러니 그는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이다. 
 
무오가 용역으로 파업 현장에 참여하면서 그 파업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소설인데,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무오는 자의식을 만들어가게 된다.
 
비록 점으로 있는, 사회에서 점 취급을 받고 고립되어 있는 그들이지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고립되어 가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이 그 점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유대를 맺고 있음을 무오는 점점 깨달아 간다.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깨닫게 되고... 이런 무오의 시점으로 소설이 전개되기에 소설 속에서 파업 노동자들이 겪는 아픔이 한 다리 건너서 전해진다.
 
공지영이 쓴 "의자놀이"에서 아프게, 마음 속으로 콕콕 찍어 박히던 그런 아픔과는 다르게 소설은 거리를 두고 파업 현장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이 자의식이 없는 무오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효과다. 그렇다고 파업이 아프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파업 주동자였던 이자희가 무너져 가는 과정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해고는 살인임을, 이들이 얼마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어떻게 사람이 망가져 가며, 가정이 해체되어 가는지를 이자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점과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과 선이 모여 면을 만들고, 면과 면이 모여 입체가 되어 자기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 우리는 파업 노동자들이 계속 점으로만 지내게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소설은 마지막에 에필로그를 통해 이자희의 모습을 작가 시점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현실임을.
 
이제 개정될 헌법에서(발의가 될지 안 될지 아직은 미지수지만)는 근로란 말을 노동이라는 말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 사회가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것이 정당함을, 그들이 결코 점으로 머물러서는 안 됨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먹튀 자본가는 있어도 먹튀 노동자는 없으니, 그런 먹튀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노동자들의 권리가 강화되어야 함을, 이 소설, 용역의 눈으로 파업 현장을 서술한 이런소설을 읽으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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