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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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형제1 - 문화대혁명기 고아가 되다

 

위화의 글은 읽기에 편하다. 간결하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문체가 편하게 읽게 만든다. 그는 비극을 다루면서도 비극에 온 마음이 빠져서 허우적대게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비극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우리나라 고전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해학'이 있다.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삶.

 

위화는 중국 현대사를 비켜가지 않는다. 그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럼에도 소설이라는 문학을 충분히 활용한다.

 

문화대혁명기때 중국인이 겪어야 했던 갈등, 혼란 등을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지는 않는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은 어떤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화의 수필이 중국에서 출간이 되지 않고 있지만, 이 소설 '형제'는 출간이 되었다고 한 글을 읽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무리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문학이기 때문에 허구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허구는 곧 사실이 된다. 문학적 허구는 문학적 진실이고, 이는 우리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을 이제 막 1권을 읽어서 뒤의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지만, 1권은 문화대혁명기를 중심으로 그것이 사그러질 때까지 어머니인 이란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이광두. 그리고 그의 형제 송강. 왜 성이 다른 사람들이 형제일까 했더니 어머니 이란이 송범평과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송범평의 죽음과 어머니 이란의 죽음을 관통하는 문화대혁명이 1권의 배경이다.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죄인이 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처음에는 단죄하는 처지에 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장발 손위와 그의 아버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자행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혁명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골고루 잘 사는 사회, 그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과거를, 출신성분을 가지고 그를 죄인 취급하는 것이 혁명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질문을 하게 하는 1권이다.

 

교사로 동네에서 인정받고 착하게 살고 있던 송범평, 그는 어느 순간 죄인으로 전락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지주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런 연좌제... 과거의 끈을 벗어던져도 자신을 옭아매는 집안 내력.

 

그의 죽음은 충분히 비극적이다. 이런 비극을 겪는 두 아이, 이광두와 송강은 이 비극에 온몸이 젖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기 때문이다. 아버지 송범평이 잡혀가 온갖 고초를 겪게 되는 장면에서도 너무도 천진한 이들 형제의 말과 행동때문에 우리는 비극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된다.

 

송범평의 죽음 이후에 어머니는 그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어머니 이란 역시 오래 살지 못한다. 송범평의 죽음 이후 7년 뒤 어머니 이란 역시 아들 이광두의 앞날을 걱정하며 송강에게 이광두를 잘 보살피라고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동네 양아치인 이광두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지극하고, 이런 이광두를 한 살 많은 송강이 잘 돌봐주겠다고 이란의 무덤 앞에서 다짐하는 장면으로 1권은 끝난다.

 

그런데... 소설은 이미 늙은 이광두의 시점에서 시작하고 이다. 그리고 곧장, 한 쪽이 지나자마자 과거로 돌아가 버린다.

 

소설 처음에서 이광두가 억만장자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이제 남은 가족이 아무도 없다. 송강 마저 3년 전에 죽었다고 나오니.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줄 가족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이광두의 과거 이야기로 시작하고, 전개된다. 우리의 양아치 이광두가 어떻게 성인이 되어 억만장자가 되는지, 그것과 중국 현대사를 연결지으며 읽으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2권과 3권에서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중국의 모습, 그 속에서 적응해가는 이광두의 모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적절하게 극복했는지... 그들은 모두가 골고루 행복한 사회를 만들었는지 질문을 하면서 읽어야겠다. (위화가 쓴 머리말을 보면 이미 답은 정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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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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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은 충분히 된다고. 그렇게 우리네 삶은 모두들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특히 격랑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은 소설보다도 더 진한 이야기를 살아온 사람들인데, 이들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소설로, 영화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때로는 진한 슬픔을, 때로는 가벼운 웃음을, 때로는 쓴 웃음을 지닌 그런 이야기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고 있는데...

 

김훈이 쓴 이 소설 역시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온 가족의 이야기다. 마동수-마차세 부자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일제시대에 태어나 박정희가 죽은 해에 죽은 마동수는 흥남철수 때 가족과 헤어진 이도순과 만나 마장세, 마차세를 낳는다. 그러나 마동수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평생을 떠도는데, 그래도 정기적으로 집에는 들어오지만 그가 정착했다고는 할 수 없다.

 

죽음의 순간에도 홀로 죽어가는 그는 평생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어렸을 때는 일제시대라 제 장소를 찾지 못했고, 해방이 되어서는 전쟁이다 뭐다 하여 다시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삶.

 

이도순 역시 마찬가지다. 피란민이라는 존재는 이미 밀려난 존재다. 이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머무를 장소를 마련하지 못한다. 비록 남쪽에서 가정을 꾸렸을지라도 정신을 잃어가는 치매 상태에서 이도순은 피란 올 때 잃어버린 딸을 찾기만 한다.

 

죽을 때까지 살아온 남쪽이 이도순에게는 정착한 장소가 아니라 언제든 비워주어야 할 공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본래 살던 곳이 서울이었던 마동수가 일제시대와 전쟁을 통해 장소를 잃었다면, 이도순은 피란으로 장소를 잃었다.

 

장소를 잃은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던 곳, 그 공터에서 태어난 형제, 마장세-마차세. 이들 역시 부모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본디 가진 것이 없으면 정착하기 힘들다. 큰아들 마장세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외국에 남아 산다. 그에게 한국은 '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동남아 역시 그가 머무를 장소는 되지 못한다.

 

그곳 역시 그에게는 '공터'에 불과하다. 잠시 머무는 곳.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 압송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귀향이다. 귀향이라고 해도 그는 역시 머무르지 않는다. 교도소가 평생을 사는 곳도 아니고, 이곳 역시 머무르다 떠나야 할 공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래도 끊임없이 장소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이가 바로 둘째 아들 마차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자신에게 얽혀 있는 인연의 끈들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그렇다고 형처럼 그 끈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공터'를 '장소'로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내가 되는 박상희와 첫딸인 '누니'다.

 

하얀 눈이 오는 날 태어났다고 해서 누니라고 붙인 이름.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세상의 때를 덮는 눈처럼 맑고 깨끗한 세상이어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공터를 '장소'로 만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는 않다. 마차세가 직업을 잃고 임시직으로 다시 배달일을 하는 데서 소설이 끝나는 것은 이들이 공터를 장소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제목은 '공터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때 공터는 바로 우리가 살아온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사인 것이다. 이것이 장소가 아니고 공터인 것은, 우리 모두 이 공터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왔지만, 실상 우리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공터는 곧 빈곳이고 진공이다. 무엇이나 다 빨아들이는 진공, 그러나 진공은 다시 뱉어내야 자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도 머물 수 없는 곳이다. 우리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은 자만에 불과하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그걸 모르고 자신이 그 공터의 주인인 양 행세했던 마차세의 친구이자 사장이었던 오장춘의 최후는 비참할 뿐이다. 역사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으니, 그는 죽음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공터에서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묶인 끈은 무엇보다도 질기다. 쉽게 끊기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마장세가 그토록 부정하고 버리고 싶었지만 버리지 못했던 것, 마차세 역시 그 관계를 버릴 수가 없다.

 

공터가 이어주는 그런 관계들, 역사들... 그 속에서 조금씩의 변화는 일어나겠지만 공터가 없어지는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다. 그러니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계속 힘들게 살 수밖에.

 

이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중들이 살아온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김훈은 그의 간결한 문체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문체의 간결성, 전혀 끈적거림이 없는 그의 글들로 인해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 그것도 현재진행형이 아닌 이미 끝난 과거의 일들을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전달해주는 느낌을 받게 하는 소설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거리를 두고 살필 수 있는 소설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인물들에게 감정이 들어설 수 없게 만들고 차분히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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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조네 사람들 김소진 문학전집 1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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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며 신경림의 시를 떠올렸다. '파장(罷場)'이라는 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 모두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 (신경림, '파장' 부분)

 

이 시에서 서울이 그리워지나라고 하여 지방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김소진의 '장석조네 사람들'에서는 서울에 온 지방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소위 달동네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산다. 그것도 제 집이 아니라 장석조씨네 집에 세들어 사는 것이다.

 

'못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은 결코 못나지 않았다. 있는 사람들의 도덕 기준에 비추어보면 참 비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삶에 충실하다.

 

도덕이나 규범에 충실한 척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가난한 사람들, 그럼에도 인간적인 정을 잃지는 않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 햇볕이 들까마는, 그들은 그래서 작은 햇볕이나마 온전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김소진의 소설이 어두운 분위기를 많이 냈는데... 이 소설에서는 생활은 어렵지만 분위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도망갔던 아내가 돌아와도 그냥 함께 살고,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삶을 이어가고, 없는 재산을 노름으로 날려도 그냥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

 

이들의 삶이 몸에 충실한 그런 삶이라면 조금 있는 것들은 이들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삶을 산다.

 

마지막 제목인 '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된 '장석조'씨가 얼마나 비열하게 돈을 긁어모으는지, 여자들을 후리는지 - 후린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에게는 도덕이 없다. 제 맘에 드는 여인을 돈으로든 무엇으로든 제 욕망을 채우고만다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벌을 받지 않는다. 그게 우리 현실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는 사람들, 오히려 약한 사람들, 정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다친다.

 

'빵'에 그 점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에게 가장 맛있는 빵은 배부를 때, 편안할 때가 아닌 가장 힘들었을 때 먹은 빵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밀가루를 받으러 간 마당에서 다시 이런 '빵'을 먹는다.

 

못난 사람들,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 그 장면에서 먹는 빵. 그 빵이 맛없을 리가 없다. 그렇게 소설은 지지리도 궁상을 떠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생활은 지지리 궁상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할 정도로 서로를 도우며, 흥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삶.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 서민들의 모습을 김소진은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을 쫓아내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이들이 서로 웃으면서 지낼 수 있는 그런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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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을 지운다 실천문학 시인선 19
신좌섭 지음 / 실천문학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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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절한 슬픔이 묻어난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를 가리켜 '애도'라고 했다. 진정한 애도는 슬픔을 넘어서게 만든다. 그런 애도가 일어나지 않을 때 슬픔은 분노가 된다.

 

이 시집에 넘쳐나는 애도는 개인의 슬픔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개인의 슬픔으로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슬픔이 사회의 슬픔으로 확장된다. 사회의 슬픔을 애도하게 한다.

 

동학농민운동부터 시작하여 세월호로 이어지는 민중들의 비극을 이 시집은 개인사를 통해 애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자식을 잃은 슬픔이 시집의 주를 이룬다. 이를 우리는 '참척(慘慽)'의 슬픔이라고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슬픔. 그 슬픔을 통해 시인은 시를 쓰게 된다.

 

자신의 마음 속에 응어리지어 있던 차마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시로 나오게 된다. 시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게 된다.

 

그런데 자식의 죽음으로 시인은 자신의 아버지를, 우리나라 역사를 시로 표현하게 된다. 자기 자식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비극에 그치지 않고 이것이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비극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4.19 등등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죽어갔던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목숨을 버렸다. 이런 역사를 시인의 아버지인 시인 신동엽이 자신의 시로 표현했다.

 

아버지의 뒤를 시어 늦게 시를 쓴 이 시인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동학농민운동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죽음이 이어진다. 이런 죽음에 대한 애도를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잊히지 않게 하라

 

잊히지 않게 하라

갑오년의 핏빛 잠들어 있어도

 

잊히지 않게 하라

4월의 파도 겁에 질려 울어도

 

120년 곤두박질치는

우금치의 원혼들이 세월호를 타고 간다

 

잊히지 않게 하라

육십갑자 돌고 돌아

 

땅과 하늘

선혈 쏟는 날

 

신좌섭, 네 이름을 지운다. 실천문학사. 2017년. 109쪽.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아들을 기리며 쓴 시들이 대부분이지만, 이 시들은 다시 세월호로 목숨을 읽은 우리 아이들을 기리는 시도 된다.

 

동학에서 시작된 운명이 다시 세월호까지 왔다면 무려 두 번의 육십갑자를 돌아왔다면 이는 우리가 그동안 제대로 된 애도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시집은 우리 마음을 울린다. 개인의 비극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의 비극으로 확장되고, 우리로 하여금 이런 비극들을, 이런 슬픔들을 제대로 애도하게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애도를 통해 개인적, 사회적 슬픔을 치유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시들이 하나하나 마음을 울린다. 그런 울림을 통해 애도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런 애도를 통해 슬픔을 치유하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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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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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09: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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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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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가 쓴 작품 중에 네 번째로 읽은 책, 소설로는 세 번째.

 

제7일, 무언가 환상 속에 이야기가 펼쳐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중국어판에도 이런 구절이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번역본에는 시작하기 전에 성경의 창세기 구절이 쓰여 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이 된 제7일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이다.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 그 날은 어떤 날일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시작부터 이상하다. 죽었다. 주인공이 죽었다. 주인공이 죽었는데, 죽은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분명 괴기스러운 소재인데, 전혀 괴기스럽지 않다.

 

오히려 읽어갈수록 마음이 따스해진다. '허삼관 매혈기'를 읽을 때 저절로 웃음이 머금어지는 그런 전개와는 다르게, 또 '가랑비 속의 외침'을 읽으며 참 어두운 분위기구나 하는 느낌과 다르게, 이 소설은 죽음 이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따스하다.

 

밝다. 사랑이 넘치고 있다. 그 사랑 넘침을 죽음 이후에 무덤 속으로 가지 못한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위하며 사는 사람들, 죽음 앞에서도 결코 평등할 수 없는 사람들. 빈의관이라고 쉽게 말하면 화장터에서조차도 권력과 금력에 따라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중국에서, 권력과 금력을 소유한 자들이 어떻게 떵떵거리고 사는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런 사회비판적인 면도 있지만, 이것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빈의관에서 귀빈석과 평민석이 따로 있다고 표현하는 것, 그들이 쓰는 화장로도 다르다는 것 정도가 나타나 있을 뿐이다.

 

이런 모습보다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건사고를 감추는 모습이야 어느 권력이고 비슷하다지만, 이 소설에서도 그런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소설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주인공은 양페이와 그가 만나는 보통 사람들, 아니 더 가난한 사람들이다.

 

위화 소설이 지닌 짧고 경쾌한 문장으로 인해 이들의 비극이 무겁고 칙칙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이들은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긍정한다.

 

무덤조차 마련하지 못해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라도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하는 모습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죽을 때가 되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철로에서 주워 키워준 아버지 양진바오, 그리고 자신을 떠난 여인 리칭, 가난한 셋집에 살던 우차오와 류메이, 아버지의 친구로 양페이를 돌봐준 리웨전 아줌마 등등.

 

모두가 가난하지만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 사람들, 죽어서도 서로를 위하며 지내는 사람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무덤조차 갖지 못하고 또 관료의 책임회피로 자신의 유골이 아닌 다른 유골을 매장한 상태로 지내고 있는, 그들이 모여 지내는 곳.

 

마지막으로 류메이가 무덤으로 떠나갈 때 들어온 우차오는 양페이와 함께 이곳에 간다. 양페이가 자신의 아버지 양진바오를 찾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날이 바로 '제7일'이다. 양페이가 이제는 편히 쉴 곳.

 

양페이가 의혹에 차 있는 우차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저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가 물었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내가 대답했다.      (314쪽)

 

이렇게 제7일은 끝난다. 가난한 사람들, 이들은 죽어서도 자신들의 쉼터인 무덤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끝이 아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산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에게 얼마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작품에서 사람에게는 한 평의 땅, 죽어서 묻힐 그 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현대 중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한 평의 땅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화장한 유골을 넣고 보관한 0.1평정도의 땅도 허용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렇게 죽음 이후에도 이들이 불행하게만 살아서는 될까. 아니다. 위화는 소설을 통해서 이 사랑이 넘치는 이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야 한다고, 죽음 뒤에도 불평등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죽은 사람인 양페이가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그렇게... 정말로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앞에서조차 불평등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죽어서 서로를 위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통해 '제7일'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제7일'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삶에서 그런 '제7일'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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