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아이들 바다로 간 달팽이 5
데이비드 L. 메스 지음, 정미현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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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음이 아팠다. 읽다가 도중에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용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혈아를 튀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어릴 적 미군부대가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백인을 닮은 아이와 흑인을 닮은 아이가 있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도 미국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특히 흑인을 닮은 아이들은. 그들은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깜둥이로 불렸다. 피부가 하얀 아이들은 어느 정도 질투의 감정이 실린 놀림을 받았다면, 피부가 검은 아이들은 그냥 놀림, 무시의 대상이었다.

 

소설은 그렇게 이태원에서 흑인의 피를 받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니, 시작 문장은 간결하지만 너무도 많은 슬픔의 역사를 담고 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조 윈터의 어머니는 창녀였다.' (10쪽)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여인. 그 여인은 흑인을 닮은 아이를 낳자마자 죽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원치 않게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 병석이...

 

그는 이태원에서 살아가는 부랑아라고 할 수 있다.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하는 아이. 그런 그를 착취하는 사람이 있다. 늘 그렇다. 없는 사람 등골을 빼먹고 사는 존재들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설 처음 부분이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조 윈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 이것은 그가 성장했을 때 이야기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생존의 정글에서 살아남은 것.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의 노력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세상은 나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 진흙 속에서 연꽃이 필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

 

병석은 자신과 반대로 피부가 하얀 혼혈아를 만난다. 미희. 이들은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은 이방인이라는 것, 국외자가 된다는 것이니, 그들은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 대접을 받고 또 미국인이지만 미국인이 아닌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둘이 마음을 열고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 여기에 온갖 멸시를 피부색으로 인해 받는 병석과 오히려 그런 피부색과 얼굴 모습으로 남자들의 눈요기거리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미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혼혈아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을 거쳐 미국에 가서 그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당당한 삶의 주체로.

 

소설을 쓴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이태원 하면 지금은 번화가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60-70년대 우리나라 이태원은 기지촌에 불과했던, 몸 파는 사람들과 그에 빌어먹는 온갖 군상들이 모여 살던 곳. 여기에 곳곳에 버림받은 아이들이 온갖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던 곳.

 

그런 사정을 이렇게 자세하게 까발릴 수 있다니... 잊고 있었던 과거를 소설은 되살려주고 있다. 이건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다만 미군의 사생아들에서 이제는 다문화란 이름으로 포장이 되어 있을 뿐이지만, 그들을 과연 온전한 우리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 우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남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폭력적인 발상이라면 그들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려 하고 있는가.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어울리는 것, 버려진 아이들, 까만 피부건, 하얀 피부건, 사지가 멀쩡하건, 어딘가 장애가 있건, 그들은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서로를 도우며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에선 그런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태원 아이들... 기지촌 아이들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삶을 찾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는지. 그 길에서 만난 수많은 나쁜 사람들과 또 좋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세상은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있어 아직은 살 만하다는 것을 생각하게도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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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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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의미를 찾으면 더 잘살 수 있다고 한 건, 빅터 프랭클. 삶의 의미를 찾아야지만 삶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거꾸로 이 소설은 무의미의 축제다.

 

축제라는 것은 즐거움이다. 즐거움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냥 즐기면 되듯이, 삶 역시 하나하나 의미를 찾기보다는 무의미들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시작부터,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첫부분부터 별다른 의미가 없다. 유행하는 옷들, 배꼽을 내놓은 옷을 입은 처녀들을 보면서 배꼽에 대해서 생각한다. 배꼽, 삶과 삶을 이어준 흔적. 그런데 이런 배꼽에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배꼽은 어떤 역할을 할까?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생명을 이어준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더이상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이끌어가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큰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연극을 가장하여 얼토당토 하지 않은 파키스탄말을 하는 주인공도 있고, 계속 배꼽에 대해서 생각하는 주인공도 있고, 병이 없음에도 병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인물도 있고.

 

그렇게 우리들 삶은 별다른 의미없는 행동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물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어떤 의미를 지니고 나온 것은 아니다. 내가 나오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그냥 나오게 됐다. 무의미다. 그렇다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도 역시 내 의지가 작동하기는 힘들다. 몇몇은 자신의 의지로 제 죽음을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소설에서 알랭의 어머니처럼 죽음 순간에도 어떤 무의식적인 행위가 작동하기도 한다.

 

수많은 무의미들이 모여 삶을 구성하는데, 그 무의미들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므로 '무의미의 축제'가 바로 삶이다.

 

작고 하찮은 것들, 내겐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삶의 한 구성 요소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의미라 하는 것, 무의미의 축제는 그래서 내 삶에 관여하는 모든 것들이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무의미라는 것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그러므로 프랭클이 말한 의미치료, 즉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이 소설에서도 부정되지 않는다.

 

나중에 엄마와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알랭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숱한 무의미들을 만난다.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그냥 흘려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여 우리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상들, 언뜻 보면 아무런 의미없는 행위들이 결국 우리 삶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쿤데라는 소설을 통해, 거시적인 것이 아니라 - 소설에서 그는 스탈린과 칼리닌을 등장시켜 그들을 희화화 함으로써 거시적인 것의 무의미함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 작은 것들,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들 속에 우리 삶이 있음을, 우리는 그런 무의미한 것들을 통해 삶을 지속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쿤데라의 다른 소설처럼 참 읽기 편하다. 그가 지닌 장점이자 매력일 것이다. 이야기꾼. 도대체 왜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읽기에 힘이 들지 않게 하는 전개. 그러나 의미를 찾으려면 고생을 하게 하는 그런 소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읽기는 편하지만, 의미를 찾으면서 읽으려면 쉽지만은 않은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나처럼 자기 식으로 해석하면 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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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 제19회 부커상 수상작, 개정판
아룬다티 로이 지음, 황보석 옮김 / 문이당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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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사람이 살아가게 하는데 가장 필요한 요소지만 그것은 다른 큰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그런 작은 것을 지키는 신, 크지 않다. 결국 작은 것들의 신은 소멸의 신이다.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신.

 

힘이 없는 신. 그러나 작은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삶에 늘 붙어 있는 신. 존재를 지켜주지는 못 하나, 존재와 함께 있으며 함께 사라지는 신.

 

그런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신이 깃들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 것들의 신이 깃들인 사람은 그 사회의 주류가 아니다. 비주류다. 중심에서 빗겨난 사람들. 그러나 중심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들.

 

중심에 있는 사람들, 큰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지니고, 같은 욕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러나 같은 감정, 같은 욕망, 같은 생활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들은 작은 것들, 흔히 작은 것들을 하찮은 것들, 무시해도 좋은 것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런 작은 것들이 결코 작은 것들이 아니고 우리 삶을 이루는 가장 큰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아무리 우리가 작은 것들이라고 무시해도 그것 없이는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 비천한(?신분이 존재하는 사회,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존재라고 해도 그들에게도 같은 삶이 있다는 사실을, 같은 삶을 살아가려 했다는 이유로 파멸해 가는 인물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 구성이 제목과도 어울린다. 얼핏 추리소설 구성을 택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사건들 하나하나를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았을 뿐이다.

 

작가는 1997년(무려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한국어판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소설이 복잡한 세상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 이 소설은 저의 세상이며 제가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또한 이 책은 장소나 관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들과 땅과 공간에 관한 것이며, 어떤 특정한 사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퍼즐조각 맞추기가 떠올랐다. 단순한 조각들이 전체 그림에서 부분 그림을 이루고 그 부분 그림들을 먼저 맞춘 다음 전체에서 어울리는 자리에 갖다 맞추면 나중에 한편의 완성된 퍼즐이 되는.

 

그래서 이 소설은 읽어가면서 점점 형태가 명확해 진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벌어졌는지를 알게 된다. 또 문장 자체들이 짤막짤막하고 경쾌하게 진행되고 있고, 작가가 적절히 개입해서 사건 전개를 알려주고 있기에 읽기에 힘들지는 않다.

 

다만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개념이 잘 들어오지 않는데, 약한 존재들과 함께 하는 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약한 것들은 금방 소멸해가는 존재이니, 이들의 사랑이 지속될 수 없다고 여기기로 했다.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작가의 말대로 굳이 인도가 아니어도 된다. 이런 사랑의 비극은 어디에도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작은 것들은 큰것들에 의해 하찮은 것으로 무시당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소설은 어떤 측면에서 읽어야 하나? 그런 작은 것들이 파멸해 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작은 것들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제 분수를 지키며 살라고 하나? 아니, 그렇지 않다.

 

작은 것들도 큰것들과 다르지 않음을, 작은 것들의 삶도 그들과 같음을, 그래서 존중받아야 함을 생각해야 한다.

 

작은 것들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신이 있으므로...

 

소설보다는 정치평론으로 먼저 만난 작가, 아룬다티 로이... 그가 쓴 "9월이여, 오라"를 잘 읽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 읽은 이 소설,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개정 번역판이 나왔다는 것은 여전히 작은 것들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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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더듬이 선생님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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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는 건 그 학생이 외톨이가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자신이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라 쓸쓸한 겁니다." (340쪽)

 

이건 충격이다. 거짓말이 나쁜 게 아니라 쓸쓸한 거라는 말. 거짓말을 하는 아이,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런 말을 한다는 것. 그렇다. 그 아이의 외로움을 알고 받아들여주는 교사, 그래서 교사는 속는 것이 아니라 속아주는 것이라는 무라우치 선생의 말. 이 땅의 교사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교사는 언제든,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학생이든 그 아이를 외톨이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342쪽)

 

이런 교사, 정말 만난다면, 그 상황이 좋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행복일 것이다.

 

"외톨이가 둘 있으면 그건 이미 외톨이가 아니라고,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한단다. 선생님은 외톨이 아이들 곁에 있는, 또 한 사람의 외톨이가 되고 싶어. 그래서 나는 선생을 하는 거야." (51쪽)

 

짠하다. 외톨이 곁에 있는 외톨이 선생. 그러면 외톨이는 없는 거라는 선생. 학교라는 공간에 얼마나 많은 외톨이들이 있는가. 한 학교에 꼭 그런 외톨이들이 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래서 더 외로운 외톨이. 외톨이임에도 외톨이로 지낼 수밖에 없는 외톨이.

 

당연하고 평범한 학교에서 당연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은 학생이 외톨이가 된다. 이런 외톨이 곁에 있어주려고 선생을 한다는 무라우치 선생.

 

말을 더듬는 선생이다. 그것도 국어 선생이다. 치명적인 약점이다. 국어 선생이 말을 더듬다니. 그렇다면 무라우치 선생은 외톨이다.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정규직 교사도 아니다. 시간제 교사다. 일명 비상근강사. 우리말로 하면 기간제 교사다. 그런 그가 말을 더듬는 데도 교사를 한다. 중요한 것은 말을 더듬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하느냐다.

 

그는 중요한 것만 말한다고 한다. 자신은 중요한 것을 말하고, 곁에 있어주려고 교사를 한다고. 이런 사람을 교사라고 부르면 안 된다. 선생이라고 해야 한다. 앞서서 난 사람. 자신이 깨우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사람.

 

그에게는 말더듬다는 사실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점이 된다. 그는 외톨이기 때문이다. 외톨이기 때문에 또다른 외톨이 곁에 있어줄 수 있다. 곁에 있어주는 일,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냥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는데...

 

꼭 해결할 필요는 없다. 소설에서도 해결을 하지 않는다. 그냥 진심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진심이 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해야 할 역할이다.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곁에 있어주는 것,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알게 해주는 것.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짠해지기도 한다.

 

마지막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무언가가 꽉 들어찬 느낌을 받는다. 이런 선생을 만났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은 상황이겠지만,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니, 행복한 일이다.

 

꼭 학생들만이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어른이 읽어도 짠해지는 소설이다. 외톨이가 어찌 학교에만 있겠는가? 학교 밖에도 외톨이는 많다. 이런 외톨이들 곁에 또 하나의 외톨이로 곁에 있어줄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세상에서 외톨이로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그렇다. 중요한 것은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 마음으로 전해진다. 진심으로 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것은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것이 된다.

 

학생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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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
도리 힐레스타드 버틀러 지음, 이도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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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이라는 말과 '악플러'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어떤 글에 상대를 비방하는 댓글을 악플이라고 했다. 악플을 다는 사람들을 악플러라고 했고.  이 악플로 마음 고생한 사람들뿐이 아니라 목숨을 끊은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악플에 대항하는 운동인 '선플'운동도 벌이고 했었는데...

 

인터넷,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다. 자신의 존재를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폭을 넓혀줄 매체로 인터넷을 이야기한 이유다.

 

하지만 모든 발명품은 사람들 뜻대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핵폭탄을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어디 그런가? 오히려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너무도 공포스러운 무기가 되지 않았던가.

 

해충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해 주어 먹을거리 걱정 없게 해주었다는 농약은 어떤가. 생태계를 파괴해 해충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에게도 재앙이 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암을 유발하거나 온갖 질병을 일으키고 있으니...

 

여기에 유전자조작식물들은 어떤가? 우리들 먹을거리 걱정을 해소해 주기는커녕 다국적기업만 살찌우고, 우리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게 만들었지 않은가. 기술발전이 인류를 꼭 좋은 방향으로만 이끌어가는 것이 아님을 많은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는데.

 

인터넷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기도 하다. 소통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인터넷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무기로 바뀌기도 하는 세상이니.

 

온갖 정보들이 날아다니는 인터넷에서 자칫 잘못하면 애매한 사람이 고통받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잘못이 없더라도 그 사람을 바보 만드는데 인터넷만한 매체도 없다. 순식간에 퍼지고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

 

좋은 의도로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고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의견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러나 시작이 잘못되었다. 자, 학생들을 어떻게 이 사이트에 들어오게 하지?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학생들이 방문하지 않으면 학생들을 위한 사이트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학생들은 이런 사이트에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면 또다시 사이트는 의미가 없어진다. 좋은 의도로 만들었지만, 학생들 방문이 신통치 않을 때, 이 때 할 수 있는 일이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을 싣는 것이다.

 

최악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투표를 하게 한다. 조금 흥미가 생긴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간 사이가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좋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게다가 교사-학생 간에는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많고 또 어느 정도 인기투표 역할도 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가 있다.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 나쁜 선생님을 투표하게 했다. 첫 시작을 그렇게 하면 남을 트집잡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곧 '릴리'라는 여학생을 공격하는 글이 올라온다. 한 사람에 대한 공격이다. 판단을 어떻게 해야 할까? 표현의 자유를 무한히 허용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글을 삭제해야 할까? 그것이 검열일까?

 

이런 갈림길에 선 사이트 운영자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한다. 표현의 자유, 이것이 곧장 '혐오 표현의 자유'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불구경과 남 싸움 구경이라고 하겠는가. 그만큼 남을 비방하는 글은 쉽게 퍼진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데.

 

혐오 표현까지도 표현의 자유라고 허용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은 아니라고 한다. 아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는 상대에게 악의를 지니고 또는 악의를 지니지 않더라도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범죄다. 분명 혐오 표현은 범죄다. 이런 인식을 하면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혐오 표현... 그것이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복수라고 해도 정당할 수는 없다. 그것도 과거에 살이 쪘다는 이유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비방을 하니, 이는 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이를 운영자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내버려둔 것도 문제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결국 피해자는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고, 경찰이 개입하게 된다. 경찰이 개입하더라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이 될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소설은 해결이 될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성격의 사이트를 만드는 것. 여기서는 토론 사이트를 만든다. 토론을 하게 하고, 운영자들은 혐오 표현이 들어가나 들어가지 않나를 살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인터넷을 떠나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것. 자고로 사과는 서면으로는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터넷으로도 마찬가지고. 방송으로도 마찬가지다. 직접 가서 얼굴을 맞대고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다음 관계를 만들어갈 수가 있다.

 

읽으면서 우리나라 '서동요'가 생각난 것은 왜일까? 서동이 선화공주와 결혼해 잘 살았다더라로 끝나는 설화, 설화, 아주 옛이야기니까 망정이지, 사실 선화공주 처지에서는 비방을 당하고 쫓겨나는 계기가 바로 서동요 아니던가. 그야말로 잘못된 사실이 또다른 악플들과 만나 인생을 바꾸게 되는 계기. 그만큼 사람들 입은 무섭다.

 

익명의 공간인 인터넷에서는 더 무섭다. 그들은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거의 스마트폰 속에서 사는 요즘 세대. 한 번 읽어보면서 자신은 어떤 스마트폰 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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