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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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의미를 찾으면 더 잘살 수 있다고 한 건, 빅터 프랭클. 삶의 의미를 찾아야지만 삶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거꾸로 이 소설은 무의미의 축제다.

 

축제라는 것은 즐거움이다. 즐거움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냥 즐기면 되듯이, 삶 역시 하나하나 의미를 찾기보다는 무의미들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시작부터,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첫부분부터 별다른 의미가 없다. 유행하는 옷들, 배꼽을 내놓은 옷을 입은 처녀들을 보면서 배꼽에 대해서 생각한다. 배꼽, 삶과 삶을 이어준 흔적. 그런데 이런 배꼽에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배꼽은 어떤 역할을 할까?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생명을 이어준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더이상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이끌어가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큰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연극을 가장하여 얼토당토 하지 않은 파키스탄말을 하는 주인공도 있고, 계속 배꼽에 대해서 생각하는 주인공도 있고, 병이 없음에도 병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인물도 있고.

 

그렇게 우리들 삶은 별다른 의미없는 행동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물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어떤 의미를 지니고 나온 것은 아니다. 내가 나오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그냥 나오게 됐다. 무의미다. 그렇다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도 역시 내 의지가 작동하기는 힘들다. 몇몇은 자신의 의지로 제 죽음을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소설에서 알랭의 어머니처럼 죽음 순간에도 어떤 무의식적인 행위가 작동하기도 한다.

 

수많은 무의미들이 모여 삶을 구성하는데, 그 무의미들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므로 '무의미의 축제'가 바로 삶이다.

 

작고 하찮은 것들, 내겐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삶의 한 구성 요소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의미라 하는 것, 무의미의 축제는 그래서 내 삶에 관여하는 모든 것들이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무의미라는 것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그러므로 프랭클이 말한 의미치료, 즉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이 소설에서도 부정되지 않는다.

 

나중에 엄마와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알랭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숱한 무의미들을 만난다.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그냥 흘려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여 우리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상들, 언뜻 보면 아무런 의미없는 행위들이 결국 우리 삶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쿤데라는 소설을 통해, 거시적인 것이 아니라 - 소설에서 그는 스탈린과 칼리닌을 등장시켜 그들을 희화화 함으로써 거시적인 것의 무의미함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 작은 것들,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들 속에 우리 삶이 있음을, 우리는 그런 무의미한 것들을 통해 삶을 지속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쿤데라의 다른 소설처럼 참 읽기 편하다. 그가 지닌 장점이자 매력일 것이다. 이야기꾼. 도대체 왜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읽기에 힘이 들지 않게 하는 전개. 그러나 의미를 찾으려면 고생을 하게 하는 그런 소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읽기는 편하지만, 의미를 찾으면서 읽으려면 쉽지만은 않은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나처럼 자기 식으로 해석하면 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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