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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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 중국 현대사를 살아온 한 노인의 이야기다. 중국도 우리나라만큼이나 어려운 일들을 겪었는데, 그 일들을 겪는 모습이 소설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제목이 [인생]인데, 예전에 나온 책은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다고 한다. 중국어 제목이 '활착(活着)'이니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이니 어떤 제목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는데, 이 사람의 인생에서 중국 현대사까지 겹치고 보니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중국 현대사를 비판한다기보다는 사회가 아무리 변화가 심하고 사람들을 힘들게 해도 사람들은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나 싶다.

 

푸구이. 지주의 아들. 젊은 시절까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 다른 사람 눈으로 보면 개차반인 인생이다. 술과 도박, 그리고 여자. 젊은 지주들이 빠지기 쉬운 길에 들어서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인생 전반부.

 

도박판. 결국 인생은 도박과 같다지만 아니다. 도박판은 거짓과 사기가 난무하는 현장이다. 인생은 그런 거짓과 사기를 딛고 현실에 살아가는 과정이고. 그는 전재산을 날린다. 지주에서 소작농으로 전락. 그나마 원하지 않게 군대에 끌려가는 푸구이. 국민당 군대. 얼마나 썩었는지 소설에서 국민당 군대의 중대장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중국은 아무리 비판을 하더라도 국민당에 의해 유지될 수는 없는 법. 푸구이는 공산당에 포로가 되지만 그들은 자유의사를 존중해 준다.

 

여기서 위화가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에게 중국은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부패한 국민당 치하의 중국은 아니다. 장점이 많았던 공산당.

 

'은혜 갚는 건 포기하자. 대신 해방군이 잘해준 건 절대 잊지 않기로 하자.' (105쪽)

 

이 문장에 현대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난봉꾼에서 착실한 농군으로 돌아온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삶.

 

마냥 평범한 삶이 지속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세상일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고난을 겪게 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문화대혁명. 사람들을 비껴가지 않는다. 푸구이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고 겪게 되는 문화대혁명의 모습은 중국 사회주의가 어떻게 변질되어가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당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실행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사람들 삶의 행복은 거대한 목표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소소한 일상에서 나온다. 푸구이의 삶은 그것이다. 비록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지만 가족이 함께 살아단다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이런 행복이 끝까지 유지되면 좋겠지만, 어디 인생이 그러한가?

 

푸구이는 가족들을 모두 자신보다 먼저 떠나보낸다. 그리고 늙은 소와 함께 늙어간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듯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듯이.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는 말이 있다. 어떻게 될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되기도 하는 그런 삶들.

 

사람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길흉화복을 겪게 되겠는가. 그 어느 것도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잘나간다고 마냥 우쭐해서도 안 되고, 지금 힘들다고 좌절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도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푸구이 노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위화 특유의 경쾌한 문체, 빠른 전개로 한 노인의 인생이, 한 가족의 삶들이 소설 한 편에 실려 있다. 극심한 슬픔을 동반하는 장면에서도 해학을 잃지 않는 그의 소설 전개는 이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든다. 그리고 비관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겨내는 등장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라는 듯이. 그래 우리네 인생에는 이렇들 모든 것이 들어 있지. 어느 하나만으로 우리 인생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지. 우리 인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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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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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그냥 마음이 끌리는 시인이 있다. 그런 시들이 있다. 폴란드라는 낯설고 먼 나라 시인인 쉼보르스카가 내게는 그런 시인이다.

 

이상하게 어려운 말이 없는데도, 언어 뒤편에 있는 어떤 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느낌.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읽으며 환타지로 알려진 소설들이 떠올랐다.

 

나니아 연대기, 해리포터 시리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들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출입구는 옷장, 기차역의 기둥, 토끼굴과 같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들이다.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존재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작가들이다. 작가들은 우리 일상생활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준다. 굳이 난해한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써서 도대체 다른 세계로 들어갈 문은 보여주지만 열쇠는 주지 않는 그런 작가들이 아니라, 그냥 우리 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가들.

 

쉼보르스카를 그런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 시집에서 '손'이라는 시... 그냥 물리적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똑같은 구성 요소.

'스물일곱의 뼈, / 서른 다섯 개의 근육, / 약 2천 개의 신경세포들.'('손'의 부분. 82쪽)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손들은 '『나의 투쟁』이나 『곰돌이 푸의 오두막』을 집필'('손'부분. 82쪽)할 수 있는 손이다.

 

우리에게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쓰는 손이나 사람들을 파괴로 이끄는 글을 쓰는 손이나 같은 손. 그 손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 어떻게 쓰게 해야 하느냐를 생각하게 하는 시다.

 

이렇게 우리가 늘 접하는 것에서 다른 면을 보도록 한다. '암살자들(39쪽)'이라는 시들을 보면 테러리스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악한이라고 우리하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나와 다른 존재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시인. 그 세계가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옷장이나, 기둥이나 굴처럼 우리가 늘상 만나는 것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쉼보르스카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끌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슬'이라는 시를 보면 더 그렇다.

 

사슬

 

무더운 여름날, 개집, 그리고 사슬에 묶인 개 한 마리.

불과 몇 발자국 건너,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가 놓여 있다.

하지만 사슬이 너무 짧아 도저히 닿질 못한다.

이 그림에 한 가지 항목을 덧붙여보자.

훤씬 더 길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우리의 사슬,

덕분에 우리는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칠 수 있다.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1판 4쇄.75쪽.

 

우리 역시 사슬에 매여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나가야 할 때, 싫지만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야 할 때 등등 우리 역시 사슬에 묶여 산다. 다만, 개들처럼 짧게 묶여 있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슬이 없는 양 행동할 때가 많다. 그 사슬을 인식하는 계기가 찾아오기 전에는 사슬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치면서. 그렇지만 시인은 우리에게도 사슬이 있다고 말한다.

 

가끔 그 사슬을 인식하고 넘어서려고 할 때 그때서야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로 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삶 자체가 분명 어떤 사슬에 매여 있는데, 그 사슬이 눈에 잘 띄지 않고 또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충분히 길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존재함을 이 사슬이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무한하지 않음을 이 사슬이 또한 알려주기에, 삶을 살아갈 때 그때그때에 충실한 삶.

 

그런 삶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 뒤에 숨어 있는 세계도 볼 수 있는 그럼 삶을 산다면, 우리도 내 삶은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게 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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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이웃
양혜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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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용이 어둡다. 현실에서 약한 사람들은 이렇게 어두침침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잠깐 희망의 빛이 비추는 듯하다가도 다시 어둠이 짙게 깔리는 그런 삶이라니...

 

약한 존재끼리 서로 도우며 서로 기대며 살면 좋으련만, 약한 존재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이 있고, 같이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상대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이 소설집에는 다수의 약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소수자라고 해도 좋다. 소수자지만 이 세상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자다. 이들은 힘이 없어서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로부터 억압당하거나 배척당하는 삶을 산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희망을 보여주는 소설을 원하지만 소설은 결코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우리 사회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약한 사람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둡다. 무언가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자꾸 이래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내용이 이리도 어두운데, 작가는 희망을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래, 현실을 보여주고 그 현실에서도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 몇몇 소설에서 약자들이 자신을 가해한 사람에게 돌려주는 폭력이 그것을 의미한다면, 결코 이들은 약하지만 그대로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면 소설집 뒤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이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소설 중에 '오버 더 레인보우, 구두, 고요한 이웃, 요나'가 그렇다. 소수자에 해당하는 삶을 살지만 이들은 그냥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는 아니다. 물론 폭력이 해결책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을 지탱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몸부림도 없다면 그것은 더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일이다.

 

작가의 말이 그래서 마음에 다가온다.

 

내가 쓰는 소설은 오색찬란한 드레스를 걸치고 화려하게 치장한 예쁜 인형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해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인형이 겹겹이 들어 있는 '마트료시카'에 가깝다. 그 사람들은 조금도 요란하지 않다. 너무 작은 그들의 목소리는 몸을 굽히고 귀를 바짝 대야만 들을 수 있다. 힘센 사람들은 어디서든 할 말 다 하고 하지 않은 일을 부풀려 표현하기도 하지만 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겪은 일마저 말 못 하고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자신보다 작은 사람을 품으려 애쓴다. 온몸으로 사람이 사람을 품고 안는 세상. 나는 그것이 '소설'이고,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라 생각한다.  (262-263쪽)

 

그래서 어둠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를 그리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그들이 그냥 죽어지내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소수자임에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를 응징하거나(오버 더 레인보우, 구두),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에게 반항하게 된다.(고요한 이웃, 요나)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그런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는 소설도 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살려고 애쓰는 존재에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붉은 머리 리카온에 대한 그 감정은 결국 우리 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다. 세상 살아가기에 보통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아무리 힘들게 돈을 벌어도 빚이 줄지 않는 상황이거나, 간신히 자신의 삶을 유지해나가는 상황이기 쉽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세상이 잔혹하지만, 환대가 멀어진 세상이라지만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환대가 있어야 한다. 환대가 불가능한 세상은 서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환대가 사라진 세상이지만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반항, 그들이 폭력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포기가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들이 폭력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 폭력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음이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렇게 폭력으로 치닫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음울한 세계는 우리가 현실에서 맞이하는 세상이면 안 된다. 그런 세상, 어둠 속, 약한 존재, 소수자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생각하도록 소설은 만들고 있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고맙게 잘 읽었다. 어두운 삶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을 환대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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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화와 기억 - 일제 말 친일 협력 문학의 재해석
김재용 지음 / 소명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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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 그렇게 우리나라는 일제에 대항하여 비폭력 만세 운동을 벌였다. 무장투쟁이든 비무장투쟁이든 일제에 반대한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지닐 수 있는데, 3.1운동은 전국민적, 전국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3.1운동으로 인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적통을 이어받아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나라 헌법에는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전문(前文)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친일문학 또는 반민족친일행위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논란이 많아진다. 도대체 친일이 무엇이냐? 당시에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일제시대에 살았다는 것, 총을 들고 무장투쟁을 하거나 또는 눈에 띠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 모두 친일을 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 늘 뒤따른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친일을 한 것까지 응징해야 하느냐는 반론도 있고... 그렇게 많은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해방이 되고 나서 바로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위 친일파들을 안고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사회를 주도하게 하지 않았던가 반성하게 된다.
 
친일파들을 안고 가기 위해서는 먼저 친일파들의 통렬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 반성을 한 뒤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때 그 다음에야 그들을 안고 가는데, 이런 과정 없이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친일파들은 별다른 처벌 없이 우리 사회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잡고 만다.
 
그 다음부터 친일에 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 학교 도서관에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하도록 하는 것도 좌파들의 책동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니, 도대체 이 나라에서 친일을 했다는 것은 그것도 주도적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은 힘있는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자손들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는 얘기와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친일문학에 대해서 정리한 책이다.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이들은 자연스레 친일로 흘러들어간다. 자기 신념을 가지고. 이들에게 친일은 신념이다. 살기 위해서 한 어쩔 수 없는 행위가 아니다. 그냥 그 시대에 자기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가 친일이다. 친일이라는 말로 부족하다. 이 책에서는 그 단어를 '내선일체'로 본다. 
 
일본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념. 그 신념을 도처에 표시한 인물들. 네 사람을 든다. 이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광수다. 그러나 이광수 못지 않게 중요한 사람은 유진오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해방 후 우리 사회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니... 장혁주와 최재서.
 
이광수야 조선 3대 천재로 인정받으면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선생님으로 통했던 사람이니... 근대문학을 확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이기도 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 발간에도 참여한 사람. 안창호를 따르던 그런 사람. 그러나 나중에 창씨개명을 하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한 사람. 해방이 되고 나서도 본인은 조선을 위해서, 조선인을 위해서 친일을 했다고 강변했다는 사람.
 
벌을 받기 위해 강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념이 그러했다는 것을 이 책에서 알 수 있다. 그는 곳곳에서 이런 자신의 신념을 내비친다. 
 
저자는 친일 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다시 두 가지로 세분한다. 즉 친일의 양상이 네 가지가 있는 셈이다.
 
동화형 친일과 혼재형 친일... 동화형은 다시 문화와 혈통으로, 혼재형은 종족이냐 지역이냐로 나뉘는데... 문화적 동화형은 이광수, 혈통형 동화형은 장혁주, 종족형 혼재형은 유진오, 지역형 혼재형은 최재서로 대표된다고 한다. 
 
동화형이야 일본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혼재형은 조선의 특성은 지키되 일본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니, 조금 다르다고 해도 일본에 종속된다는 점에서는 친일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동화형 중에서도 문화적 동화를 주장하는 이광수는 일본문화에 조선문화를 동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일본이 동양정신의 정수를 계승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본문화로 동화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동양정신을 구현하고 서양에 맞설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혈통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혼재형 친일 중에서 유진오는 종족을 앞세운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더라도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각자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융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 논리는 어쩌면 유럽통합의 논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독립국들이 연합하는 것과 식민지가 식민본국과 융합한다는 논리는 완전히 다르다.
 
식민지는 어쩔 수 없이 식민본국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탄압을 받으니. 이런 상태에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 식민본국과 하나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식민본국 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고, 식민정책은 강압이든 비강압이든 그런 쪽으로 정책이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떤 말을 해도 친일을 한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그것도 자신들의 내재적인 논리에 의해서 친일로 나아갔으니... 앞에서 왜 유진오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냐면 유진오는 우리나라 제헌헌법을 기초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가 문학에서 손을 떼고 법에 전념했다고 하지만, 친일을 그렇게 주장했던 사람이 해방이 되고 나서 우리나라 헌법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친일청산이 멀어진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네 가지 유형의 친일이 나오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내선일체' 그리고 '황국신민화'에 이은 '대동아공영'이라는 말로 압축이 된다고 한다.
 
다 일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조선의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다. 일본적인 것, 천황으로 귀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들 주장이 닿는 끝지점이다. 그러니 친일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친일은 서서히 풍화되어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사라져서는 안 된다. 친일은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 문인들의 친일행위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논리를 따라서 적극적으로 행한 행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친일행위를, 친일행위자를 기억해야만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기 때문이다.
 
덧글
 
읽다가 소소한 오타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거야 문장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이 문장에 나오는 인물 이름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둘 다 실제 인물이고 우리 문학사에서 언급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235쪽. 혼재형 친일 협력의 대표적인 문인인 유진오와 최서해는... 이라고 되어 있는데... 최서해가 아니라 최재서다. 이건 꼭 고쳐야 한다. 
 
최서해 : 본명 최학송. '탈출기, 홍염,기아와 살육'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1932년 사망. 이 책은 1938년 이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최서해가 나오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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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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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01-12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실, 학자이자 교수가 쓴 최근 인문서에서 그 저자가 인용한 학자 성명이 잘못된 걸 보고 눈을 의심했어요. 그럼 인용할 수도 없죠....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는데 정작 이름을 잘못알고 언급하다니

2019-01-14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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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씨는 진짜 사랑입니다
엘리자베스 버그 지음, 박미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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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새해엔 따스함이 넘쳤으면 좋겠다. 그래 새해 시작을 하는데 온기가 넘치는 글로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책에는 늘 온기가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이다. 마음이 따스해지는 소설.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아니 생각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85세 된 노인. 세상을 살 만큼 산 사람이다. 부인이 얼마 전에 죽었다. 무덤에 간다. 늘. 함께 점심을 먹으러. 그들이 함께 살아온 과정에 대해서는 소설에서 간간이 나온다.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며 서로에게 맞장구 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먼저 간 부인. 단지 먼저 가 있을 뿐이다.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을 뿐. 이편과 저편이 완전히 갈라져 있을 것 같지만 그냥 고개 한번 돌리면 된다. 그렇게 늘 곁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 속에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인 이름은 놀라. 할아버지 이름은 아서.

 

무덤가에 오는 소녀가 한 명 있다. 소녀가 무덤가에 온다는 것, 노인이 오는 것과 참 거리가 멀다. 무덤가는 무언가를 마친 사람들이 쉬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들어 있는 무덤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는 소녀. 매디.

 

하지만 무덤가에 찾아오는 소녀에게 무슨 문제가 없을 수가 없다. 어릴 적 엄마를 잃은 매디. 아빠와는 소원한 관계다. 아마도 아빠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나 보다. 여기서 매디의 아빠와 아서의 차이가 드러난다.

 

아서는 아내를 잃었어도 아내를 간직한다. 아내와 함께 한다. 하지만 매디의 아빠는 아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다. 아내의 분신인 딸에게 사랑을 쏟을 수 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기 슬픔에 갇혀 있다. 그러니 매디 역시 겉돌 수밖에 없다.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남자친구에게도 차이고, 아이는 뱃속에 있고. 힘들게 살아갈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매디는 제대로 인생을 살고자 한다. 왜? 그녀에겐 그를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교사도 그렇고, 무덤가에서 만난 아서도 그렇다. 아서의 집에서 살게 되는 매디. 여기에 이웃집 할머니인 루실도 함께 살게 된다.

 

자, 가족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핏줄로만 연결된 것이 가족인가. 아니다.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때로는 갈등도 겪지만 함께 살아간다.

 

세대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지내게 되는 것.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힘께 지내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이런 사랑으로 묶여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가족이다. 매디는 가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아서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도 딸이 생긴 것이고, 이웃집 할머니 루실에게도 딸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찾고 함께 만들어가는 모습이 소설 속에 나타난다. 따스하게 서로를 보듬어 준다. 무덤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아서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남에게 내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내어주기, 내것만을 강요하지 않기, 다름을 인정하기, 그리고 함께 살아가기. 매디는 슬픔을 서서히 극복해 가고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간다. 이제는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십대 소녀가 팔십대 노인들을 만나 가족을 이루고 사랑을 깨달아가며 스스로 살아가게 되는, 그녀가 나은 딸이 '놀라'가 된다. 아서의 아내. 그리고 아서와 놀라는 아마도 하늘에서 별이 되어 매디와 놀라를 내려다 보고 있겠지.

 

이승에서의 헤어짐이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는 것. 언제든 무덤가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 굳이 무덤가가 아니더라도 마음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소설 속에서 핏줄로 엮인 가족이 아니라 이해와 배려,사랑으로 묶인 가족. 그렇다. 그렇게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 내어줌으로써 받아들이는 사랑, 그런 사랑을 아서가 보여주고 있다. 그런 사랑은 넘치고 넘쳐서 다른 존재들의 마음을 적시게 된다.

 

새해에 이런 아서와 같은 사랑이 넘치는 그런 관계들... 그런 관계가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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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1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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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1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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