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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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그냥 마음이 끌리는 시인이 있다. 그런 시들이 있다. 폴란드라는 낯설고 먼 나라 시인인 쉼보르스카가 내게는 그런 시인이다.

 

이상하게 어려운 말이 없는데도, 언어 뒤편에 있는 어떤 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느낌.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읽으며 환타지로 알려진 소설들이 떠올랐다.

 

나니아 연대기, 해리포터 시리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들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출입구는 옷장, 기차역의 기둥, 토끼굴과 같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들이다.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존재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작가들이다. 작가들은 우리 일상생활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준다. 굳이 난해한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써서 도대체 다른 세계로 들어갈 문은 보여주지만 열쇠는 주지 않는 그런 작가들이 아니라, 그냥 우리 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가들.

 

쉼보르스카를 그런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 시집에서 '손'이라는 시... 그냥 물리적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똑같은 구성 요소.

'스물일곱의 뼈, / 서른 다섯 개의 근육, / 약 2천 개의 신경세포들.'('손'의 부분. 82쪽)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손들은 '『나의 투쟁』이나 『곰돌이 푸의 오두막』을 집필'('손'부분. 82쪽)할 수 있는 손이다.

 

우리에게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쓰는 손이나 사람들을 파괴로 이끄는 글을 쓰는 손이나 같은 손. 그 손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 어떻게 쓰게 해야 하느냐를 생각하게 하는 시다.

 

이렇게 우리가 늘 접하는 것에서 다른 면을 보도록 한다. '암살자들(39쪽)'이라는 시들을 보면 테러리스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악한이라고 우리하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나와 다른 존재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시인. 그 세계가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옷장이나, 기둥이나 굴처럼 우리가 늘상 만나는 것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쉼보르스카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끌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슬'이라는 시를 보면 더 그렇다.

 

사슬

 

무더운 여름날, 개집, 그리고 사슬에 묶인 개 한 마리.

불과 몇 발자국 건너,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가 놓여 있다.

하지만 사슬이 너무 짧아 도저히 닿질 못한다.

이 그림에 한 가지 항목을 덧붙여보자.

훤씬 더 길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우리의 사슬,

덕분에 우리는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칠 수 있다.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1판 4쇄.75쪽.

 

우리 역시 사슬에 매여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나가야 할 때, 싫지만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야 할 때 등등 우리 역시 사슬에 묶여 산다. 다만, 개들처럼 짧게 묶여 있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슬이 없는 양 행동할 때가 많다. 그 사슬을 인식하는 계기가 찾아오기 전에는 사슬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치면서. 그렇지만 시인은 우리에게도 사슬이 있다고 말한다.

 

가끔 그 사슬을 인식하고 넘어서려고 할 때 그때서야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로 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삶 자체가 분명 어떤 사슬에 매여 있는데, 그 사슬이 눈에 잘 띄지 않고 또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충분히 길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존재함을 이 사슬이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무한하지 않음을 이 사슬이 또한 알려주기에, 삶을 살아갈 때 그때그때에 충실한 삶.

 

그런 삶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 뒤에 숨어 있는 세계도 볼 수 있는 그럼 삶을 산다면, 우리도 내 삶은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게 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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