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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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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왜 파괴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소설은 파괴된 세상에서 시작된다. 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정착할 수가 없다. 머묾은 곧 죽음이다. 그러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어디론가 끝없이 가야만 한다. 길 위에 있어야만 한다. 종착지는 없다. 목표하는 곳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다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매카시 소설은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과정만 보여준다. 아니다.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희망도 잃지 않는다. 적어도 길을 가고는 있으니까. 어떤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으니까.


파괴된 세상, 세상은 온통 잿빛이다. 그리고 추위다. 이 추위는 물리적인 추위만이 아니다. 사람들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추위다. 동토의 왕국이다. 세상만이 아니라 사람들 관계도.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의 가족만을 믿을 뿐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연상시키는 소설인데... 재난을 당했을 때 재난 속에서 구현되는 인류애를 상상하면서 소설을 읽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 소설은 재난 민주주의는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살인, 약탈만이 등장한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우리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때 우리가 보여주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은 최소한 인류애를 지니고 있다. 소설 속에서 아빠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빠에게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목표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적이다. 쫓아내거나 또는 자신이 도망쳐야 할 적.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제외한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서? 살아남지 못한다. 아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남자로 서술되던 이야기는 이제 소년의 이야기로 서술된다.


소년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여전히 소년은 길 위에 있지만, 이제 소년의 여행은 끝났다. 소년은 파괴된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 소설은 짧은 문장들도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딱딱 끊어지는 듯한 문장들. 세상은 이렇게 단절되어 있다는 듯이 문장들 역시 단절된다. 그러면서 계속 나아간다. 길 위에서 계속 걸을 수밖에 없듯이 소설은 그렇게 계속 우리를 앞으로 이끈다.


그렇게 소설은 나아가는데, 파괴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를 고민하게 하기 보다는, 재난 속에서 인간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잿빛 세상에서, 차가운 인간 관계에서, 소년은 불을 운반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 아빠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불, 밝음과 따뜻함이다. 세상을 다시 밝힐 수 있는 존재다. 그 존재를 가슴에 품고 있는 소년.


그렇게 소설은 소년으로 끝난다. 아빠로 대변되는 과거 재난에 대응하는 세상은 끝났다. 이제는 새로운 대응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년이 계속 가야 할 길이다. 이번에는 홀로가 아니라, 남들을 적으로만 여기고서가 아니라 함께 가는 길.


이제 소년이 가는 길은 과거의 길과는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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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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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나라 윤리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싫은 작품이리라. 청소년, 겨우 15살 남자아이와 동침하는 여자. 우리나라 법에 의하면 이는 성폭행에 해당한다. 제자와 성관계를 맺어 물의를 일으킨 교사들 이야기가 방송에 오르내린 적이 있으니... 비록 소설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는 아니지만 이미 30이 넘은 여자와 15살 소년의 관계라니...


책 읽어주는 남자... 남자는 책을 읽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 행동을 한다. 여자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 하지만 그가 성착취를 당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여자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고 느낀다. 


이렇게 사랑 소설로 읽어도 되지만, 소설은 나치즘이라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글을 읽는다는 행위와 전쟁 범죄. 이 소설 끝부분에 가면 읽는다는 행위보다는 쓴다는 행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읽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이해하는 행위라면, 쓰는 행위는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알리는 행위다. 그러니 쓸 수 없음은 자기를 내세우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나가 자꾸 직장을 바꾸게 되는 이유도 바로 문맹에 있다.


읽고 쓰지 못하기 때문에 승진을 시켜준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문맹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즉 자신은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힘든 존재임을 남들에게 알리기 싫었으므로.


그러므로 한나가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인이 되는 과정도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에게 주어진 일일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을 가두었던 교회가 불탔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이유도 그들에게는(한나를 비롯한 여성 감시인들)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은 그런 권리를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권리를 행사할 수도 없었다.


읽기 쓰기라는 문제를 떠나 소설을 세대 간 차이로 읽어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문맹은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갖추었느냐 아니냐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로 대표되는 읽고 쓰지 못하는 세대, 그 세대를 나치즘을 지지한 독일의 윗세대라고 하면 처음에는 윗세대를 따를 수밖에 없는 어린 세대의 모습을 한나와 처음 만나 관계를 맺는 나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소설의 1부다.


그러나 이들 세대는 곧 대등한 관계가 된다. 나치즘이 몰락했다. 한나는 죄수로 재판정에 선다. 한나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를 재판에 세웠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철저한 반성과 그 반성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독일이 그랬던가? 그 과정이 그리 철저하지 않았음을, 소설에서는 한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또다른 여성간수들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이 소설의 2부다.


죄를 뒤집어 쓰고 종신형을 받은 한나. 죗값을 치르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어린 세대들이 이젠 중심 세대가 되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기성 세대가 되어야 한다. 한나는 교도소로 찾아온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소설은 세대의 위치가 완전히 바뀐 3부가 된다.


"꼬마야 너 무척 컸구나." (207쪽)


이 말을 통해서 한나에게 사랑스러운 어린이였던 나는 이제는 한나를 보살필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른이 되었다는 말은 무엇일까?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하는 것, 아니다. 과거를 받아들여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어른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한나와의 과거에만 매여 있을 뿐이다. 겉으로는 한나를 받아들이고 그를 살아가게 해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시혜에 불과하다. 시혜는 동등한 인정이 아니다. 시혜로는 수치를 감쌀 수 없다. 


소설 속 내가 한나를 동등한 존재로 대했다면 읽고 쓰기를 배운 한나에게 읽기를 녹음한 테이프만을 보내서는 안 되었다. 쓰고 읽을 수 있게 된 한나에게 편지를 써야 했다. 그것이 동등한 존재로 한나를 인정하는 모습이고, 한나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읽고 쓸 수 있게 된 한나는 이제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을텐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냥 늙어버린 한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결국 한나는 석방이 되는 날 자살하고 만다.


우리가 비판하던 기성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포용하고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마지막 부분에서 소설 속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232쪽)


현재에서 이전의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전의 것이 이전에만 머무르지 않게 하고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오게 한다면,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문맹, 이는 사회를 제대로 읽지 못한 행위일 수 있다. 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용서받아야만 한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 행위에 대해서 알게 해야 하고, 깨달았을 때 그 잘못을 딛고 어떻게 함께 가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사랑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보다 훨씬 울림이 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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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해의 어부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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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귄의 소설을 읽으면 질문을 하게 된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 과학기술로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소설에서는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발생한 일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소설을 통해서 과학이 응답을 하기 시작한다.


과학이 응답을 하고, 소설은 그것에서 더 나아가 또 다른 질문을 하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인류는 더 발전된 과학기술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공상이라고, 상상이라고 치부하는 소설이 오히려 과학 발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데도 우리는 수업 시간에, 또는 자습시간에 소설을 읽는다고 공부 안한다고 구박을 했었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구박한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 하면서.


르귄 소설집 [내해의 어부]를 읽으면서 많은 질문을 던진다. 윤리와 관련된 질문도 있고, 과학과 관련된 질문, 또 사회와 관련된 질문을 하게 된다. 르귄 소설 장점이 바로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고, 그 질문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데 있다.


많은 소설들에서 질문을 찾을 수 있지만, 이 소설집에는 비슷한 대상을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소설이 있다. 바로 처튼 기술이라는 현재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영화에서는 가끔 나온 순간이동기술을 다룬 소설.


‘쇼비 이야기, 가남에 맞춰 춤추기, 또 다른 이야기 혹은 내해의 어부’라는 소설이 바로 이 ‘처튼 기술’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순간이동,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시간은 단 몇 초.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드로메다까지 가는데 빛의 속도로 약 200만 광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 처튼 기술을 이용하면 몇 초 만에 안드로메다에 있는 별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온전한 상태로.


이게 가능할까? 지금 기술로 화성까지 가는데도 10개월 이상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 기술이 있으면 우주 어느 공간에도 갈 수가 있다. 그런데 부작용이 없을까? 소설은 이 점에 주목한다. ‘쇼비 이야기’에서는 처튼 기술로 순간 이동에는 성공하지만 10명의 승무원들이 각자 환상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순간적으로 공간은 바뀌었지만, 그 공간에 대한 인식은 전무한 상황.


우리가 모르는 공간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갔을 때 그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은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진실일까? 누가 진실한 경험을 했을까? 답은 모두가 진실한 경험을 했을 수도 또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다.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생각의 틀이 자기 경험을 유도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도 없이 순식간에 낯선 공간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전체를 보려면, 아니 그 낯선 공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조각들을 맞춰야 한다. 각자가 보고 있는 사실들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진실의 조각을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쇼비 이야기’에서 승무원들이 살아남아 다시 그들이 떠난 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데에는 바로 이런 노력이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쇼비 이야기’에서 승무원으로 등장했던 인물을 통해 ‘가남에 맞춰 춤추기’라는 소설에 등장해서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고 독선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한번 처튼 기술을 경험했던 사람, 불확실성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과 자신만만하게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고 그대로만 행동하는 사람을 등장시켜 어떤 사람이 살아남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댈줄이라는 인물, 자신만만하게 행동하지만 그는 가남에서 희생된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자신만의 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들 처지에서 해석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지닌 틀로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 결과는 비극이다.


낯선 곳, 낯선 시간,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흔히 바로 자신의 틀을 지니고 그 틀에 다른 존재들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실수가 자신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도.


이렇게 소설은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충분한 준비가 필요할 텐데, 우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행을 할 때는 어느 정도 준비를 하게 된다. 그래서 치명적인 실수를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실수를 안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준비해도 자신이 지닌 틀을 바꾸지 않고 고수하는 사람들은 있다. 이들이 다른 문명, 다른 존재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는 인류 역사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 남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청난 해악을 끼쳤는지도)


순간이동이 과연 바람직할까? 낯선 장소에서 낯선 이들을 만날 때 과연 시간-공간을 없애는 이동이 바람직한 만남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낯선 존재와의 만남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으로 연결이 된다.


여기에 ‘또 다른 이야기 혹은 내해의 어부’는 순간이동과 더불어서 과연 타임머신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까지 하게 한다. 나는 두 곳 이상의 공간에 두 곳 이상의 시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만약 존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소설에는 처튼 기술을 발전시키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 잘못 작동하여 18년(다른 곳은 10년 전- 르귄 소설은 여러 인물들이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전으로 돌아간 ‘히데오’를 통해 과연 타임머신은 가능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처튼 기술로 과거로 돌아간 히데오. 처튼 기술이 개발되기 전으로 돌아갔기에 그는 미래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상하다. 처튼 기술은 동시간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기술인데, 여기에 주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시간의 이동까지도 가능해지게 했다.


그렇다면 나는 여러 장소에 여러 시간에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18년 전으로 돌아간 히데오는 자신이 고향을 방문했던 때를 불안감에 휩싸여 맞이하는데,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과연 히데오가 나타날까?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몇 년을 과거에서 살아온 히데오와 현재까지 주욱 살아온 히데오, 이 둘은 만날 수 있을까? 소설에서 만남은 보여주지 않는다.


보여줄 수 없다. 영화에서 타임머신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르귄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어찌할 것인가? 시공간에 주름을 잡고, 그 주름이 겹친다면? 소설은 이를 여울이 비유하고 있는데, 물은 물이되, 여러 갈래로 바위에 부딪히는 물결들, 여울들. 나는 누구인가? 이 소설을 읽으면 과연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소설이다. 질문을 하게 하는 소설이니. 네루다가 쓴 시집 제목이 ‘질문의 책’이었는데, 르귄 소설 역시 질문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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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생일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5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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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르귄 소설을 천천히 읽는다. 일부러. 천천히. 그래서 내용을 여러모로 생각해 본다. 이건 없는 세상이다. 없는 세상인데, 이상하게도 있는 세상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왔던 세상, 감히 말로 꺼내지 못했던 세상과 사람들이 르귄 소설에 등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르귄은 소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들어냈다. 소설가가 신이 되는 순간인데, 소설 속에서 르귄은 신을 부정한다. 이 책 제목이 된 '세상의 생일'이란 소설을 봐도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또는 신이란 무엇인가 아니면 우리는 신을 어떤 존재로 믿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신이 존재하고, 신은 계승이 되지만, 이 신은 홀로가 아닌 둘이 하나가 된 신이다. 혼자서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소설 속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미래를 볼 수는 있지만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 또한 사람들은 신은 믿지만 어떠한 신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이라고 선언한 존재를 믿는다. 여러 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상은 갈등이 일어난다. 


갈등 없는 세상이 천국일까? 아니다. 그 점을 이 소설집에 실린 '잃어버린 천국들'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우주선에서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우주선에서 영원히 나아가는 일을 추구하려는 천사들이라고 불리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에게 갈등이 없는 우주선은 천국이다. 


그런데 왜 이들이 '발견'이라는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게 되었는가? 지구와 비슷한 행성에 정착하기 위해서다. 모험을 위해서다. 모험은 갈등을 수반하고, 갈등은 또한 죽음까지도 불러온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화가 없는, 갈등이 전혀 없는 우주선을 뒤로 하고 또다른 행성에 정착하기도 결정하기도 한다.


이들은 갈등없는 천국을 원하지 않는다. 비록 갈등이 있더라도 자신이 부딪쳐 살아가는 세상을 원한다. 


그렇다면 어떤 갈등이 일어날까? 세상에는 수많은 갈등이 있고, 어떤 갈등은 해결의 조짐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으로 안해 너무도 많은 고통을 받기도 한다. 다만, 이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이 갈등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리 인간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 중 몇 편은 다른 결혼 생활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녀만으로 결합되는 결혼이 아닌,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이 결합하는 네 쌍의 결합된 가족이 이루는 결혼 생활도 보여준다. 


또한 남자로 태어난 고통을 반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애트우드가 쓴 "시녀들'에서 여성들이 애 낳는 기계로 전락하듯이, '세그리의 사정'이라는 소설에서는 남자들이 애낳는 기계나 싸우는 기계로 전락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런 세상이 과연 행복할까? 아니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의 상황이 바뀐 세상 역시 행복할 수가 없다. 르귄은 이렇게 소설을 통해서 함께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소설에도 나온 '옛음악'이라는 사람을 통해 혁명이, 해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도 보여주고 있는데, '옛음악과 여자 노예들'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혁명이란 내가 춤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개인이 행복하지 않은 혁명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다. '옛음악과 여자 노예들'을 읽으면서 진정한 혁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도 생각하게 되고.


한 편 한 편을 읽으면서 (총8편이 소설이 실려 있다) 지금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우리 세상에는 없는 세상을 경험한다. 없는 세상을 있는 세상으로 만나면서 유토피아를 생각한다. 르귄은 이런 유토피아를 통해 우리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즉, 소설을 통해서 다른 세상을 경험하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역시 르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제 르귄이 쓴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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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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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배경은 현실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소설은 개연성, 현실성을 띠기 때문에, 그 소설이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분명 현실성을 띠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설 배경은 바로 우리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즉, 소설에 나타나는 현실은 이곳이 아닌 그곳이지만, 우리는 그곳을 통해서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생각하게 된다. 이곳의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소설은 늘 이곳을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


전성태 소설 역시 그렇다. [늑대]라는 제목을 단 이 소설집은 총 10편의 단편소설이 묶여 있다. 연결되는 소설은 없다고 봐야 하지만 (등장인물이 겹치는, 하지만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과 만나게 되는 인물로 나오는 목란식당의 종업원이 등장하는 소설, '목란식당'과 '남방식물'이 있기는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 즉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 배경이 우리나라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과 유사하더라도, 소설 속 배경은 이곳이 아닌 그곳일 수밖에 없고, 그곳을 통해서 우리는 이곳을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배경은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몽고다. '목란식당, 늑대, 남방식물, 코리안 솔져, 두번째 왈츠, 중국산 폭죽'은 모두 몽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뒤처져 있는 나라 몽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몽고라는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또는 아직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한 나라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라볼 수 있는데... 어쩌면 이 소설들을 통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다른 존재들을 바라볼 때 지니고 있는 색안경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코리안 솔져'에서는 몽고에 가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다시 시를 쓰려고 생각했던 인물이 몽고 사람들에게 당하고, 열쇠를 집 안에 두고 문이 잠기게 되는 상황에 처하는 상황이 펼쳐지는데... '적어도 한국에서 군인이 시인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124쪽)는 표현을 통해 그곳에서 겪은 일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군사문화에 젖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니...


전혀 군사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법하지 않은 상황, 그런 인물에게서 군대를 마친 경험으로 위기 상황에 대처해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니...


두번째 배경은 북한이다. 물론 북한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한 편밖에 없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 제목만으로 탈북을 생각하고, 북한의 살기 힘든 현실을 떠올리게 되는데, 소설 속에서는 북한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북한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몽고가 배경이긴 하지만 북한을 기조로 깔고 있는 소설이 '목란식당'이고 이들이 몽고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한때 운동권이었다고 추측되는 인물들과 보수 종교 단체들, 또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을 등장시켜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북한을 대하는 또는 북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한 소설들이다.


세번째 배경은 당연히 우리나라다. 우리나라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배경으로 지니고 있는 소설들. '누가 내 구두 못 봤소?,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 이미테이션'


어쩌면 전성태 특유의 해학이 담겨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슬픈 상황인데도 웃음이 비어져 나오게 하는 그런 소설들. 


이렇듯 배경은 다양하지만 소설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 소설들은 단도적입적으로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소설을 통해서 보여줄 뿐이다. 이런 삶도 있다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우리도 한때는 이렇게 살기도 했다고.


그렇게 소설을 읽으며 이곳과는 동떨어져 있는 그곳의 삶을 읽으며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전성태 소설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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