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해의 어부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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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귄의 소설을 읽으면 질문을 하게 된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 과학기술로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소설에서는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발생한 일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소설을 통해서 과학이 응답을 하기 시작한다.


과학이 응답을 하고, 소설은 그것에서 더 나아가 또 다른 질문을 하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인류는 더 발전된 과학기술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공상이라고, 상상이라고 치부하는 소설이 오히려 과학 발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데도 우리는 수업 시간에, 또는 자습시간에 소설을 읽는다고 공부 안한다고 구박을 했었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구박한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 하면서.


르귄 소설집 [내해의 어부]를 읽으면서 많은 질문을 던진다. 윤리와 관련된 질문도 있고, 과학과 관련된 질문, 또 사회와 관련된 질문을 하게 된다. 르귄 소설 장점이 바로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고, 그 질문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데 있다.


많은 소설들에서 질문을 찾을 수 있지만, 이 소설집에는 비슷한 대상을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소설이 있다. 바로 처튼 기술이라는 현재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영화에서는 가끔 나온 순간이동기술을 다룬 소설.


‘쇼비 이야기, 가남에 맞춰 춤추기, 또 다른 이야기 혹은 내해의 어부’라는 소설이 바로 이 ‘처튼 기술’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순간이동,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시간은 단 몇 초.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드로메다까지 가는데 빛의 속도로 약 200만 광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 처튼 기술을 이용하면 몇 초 만에 안드로메다에 있는 별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온전한 상태로.


이게 가능할까? 지금 기술로 화성까지 가는데도 10개월 이상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 기술이 있으면 우주 어느 공간에도 갈 수가 있다. 그런데 부작용이 없을까? 소설은 이 점에 주목한다. ‘쇼비 이야기’에서는 처튼 기술로 순간 이동에는 성공하지만 10명의 승무원들이 각자 환상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순간적으로 공간은 바뀌었지만, 그 공간에 대한 인식은 전무한 상황.


우리가 모르는 공간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갔을 때 그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은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진실일까? 누가 진실한 경험을 했을까? 답은 모두가 진실한 경험을 했을 수도 또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다.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생각의 틀이 자기 경험을 유도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도 없이 순식간에 낯선 공간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전체를 보려면, 아니 그 낯선 공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조각들을 맞춰야 한다. 각자가 보고 있는 사실들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진실의 조각을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쇼비 이야기’에서 승무원들이 살아남아 다시 그들이 떠난 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데에는 바로 이런 노력이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쇼비 이야기’에서 승무원으로 등장했던 인물을 통해 ‘가남에 맞춰 춤추기’라는 소설에 등장해서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고 독선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한번 처튼 기술을 경험했던 사람, 불확실성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과 자신만만하게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고 그대로만 행동하는 사람을 등장시켜 어떤 사람이 살아남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댈줄이라는 인물, 자신만만하게 행동하지만 그는 가남에서 희생된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자신만의 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들 처지에서 해석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지닌 틀로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 결과는 비극이다.


낯선 곳, 낯선 시간,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흔히 바로 자신의 틀을 지니고 그 틀에 다른 존재들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실수가 자신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도.


이렇게 소설은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충분한 준비가 필요할 텐데, 우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행을 할 때는 어느 정도 준비를 하게 된다. 그래서 치명적인 실수를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실수를 안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준비해도 자신이 지닌 틀을 바꾸지 않고 고수하는 사람들은 있다. 이들이 다른 문명, 다른 존재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는 인류 역사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 남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청난 해악을 끼쳤는지도)


순간이동이 과연 바람직할까? 낯선 장소에서 낯선 이들을 만날 때 과연 시간-공간을 없애는 이동이 바람직한 만남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낯선 존재와의 만남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으로 연결이 된다.


여기에 ‘또 다른 이야기 혹은 내해의 어부’는 순간이동과 더불어서 과연 타임머신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까지 하게 한다. 나는 두 곳 이상의 공간에 두 곳 이상의 시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만약 존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소설에는 처튼 기술을 발전시키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 잘못 작동하여 18년(다른 곳은 10년 전- 르귄 소설은 여러 인물들이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전으로 돌아간 ‘히데오’를 통해 과연 타임머신은 가능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처튼 기술로 과거로 돌아간 히데오. 처튼 기술이 개발되기 전으로 돌아갔기에 그는 미래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상하다. 처튼 기술은 동시간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기술인데, 여기에 주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시간의 이동까지도 가능해지게 했다.


그렇다면 나는 여러 장소에 여러 시간에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18년 전으로 돌아간 히데오는 자신이 고향을 방문했던 때를 불안감에 휩싸여 맞이하는데,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과연 히데오가 나타날까?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몇 년을 과거에서 살아온 히데오와 현재까지 주욱 살아온 히데오, 이 둘은 만날 수 있을까? 소설에서 만남은 보여주지 않는다.


보여줄 수 없다. 영화에서 타임머신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르귄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어찌할 것인가? 시공간에 주름을 잡고, 그 주름이 겹친다면? 소설은 이를 여울이 비유하고 있는데, 물은 물이되, 여러 갈래로 바위에 부딪히는 물결들, 여울들. 나는 누구인가? 이 소설을 읽으면 과연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소설이다. 질문을 하게 하는 소설이니. 네루다가 쓴 시집 제목이 ‘질문의 책’이었는데, 르귄 소설 역시 질문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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