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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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나라 윤리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싫은 작품이리라. 청소년, 겨우 15살 남자아이와 동침하는 여자. 우리나라 법에 의하면 이는 성폭행에 해당한다. 제자와 성관계를 맺어 물의를 일으킨 교사들 이야기가 방송에 오르내린 적이 있으니... 비록 소설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는 아니지만 이미 30이 넘은 여자와 15살 소년의 관계라니...


책 읽어주는 남자... 남자는 책을 읽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 행동을 한다. 여자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 하지만 그가 성착취를 당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여자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고 느낀다. 


이렇게 사랑 소설로 읽어도 되지만, 소설은 나치즘이라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글을 읽는다는 행위와 전쟁 범죄. 이 소설 끝부분에 가면 읽는다는 행위보다는 쓴다는 행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읽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이해하는 행위라면, 쓰는 행위는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알리는 행위다. 그러니 쓸 수 없음은 자기를 내세우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나가 자꾸 직장을 바꾸게 되는 이유도 바로 문맹에 있다.


읽고 쓰지 못하기 때문에 승진을 시켜준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문맹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즉 자신은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힘든 존재임을 남들에게 알리기 싫었으므로.


그러므로 한나가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인이 되는 과정도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에게 주어진 일일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을 가두었던 교회가 불탔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이유도 그들에게는(한나를 비롯한 여성 감시인들)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은 그런 권리를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권리를 행사할 수도 없었다.


읽기 쓰기라는 문제를 떠나 소설을 세대 간 차이로 읽어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문맹은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갖추었느냐 아니냐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로 대표되는 읽고 쓰지 못하는 세대, 그 세대를 나치즘을 지지한 독일의 윗세대라고 하면 처음에는 윗세대를 따를 수밖에 없는 어린 세대의 모습을 한나와 처음 만나 관계를 맺는 나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소설의 1부다.


그러나 이들 세대는 곧 대등한 관계가 된다. 나치즘이 몰락했다. 한나는 죄수로 재판정에 선다. 한나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를 재판에 세웠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철저한 반성과 그 반성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독일이 그랬던가? 그 과정이 그리 철저하지 않았음을, 소설에서는 한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또다른 여성간수들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이 소설의 2부다.


죄를 뒤집어 쓰고 종신형을 받은 한나. 죗값을 치르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어린 세대들이 이젠 중심 세대가 되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기성 세대가 되어야 한다. 한나는 교도소로 찾아온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소설은 세대의 위치가 완전히 바뀐 3부가 된다.


"꼬마야 너 무척 컸구나." (207쪽)


이 말을 통해서 한나에게 사랑스러운 어린이였던 나는 이제는 한나를 보살필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른이 되었다는 말은 무엇일까?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하는 것, 아니다. 과거를 받아들여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어른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한나와의 과거에만 매여 있을 뿐이다. 겉으로는 한나를 받아들이고 그를 살아가게 해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시혜에 불과하다. 시혜는 동등한 인정이 아니다. 시혜로는 수치를 감쌀 수 없다. 


소설 속 내가 한나를 동등한 존재로 대했다면 읽고 쓰기를 배운 한나에게 읽기를 녹음한 테이프만을 보내서는 안 되었다. 쓰고 읽을 수 있게 된 한나에게 편지를 써야 했다. 그것이 동등한 존재로 한나를 인정하는 모습이고, 한나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읽고 쓸 수 있게 된 한나는 이제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을텐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냥 늙어버린 한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결국 한나는 석방이 되는 날 자살하고 만다.


우리가 비판하던 기성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포용하고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마지막 부분에서 소설 속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232쪽)


현재에서 이전의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전의 것이 이전에만 머무르지 않게 하고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오게 한다면,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문맹, 이는 사회를 제대로 읽지 못한 행위일 수 있다. 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용서받아야만 한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 행위에 대해서 알게 해야 하고, 깨달았을 때 그 잘못을 딛고 어떻게 함께 가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사랑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보다 훨씬 울림이 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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