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와 수다
전김해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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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화집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하지만 어떤 특정 장르로 국한시킬 수 없는 책이다. 아주 짧은 이야기들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는데, 그 짧음 속에 깊음이 담겨 있다. 짧은 말들 속에서 다른 말들을 계속 덧불일수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어린이들이 보기보다는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책을 읽고 생각을 한 사람들이 읽어야 좋다. 아니면 아무 편견없는 어린이들이 읽고 자기 생각을 그냥 풀어내도 좋고.


이야기에 이야기를, 이야기에 생각을 붙여넣을수록 더 많은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자를 좋아한다고 한다. 사자를 '지루한 쓸쓸함. 삶의 권태, 허무를 읽는다. 그래서 모든 가졌음에도 여전히 슬픈 인간의 모습을 닮아버린 사자는 내 가슴에 아련한 연민으로 남아있다. 하여, 사자를 그리는 일은 나와 세상을 안아주고 위로하는 작업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자에 더해 수다도 좋아한다고 한다. '나는 말수다 대신 글수다로 풀어낸다. 나의 머릿속에서 지글거리는 수다를 풀어내면서 '볼진의 나'를 알아간다'고.


사자와 수다.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대상들이 하나로 엮여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동물의 왕인 사자는 다른 존재와 이야기를 많이 못할 가능성이 많다.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는 그만큼 고독하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수많은 대화를 했을 수도 있다. 사자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수다를 그리워했을 수도 있다.


수다는 마음을 풀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말들. 이 말들 속에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진리가 있다. 옛날 여인들이 우물가나 빨래터에서 수다를 떨면서 진실을 뱉어내고 마음을 치유했듯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정여울이 쓴 [소리내어 읽는 즐거움] 287-289쪽에 나오는 내용이 떠올랐다. 이순신 장군이 좌수사로 취임하고 나서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 이야기할 공간을 마련해 주고, 또 자신도 그들과 어울렸다는 내용.


처음엔 어려워하던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을 편하게 대하고, 이런저런 자신들이 경험한 이야기들을 수다로 풀어냈고, 그 수다에서는 바다에 관한 내용 중에 물길에 대한 내용이 많이 있어, 그것을 귀담아 들은 이순신 장군이 작전을 펼칠 때 활용했다는 내용. 


이런 내용과 더불어 창의성을 다루고 있는 책들에서도 창의적인 생각은 진지한 회의에서보다는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더 많이 나온다는 내용도 있으니...


이렇게 수다는 유용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예전 왕들이 평복 차림을 하고 시중에 나가 백성들의 말이나 삶을 살피곤 하지 않았던가. 이만큼 수다는 그냥 버리는 말들이 아니라 새겨들어야 할 말을 담고 있다.


그러니 '사자와 수다'라는 제목,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잘 어울린다. 이 책에 있는 글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 중에서 특히 '슬픔이의 슬픔'이라는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슬픔을 멀리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슬픔 없이는 기쁨도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슬픔을 멀리하지 말고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다음에 올 존재들을 맞이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들어갈 때를 보며 숨을 고르는 큰 슬픔이 뒤로 / 겸손이, 뉘우침이와 돌이킴이, 감사함이 같은 기쁨이들도 / 종종거리며 들어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작은 슬픔이 들이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만이'들이 들어가 '큰 슬픔이'가 들어가게 되면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고 한다. 작은 슬픔이들을 받아들였을 때 오만이가 들어설 자리는 없고, 그러면 혹 큰 슬픔이가 오더라도 곧이어 올 겸손이, 뉘우침이, 돌이킴이, 감사함이들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짧은 글이지만 결코 짧지 않다. 이렇게 짧은 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깊고 깊은 면들을 깨우치게 하는 내용이 이 책에는 많다. 한 편 한 편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면, 어렵게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냥 이 책에 나온 글 한편을 가지고 수다를 떨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덧글


이 책은 선물로 받았다. 늘 책을 선물받는 일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잘 읽었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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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 동서 미스터리 북스 4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강남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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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몇 있다. 사실 추리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서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코난 도일이 쓴 홈즈 시리즈는 어릴 적에 몇 권 읽었고, 르블랑이 쓴 루팡(또는 루팽) 시리즈도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아주 어렸을 때.


그리고 거의 읽지는 않았지만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애거서 크리스티였다. 이 작가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그때까지 번역된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모두 읽은 친구가 있었고...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도 살인사건이 주를 이루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이 있어서 결론은 범인이 잡히고 만다로 끝나는, 이미 결과를 알 수 있는, 그래서 추리의 과정을 좇아가는 재미로 읽어야 하는 소설인데,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에 선뜻 손에 잡지 않았던 소설들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처음부터는 아니고,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부분부터 봤는데... 어? 결과만으로 작품을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지니게 됐다. 


  소설을 찾아 읽어봐야지 했는데, 소설과 영화는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등장인물에서 차이가 있다. 역시 소설과 영화는 장르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형상화하는 인물도 약간씩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결말은 비슷하게 끝나는데, 영화의 결말이 더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둘 다 좋았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탐정 포아로의 내적 갈등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데, 영화에서는 포아로의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난다) 


  이 소설을 읽으면(또는 영화를 보면)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정의일까? 사적인 해결은 정의가 아닐까?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일은 정의가 아닐까? 정의 실현은 오로지 법을 통해서, 재판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할까? 그렇다면 재판은 과연 정의로울까? 우리나라 사법농단도 있었으니, 재판(사법)이 곧 정의라고 말하기도 참 그런데...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학창시절에 배운 내용이 생각났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 즉 행한대로 거두리라고 하는 법. 


가해자가 손에 상해를 입혔다면 가해자에게도 똑같이 손에 상해를 입도록 하는 법. 참 원시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법이 사적으로 지나치게 가해지는 보복을 막는 효율적인 법이었다니...


그렇다면 법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피해자가 받은 피해를 양적으로 계산해서 수치화해, 그 최대점을 넘지 않도록 판결하고 집행하는 일. 그렇다면 물리적인, 겉으로 표가 나는 일이야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받은 정신적인(심리적인) 고통은 어떻게 양적으로 나타내 결정을 하지? 아니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현재의 법으로 보면 살인죄에도 다양한 법 적용이 있다. 최대치가 사형일 뿐.(사형제도를 폐지한 나라도 많고,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으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말자)


피해자는 어쩌면 사형당하지 않고 풀려나는 가해자를 보면서 법이 미약하다고,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것도 증거불충분으로 나온다면? 이때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추리소설에서 이런 점을 생각하게 되다니...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살인을 당한 사람은 예전에 아이를 유괴해 죽였지만 풀려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죽인 사람들은? 그 아이, 그 가족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에게 죄가 있는가? 당신이 탐정이라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어떤 행동이 정의에 부합하는가?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물론 탐정 포아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한다. 그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 점이 좋은 소설이다. 법은 과연 만능인가? 법대로 하면 정의는 실현되는가? 그렇다고 살인자에게 살인으로 응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목숨을 목숨으로 갚게 하는 일이 정의로운가? 그런 질문도 하게 된다.


살인에 살인으로 대응한 사람들은 무죄인가? 그들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되는가? 아니면 그들에게도 똑같이 살인죄를 적용해야 하는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찾도록 한다. 물론 작가는 포아로를 통해 자신의 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작가의 답이고, 우리에게는 우리들의 답을 찾도록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문제 제기. 질문하는 책. 이렇게 질문을 머리 속에 남기는 소설과 영화는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단순히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만 매몰되지 않고, 결말을 통해서 우리라면 어떻게 결정할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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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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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총 7편의 소설이 실렸는데, 다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고 있는 일들이 소설에 담겨 있으니..,


우선 세계적으로 한국 영화, 또 한국 대중문화의 위상이 높아졌는데, 그렇게 높아진 위상 속에서도 여전히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영화의 화려한 모습 뒤에 드러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물론 소설은 흥행 영화의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흥행 영화에서도 스탭들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많은 언론보도를 통해서 기사화됐지만, 소설에서는 그보다는 독립영화를 소재로 삼아, 독립영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을 하는 때에 오히려 독립영화관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를 할 수 없게 되는 현실. 너무도 힘든 독립영화의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독립영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


어쩌면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거들먹거리는 우리나라에서 그늘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몇 편이 세계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수많은 상도 받고 또 돈도 벌지만, 사실 영화라는 산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처럼, 선진국이라는 이름 아래 알려지지 않은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서이제가 쓴 '0%를 향하여'는 영화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대상을 받은 전하영이 쓴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소설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우선 '조명등'이라는 말에서 남들 눈을 의식하는 삶이라는 생각을 한다. '많은 시간'에서는 그렇게 사람들이 보내야만 했던 시간. 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을 생각하고, '보냈다'는 말에서 과거형이네, 이제는 자신의 삶을, 남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삶을 살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소설의 결말 부분은 아직도 '조명등 아래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쩌면 내 삶만이 아니라 남들의 삶도 '조명등 아래서' 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사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관계를 떠나기 힘든 존재이기에 어느 정도는 남을 의식하고 살 수밖에 없다. 남을 완전히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그 과정을 깨닫고 서서히 자신과 남의 관계에서 주체성을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성장이다. 소설은 그 점을 보여주고 있지만, 또한 그 성장이 얼마나 힘든지도 보여주고 있다. 


김지연이 쓴 '사랑하는 일'과 한정현이 쓴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은 성소수자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성소수자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좀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과거의 이야기로,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기에 젊은 작가들 소설에서 자주 다뤄지는 소재다. 소설 소재로 자주 다뤄진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성소수자 문제에서 우리 사회가 한발짝 더 나아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만, 한정현의 소설에도 나오고 있듯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물론 김지연의 소설에서는 핍박받는 성소수자의 모습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성소수자가 나온다. 세상이 많이 변했는데, 그러한 시대에 따른 성소수자의 삶을 잘 보여주는, 그럼에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 한정현이 쓴 소설이다. 한정현의 소설은 그래서 울림이 있다. 


여기에 자식 교육 문제도 만만치 않다. 박서련이 쓴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라는 소설을 보면 참 씁쓸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엄마는 문제적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인물.


모든 것을 자식에게 바치는, 자식이 잘 되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일을 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그런 엄마에게 엄마가 욕으로 자리매김된 게임 현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다.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다고 여기던 엄마, 그런 '엄마'라는 말이 욕이, 그것도 심한 욕이 될 수밖에 없는 모습.


이 소설들에서 다룬 현실이 소설 속이라고? 허구라고?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음을 젊은작가들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젊은작가수상집은 우리 사회가 지닌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비판하기 위해서, 무엇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특히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를 보듯이, 또는 거울을 보듯이 보게 된다.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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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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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따온 구절이라고 한다.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노인들이 살기 힘든 나라를 연상하겠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예이츠 시가 인용되어 있는데, 인용된 첫구절에 '저것은 늙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세대 차이를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노인들이 소외되고 무시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소설 첫부분부터 그런 생각을 깨버리고 만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많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소설은 그런 참혹한 광경을 어떤 감정을 담지 않고 표현하고 있다. 피가 사방으로 터지는 모습, 사람을 죽이면서도 감정의 동요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시거라는 인물. 


스릴러다. 쫓고 쫓기는 자. 살인자와 그를 잡기 위한 보안관. 그렇게 소설은 거의 끝부분까지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보안관인 벨의 이야기로 끝맺는다. 벨이 보안관직을 그만두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난다. 젊은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벨의 말에는 소설 제목이 어울린다. 


무례를 용납하게 될 때 모든 게 시작됩니다. 더 이상 존칭과 경어를 듣지 못하는 순간 눈앞에 종말이 보이는 거지요.(334쪽)


그런데 이 말은 왜 보안관이 있는 지역에 범죄 사건이 더 많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벨의 대답이다. 과연 이 말이 이 소설이 전개와 어울릴까? 


이 말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소설은 어떤 과정을 거쳤어야 할까? 시거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이렇게 어른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말일까? 이 말로는 시거라는 인물의 살인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시거는 그런 사회적 규범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는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시거가 왜 살인마가 되었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한 시거가 죽이는 대상이 노인들만도 아니다. 시거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죽인다. 그것도 어떤 땐 동전 던지기를 해서 운에 맡기기도 한다. 여기에 노인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제목과 연관짓고 싶어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데... 소설은 세 인물을 축으로 전개된다. 우연히 살인현장을 발견하고 돈을 가져간 모스, 모스에게서 돈을 찾으려는 시거, 그리고 그 지역의 보안관인 벨.


모스와 시거는 노인이라고 할 수 없다. 30대 정도 되는 인물로 나온다. 이들이 사회 주축세력이라면 이들을 통해서 노인들이 존중받지 않는 사회임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모스는 돈을 발견하고 가져간다. 돈, 이제는 돈이 우선되는 사회다. 모스가 피해다닐 때도 돈으로 대부분을 해결한다. 그렇다면 돈이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스는 자기 부인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부인의 엄마와 함께 하지 못하고, 또 돈을 가졌을 때 부인과도 떨어져 행동하게 된다.


벨이 지닌 가치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벨은 자신의 아내와 떨어져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노인인 벨에게는 가정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이런 가치가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무시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시거는? 그는 오로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만 행동한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공동체라는 개념은 시거에게는 없다. 노인들에게는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중요했고, 벨이 그러한 공동체 의식을 배반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장면이 뒤에 나오지만, 시거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개념이 없다. 그러니 그에게는 노인이건 젊은이이건 상관이 없다. 자신의 눈에 거슬리면 무조건 제거할 뿐이다.


즉 가정과 공동체의 가치가 파괴된 사회에서 노인이 된 벨이 물러나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나고 있다. 이렇게 한 세대의 가치가 후대 세대로 전승되지 못하고 단절되었을 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살인 사건을 끝맺지 않는다. 악이 징계를 당하는 권선징악이 노인들 세대의 가치관이라면 이제 새로운 세상은 권선징악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다. 강자가 살아남는 시대. 그런 시대의 모습을 살인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 결말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초반에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음에도 소설은 중후반까지 긴박하게 전개된다. 모스와 시거, 그리고 벨로 나뉘어 소설이 전개되어 빠르게, 흥미진진하게 읽어갈 수 있다. 이것이 매카시 소설의 장점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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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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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왜 파괴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소설은 파괴된 세상에서 시작된다. 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정착할 수가 없다. 머묾은 곧 죽음이다. 그러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어디론가 끝없이 가야만 한다. 길 위에 있어야만 한다. 종착지는 없다. 목표하는 곳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다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매카시 소설은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과정만 보여준다. 아니다.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희망도 잃지 않는다. 적어도 길을 가고는 있으니까. 어떤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으니까.


파괴된 세상, 세상은 온통 잿빛이다. 그리고 추위다. 이 추위는 물리적인 추위만이 아니다. 사람들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추위다. 동토의 왕국이다. 세상만이 아니라 사람들 관계도.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의 가족만을 믿을 뿐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연상시키는 소설인데... 재난을 당했을 때 재난 속에서 구현되는 인류애를 상상하면서 소설을 읽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 소설은 재난 민주주의는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살인, 약탈만이 등장한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우리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때 우리가 보여주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은 최소한 인류애를 지니고 있다. 소설 속에서 아빠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빠에게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목표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적이다. 쫓아내거나 또는 자신이 도망쳐야 할 적.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제외한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서? 살아남지 못한다. 아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남자로 서술되던 이야기는 이제 소년의 이야기로 서술된다.


소년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여전히 소년은 길 위에 있지만, 이제 소년의 여행은 끝났다. 소년은 파괴된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 소설은 짧은 문장들도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딱딱 끊어지는 듯한 문장들. 세상은 이렇게 단절되어 있다는 듯이 문장들 역시 단절된다. 그러면서 계속 나아간다. 길 위에서 계속 걸을 수밖에 없듯이 소설은 그렇게 계속 우리를 앞으로 이끈다.


그렇게 소설은 나아가는데, 파괴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를 고민하게 하기 보다는, 재난 속에서 인간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잿빛 세상에서, 차가운 인간 관계에서, 소년은 불을 운반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 아빠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불, 밝음과 따뜻함이다. 세상을 다시 밝힐 수 있는 존재다. 그 존재를 가슴에 품고 있는 소년.


그렇게 소설은 소년으로 끝난다. 아빠로 대변되는 과거 재난에 대응하는 세상은 끝났다. 이제는 새로운 대응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년이 계속 가야 할 길이다. 이번에는 홀로가 아니라, 남들을 적으로만 여기고서가 아니라 함께 가는 길.


이제 소년이 가는 길은 과거의 길과는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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