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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수다
전김해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3월
평점 :
그림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화집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하지만 어떤 특정 장르로 국한시킬 수 없는 책이다. 아주 짧은 이야기들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는데, 그 짧음 속에 깊음이 담겨 있다. 짧은 말들 속에서 다른 말들을 계속 덧불일수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어린이들이 보기보다는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책을 읽고 생각을 한 사람들이 읽어야 좋다. 아니면 아무 편견없는 어린이들이 읽고 자기 생각을 그냥 풀어내도 좋고.
이야기에 이야기를, 이야기에 생각을 붙여넣을수록 더 많은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자를 좋아한다고 한다. 사자를 '지루한 쓸쓸함. 삶의 권태, 허무를 읽는다. 그래서 모든 가졌음에도 여전히 슬픈 인간의 모습을 닮아버린 사자는 내 가슴에 아련한 연민으로 남아있다. 하여, 사자를 그리는 일은 나와 세상을 안아주고 위로하는 작업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자에 더해 수다도 좋아한다고 한다. '나는 말수다 대신 글수다로 풀어낸다. 나의 머릿속에서 지글거리는 수다를 풀어내면서 '볼진의 나'를 알아간다'고.
사자와 수다.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대상들이 하나로 엮여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동물의 왕인 사자는 다른 존재와 이야기를 많이 못할 가능성이 많다.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는 그만큼 고독하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수많은 대화를 했을 수도 있다. 사자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수다를 그리워했을 수도 있다.
수다는 마음을 풀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말들. 이 말들 속에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진리가 있다. 옛날 여인들이 우물가나 빨래터에서 수다를 떨면서 진실을 뱉어내고 마음을 치유했듯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정여울이 쓴 [소리내어 읽는 즐거움] 287-289쪽에 나오는 내용이 떠올랐다. 이순신 장군이 좌수사로 취임하고 나서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 이야기할 공간을 마련해 주고, 또 자신도 그들과 어울렸다는 내용.
처음엔 어려워하던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을 편하게 대하고, 이런저런 자신들이 경험한 이야기들을 수다로 풀어냈고, 그 수다에서는 바다에 관한 내용 중에 물길에 대한 내용이 많이 있어, 그것을 귀담아 들은 이순신 장군이 작전을 펼칠 때 활용했다는 내용.
이런 내용과 더불어 창의성을 다루고 있는 책들에서도 창의적인 생각은 진지한 회의에서보다는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더 많이 나온다는 내용도 있으니...
이렇게 수다는 유용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예전 왕들이 평복 차림을 하고 시중에 나가 백성들의 말이나 삶을 살피곤 하지 않았던가. 이만큼 수다는 그냥 버리는 말들이 아니라 새겨들어야 할 말을 담고 있다.
그러니 '사자와 수다'라는 제목,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잘 어울린다. 이 책에 있는 글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 중에서 특히 '슬픔이의 슬픔'이라는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822/pimg_7744201133073194.png)
슬픔을 멀리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슬픔 없이는 기쁨도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슬픔을 멀리하지 말고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다음에 올 존재들을 맞이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들어갈 때를 보며 숨을 고르는 큰 슬픔이 뒤로 / 겸손이, 뉘우침이와 돌이킴이, 감사함이 같은 기쁨이들도 / 종종거리며 들어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작은 슬픔이 들이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만이'들이 들어가 '큰 슬픔이'가 들어가게 되면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고 한다. 작은 슬픔이들을 받아들였을 때 오만이가 들어설 자리는 없고, 그러면 혹 큰 슬픔이가 오더라도 곧이어 올 겸손이, 뉘우침이, 돌이킴이, 감사함이들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짧은 글이지만 결코 짧지 않다. 이렇게 짧은 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깊고 깊은 면들을 깨우치게 하는 내용이 이 책에는 많다. 한 편 한 편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면, 어렵게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냥 이 책에 나온 글 한편을 가지고 수다를 떨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덧글
이 책은 선물로 받았다. 늘 책을 선물받는 일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잘 읽었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