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비다. 비 오늘 날은 늘 기분이 좋았다. 들떴던 기분을 가라앉혀줘서 좋았고, 침울한 기분에는 동반자가 되주어서 좋았다. 젖을락 말락 가랑비는 간질거려서 좋았고, 억수같은 장대비는 시원해서 좋았고, 몰아치는 태풍은 엄청난 위력에 대견함과 겸손함이 생겨서 좋았다. 그런데, 이번 주는 내도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리는 비가 싫어졌다. 처음 있는 일이어서 내 감정을 눈치챘을땐 무척 당황스러웠다. 평생 애인 같은 느낌일줄 알았던 비가 싫어지기도 하다니 말이다. 물론, 여행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은 탓도 있다. 운동을 하면 조금 회복되는 느낌인데 그런 운동을 내리는 비 때문에 못하니 신경질나기도 할 터이다. 내 뜻대로 안되는 사람 감정에 마음 상한 것도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비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고작..
내 사랑은 고작..
'비'에 대한 내 변덕을 알아차리면서 내 주제를 알았다고나 할까. 나는 고작..그렇고 그런 '인간'인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 천년의 세월을 한자리에 있는 바위의 정숙함도 모르고, 하늘에서 떨어져 메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시며 들어가는 비의 부드러움도 모르고, 고작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애꿎은 비에다 화풀이만 해댄 것이다. 그것도 늘 그 존재에 감사해하는 비에다가! 어리석기 그지없는 하루살이 삶이로구나.
아침에 출근을 하고보니 오늘도 종일 비가 올 태세다. 태풍이 몰아치는데 비가 동반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간만에 조용한 일요일 근무가 될 듯하다. 음악도 틀지 않고, 빗소리를 가만가만 들었다. 뒤죽박죽 엉망이었던 마음이 사르르 가라앉는다. 어제 하루 내 못된 행동들에 상처받았을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제서야 드러난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왠 남자가 약국을 들어선다. 화상환자다. 무릎에 화상을 입었는데 집에 굴러다니던 접착형 메디폼으로 자가치료를 한다고는 했는데 뭐가 좀 이상하다며 오셨다. 환부를 들여다보니 상태가 별로다. 몇 일간 생으로 고생만 하시고 치료는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다. 화상을 입었을 때는 우선 흐르는 물에 환부의 열을 식히는 것부터해서, 리도가제를 붙여서 열독을 내리는 것까지 설명을 해주고, 환부에 화상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리고 접착형 메디폼 말고 좀 두터운 2미리짜리 메디폼을 붙여주고, 그 위에 반창고격인 픽싱롤까지 덧대주었다. 남자는 화상을 입었음에도,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오늘 경기가 있다면서 다리를 요리조리 움직여보더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남자가 보기에도 내 처치가 대단히 만족스러운 눈치다. 그럼..내가 경력이 몇 년인데..컵라면을 먹는데도 물 붓다가 팔에 부어버려 화상 입는 사람인데..화상을 입지 않으면 요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화상경력이 좀 된다고 말을 해줬더니 남자가 웃는다. 몇 십분을 문을 연 약국을 찾아다녔다며 문 열어줘서 고맙다고 하고, 상처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남자는 다시 쏟아지는 비 속으로 나갔다. 쏴아아~ 빗소리가 청량하게 들린다.
마음이 안 좋은 날, 누군가를 치료해주게되면 내 다친 마음까지 같이 치료되는 느낌이다. 늘 받는 느낌이지만, 매번 고마운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