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점심을 먹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기도 전에 오후 일과가 시작되었다. 달력의 빨간 날에는 유독 아픈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평일에 쉴 수 없는 긴장된 몸이 주말에 풀려서일까. 주말에 아픈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애틋한 마음이 생긴다. 덕분에 오늘도 나는 평일보다 바쁜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다.

 

 

여러 명의 손님이 왔다 갔다하는 동안에 약국 한 켠에 한 여자 분이 계속 서 있다.

"어떻게 오셨어요?"

조금 기다리겠단다. 다른 급한 사람들 먼저 약을 줘도 된단다. 감이 온다. 임신 테스트기나 콘돔, 질정, 기타 여성에게 필요한 용품을 원하는 눈치다. 약국의 모든 손님들이 나간 뒤 여자는 매대 앞으로 왔고 쓰던 모자을 벗고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도 뒤로 넘겼다.

"어머. 아시는 분이시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요새 통 안 보이셔서 안 그래도 궁금했더랬어요."

"저기..제가 급히 약이 필요해서 그러는데요...게보린을 좀.."

오랜간 처방전 손님으로 왕래가 있었고 손님의 약력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흔쾌히 그러마, 라고 말을 했다.

"게보린이 다섯 통 필요하신 거지요? 그래요. 외상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늘 하는 말이지만 너무 많이 드시진 마시구요. 매번 덜 드시는 연습을 하셔야 되셔요. 자요. 여기 다섯 통."

"저기..제가 실은 이혼..을 해서요..빠른 시일에 갚아드리진..못해서요.."

여자 얼굴에서 눈물이 툭 떨어진다.

"네? 뭐라구요? 어머나. 그런 일이..요 몇 달 안 보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하시던 식당 접은 지가 고작 몇 달 전인데 그런 힘든 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럼 지금은 어디 계시는 거에요? 위자료는 받았어요? 아이들은?"

쏟아지는 내 질문이 부담스러웠을텐데도 여자는 다행히 또박또박 대답을 죄다 해주었다.

"입은 옷 그대로 쫓겨나서 방은 근근히 구했어요. 끼던 반지 팔아서 원룸에 지금 살고 있어요. 아이들은..흑..남편이 아이들을 못 만나게 해요.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놨는지 전화를 하면 실실 피하면서 대답도 잘 않구요. 아..글쎄..내가 시어머니에게 욕을 했다면서 이혼을 하라는 거 있지요."

"네? 그럼..약을, 저기 그러니까, 약을 먹은 상태에서 욕을 한 거에요? 아니, 남편이 지금 애기 엄마 상태를 잘 알고 있잖아요. 부인이 좀 아프면 그걸 받아들이면서 같이 살아야지. 그렇게 몸도 약하고 정신도 아픈 상태에서 식당 해서 새끼들 먹여살린다고 그렇게 고생한 거 주위 사람들이 죄다 아는데 고작 욕 한 번 했다고 이혼하재요?"

"흑..나는 욕 한 거 기억도 안 나는데"

"아..그럼 당장 어떻게 살아요. 지금 일 할 형편도 아니시잖요."

"군청에 필요한 서류를 신청해놨어요."
"아..잘 하셨어요. 저기..그..생활보호대상자 신청하고 뭐더라. 암튼, 기타 등등 말이죠?"

"네. 신청해놨으니 담 달 중순이나 되면 연락이 온대요."

"그럼 당장은 뭐 먹고 살아요? 밥은 먹고 있어요?"

"나올 때 그냥 쫓겨나서 옷도 하나도 없고 신발도 슬리퍼 채로 나와버려서 여직 슬리퍼로 지내다가 최근에 부츠 하나 얻었어요."

여자는 입고 있는 츄리닝 옷과 맞지 않는 번쩍이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손은 거칠다 못해 봄 가뭄의 논두렁 마냥 쩍쩍 갈라져 있었다. 나는 급한 김에 우선 약국에 비치된 핸드 로션을 챙겼고, 조제실 뒤로 가서 약 봉투에 얼마간의 지폐를 넣었다.

"당장 이걸로 요기를 좀 하시구요. 게보린은 필요하면 언제라도 오셔요. 그렇지만, 매번 하는 말이지만, 최대한 덜 드셔야 되요. 한꺼번에 여러 알 드시면 절대 안 되구요. 도저히 머리가 아파서 안 되겠다 싶을 때 그 때만 드셔야 되셔요."

 

 

여자는 울다가 갔다. 체질적으로 신경이 많이 약한 여자는 우리 약국에서 근 3년 간을 신경안정제를 처방 받아서 먹고 있었다. 하루도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데다 가끔씩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엔 몇 주 간 입원도 곧잘 하는지라 남편의 뒷바라지를 비롯해 가족의 이해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남편과 같이 식당을 한다고 홍보 팜플렛을 들고 왔었다. 그것도 24 시간 영업하는 김밥나라 같은 식당을 말이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배달도 다니고 음식도 만들며 열심인 모습을 보여서 나도 종종 음식을 시켜먹곤 했었다. 식당을 하면서 여자는 안정제 용량을 올렸고 부족한 경우엔 한 봉지를 더 먹기도 했다. 해서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안정제가 모자라게 된 여자는 DUR시스템이 생긴 올 7월 이후에는 안정제를 구할 수 없어 늘 전전긍긍했다. 그 와중에 두통은 여전했고, 게보린 이외의 진통제는 듣지 않는 여자는 게보린을 늘 5통씩 사서 먹었다. 초기에는 게보린을 많이 먹으면 좋지 않기 때문에 한 통 이상은 못 준다는 나와 실갱이도 꽤 했지만 내가 주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사는 걸 아는지라, 언젠가부터 차라리 5통을 주면서 내가 체크하는 편을 택했다. 대신에 매번 잔소리를 빼먹지 않았는데, 내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자는 게보린을 사러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문을 닫는다는 말을 전해 주고는 여자는 몇 달 간이나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궁금해하던 차에 나타난 여자는 행복하지 않은 본인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남에게 들키기 싫은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줘야만 했을 때, 여자는 얼마나 갈등이 심했을까. 그 마음고생을 생각하니 여자가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본인에게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남 앞에서 눈물 콧물 보이며 질질 짜고, 본인의 약점을 스스로 밝히며,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그 모든 과정을 여자는 넘어선 것이다. 삶에 대한, 생명에 대한 욕구가 이기게 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여자의 그 용기가 보기 좋았다.

 

 

"때르릉"

여자 전화다.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여자는 말을 주춤거리며 이어간다.

"제가 아까는 미처 고맙다는 말도 못했어요. 정말이지 흑..주신 돈은 제가 빨리 정신 차려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꼬옥 갚아드릴게요."

"당장은 몸이 건강해지는 것부터 신경쓰시구요. 그래야 나중에 아이들도 다시 만나고 그러지요. 법에 호소하면 아이들을 만나는 방법이 생길 수도 있으니 빨리 나아야겠다, 그 부분만 신경 쓰셔요. 게보린은 정말 줄이시구요. 아셨죠? 가끔 약국에 놀러 오시구요. 게보린 필요할 때 말고 이야기 들어줄 사람 필요할 때도 들르시구요. 그리고, 밥부터 먼저 챙겨드시구요. "

한층 밝아진 여자 목소리를 뒤로 하며 수화기를 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다. 내가 그녀에게 하루 산타가 되었으면 좋겠다. 힘들었던 숱한 시간들 속에서 나에게 하루 산타가 되어준 또다른 그들처럼. 늦은 저녁 퇴근하기 직전, 가게를 살며시 나와 멀리서 가게를 들여다본다. 내 가게 불빛이 누군가에게 따스한 온기를 주는 불빛이기를, 마음 속으로 작게 빌어본다. 까만 밤이어서 불빛은 더 환하다. 여자의 까만 밤 같은 마음 속에 불빛의 씨앗 역시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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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12-26 0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여자분에게 달사르님은 어제 어떤 분이었을까요? 무슨 표현이 적당할지 몰라 그냥 그렇게만 말합니다.
요즘에도 자기 부인을 그냥 내쫓기도 하는지, 빈 손으로 쫓겨나기도 하는지, 자기 아이까지 두고요. 감정적인 저는 화부터 막 나는데, 같이 화내는건 아무 도움도 안되겠지요.
게보린이 아닌 다른 어떤 결심이 꼭 필요할텐데요 그 여자분이요...

달사르님, 오랜만이지요. 반가와요 ^^

달사르 2011-12-26 14:08   좋아요 0 | URL
히. hnine님. 저도 반가와요. 간만에 부끄럽게 글 한 편 올렸는데 이렇게 반겨주셔서 기분도 우쭐하구요. 헤헤.

네. 아무래도 저는 여자분의 약력이 더 걱정되는지라 다른 쪽에 신경이 덜 쓰였나봐요. 처방받은 약을 미리 다 먹어버려서 몇 일을 약을 못 먹어 손도 떨리고 정신도 불안해보여서 그게 더 신경쓰였거든요. 다음에 오면 또 조곤조곤 물어봐서 변화된 상황이며 등을 알아봐야겠어요. 참, 이혼 와중에 시아버님이 병원에서 별세하셨다는데 그것도 여자 때문이라면서, 남편이 여자에게 원한어린 말을 했다나봐요. 일이 잘 안 풀리면 남 탓 하기가 쉬우니 심신이 미약한 부인의 탓으로 돌리나봐요. 그치만 또..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저 앞으로 여자분이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쪽만 생각하려구요. 가정사에 이러저러한 구구절절한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하구요.

다락방 2011-12-2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의 오랜만의 페이퍼는 산타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네요. 물론, 그 여자분의 삶을 읽노라니 안타깝지만, 제가 만약 달사르님의 약국에 약사로 있었다한들, 달사르님처럼 그분을 살갑게 대해줄 수 있었을까요? 전 아마 모르척 하거나 애써 무관심하려 했을 것 같아요. 달사르님은 그분께 산타보다 더한 존재인 것 같은데요.

그 여자분도 여자분이지만 저도 달사르님께 감사하고 싶어지네요. 이런 페이퍼를 읽노라니 말이지요.

달사르 2011-12-26 20:07   좋아요 0 | URL
쉬는 동안 다락방님 생각 많이 했어요. 헤. ^^

사람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미지의 물질이 전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락방님이 어떤 행동을 취했더라도 그 여자분은 다락방님의 마음을 알아차렸을 거에요. 그리고 그게 그 사람에게 더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는 거구요. 마음이 통한다는 건 꼭,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니까요. ^^

히힛. 이제 자주자주 알라딘에, 그리고 다락방님께 들를께요.

2011-12-26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6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1-12-2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5일만에 새 글을 올리셨네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글을 올리시다니... 잘 읽었습니다. 달사르님이 그분에게 `하루 산타`가 된 게 아니라
앞으로의 긴 시간의 삶의 산타가 되신 것 같아요. ㅋ

참, 세상일이란 이상하죠? 한쪽에선 은퇴남편 증후군 때문에 아내들이 남편들을 구박을 하고 있는데,
한쪽에선 이렇게 아내가 남편한테 쫓겨나고... 한 세계의 두 현상이랄까요.
어쨌든 그 여자분, 삶의 용기 잃지 마시고 꿋꿋하게 살아가시길 맘속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달사르 2011-12-29 19:12   좋아요 0 | URL
아. 멋진 표현이에요. 한 세계의 두 현상! 21세기라는 공간적 세계에도 다른 세기의 현상은 겹치게 마련인가봐요. 요새 뉴스들을 봐도 21세기 같지 않은 일들이 왕왕 보이니까요. 여자분은 그 후로 약을 타 가시곤 아직 들르지 않고 있어요. 담에는 좀더 화사한 얼굴을 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펙 님의 응원이 여자 분께 닿아서 희망 하나가 보태졌으면 합니다. ^^

음..세상의 일은 돌고 도나봐요. ^^ 산타도 돌고 돌아서 그 여자분이 또 누군가의 산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12-3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산타는 미인이 많던데 달사르 님이 산타가 되었군요.내용도 좋고 문장도 간결합니다.문예창작과 학생들에게 모범사례로 보여줘도 되겠군요.

달사르 2012-01-02 16:09   좋아요 0 | URL
앗. 고마운 칭찬입니닷. 다음에 여건 되면 문예창작과 수업을 좀 듣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던 중이어서 더 기분 좋은데요? 하하하.

차좋아 2011-12-30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 약국 우리 집앞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달사르님 하는 슈퍼도 좋을 거 같아요 가게가 무엇이든 주인이 달사르님 같은 분이라면요^^(외상 때문은 아니에요~ㅋ)

달사르 2012-01-02 16:4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약국을 이고지고 이사를 갈까요? ㅎㅎㅎㅎ (외상이야 뭐 언제라도! 차좋아님 에게는 말이죠. 하하)

2012-01-01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2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2-01-1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만에 이 글을 읽었어요. 달사르님이 그분에게 진정 산타 클로스가 되어주셨네요. 그분의 용기를 보아주신 점도 참으로 따뜻해요. 울적했던 아침이 개이는 기분이에요.^^

달사르 2012-02-05 23:11   좋아요 0 | URL
으으윽. 간만에 블럭 들어오니 글이 저장도 안되어 막막 튕기네요.ㅠ.ㅠ 걍 올리지말까 하다가 인터넷과 씨름해서 겨우겨우 새 포스팅 하나 올립니닷.

마노아님 그간 잘 계셨어요? ^^ 메인 사진이 바뀌었군요!!
아.. 위 여자분과는 그 뒤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하아..일단 한숨부터..내쉬고..다음에 조곤조곤. ^^ (누군가의 산타 클로스가 되려면 어떡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구요. 그리고, 뭐든..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낫다, 라는 생각도 같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