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집에 들어가다보니 포스팅이 자꾸 밀린다. 목요일 포스팅은 금요일에 적고, 금요일 포스팅은 일요일 짬짬이 적고, 이제 퇴근해서 일요일 포스팅을 적는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약국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이 깜짝깜짝 놀란다. 아이의 또랑또랑하고 높은 음성이 반기며 고개 숙여하는 인사를 받으니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으신 눈치다. 나이 든 약사의 동태같은 눈과 조용하게 아래로 쫙 깔아내린 목소리로만 인사를 받다가 저리도 상큼한 인사를 받으니, 손님들의 대응 또한 즉각적으로 달라진다. "아이구야, 엄마 일 도와주나보지?" "일요일에 놀지도 않고 일 도우는거야?" "용돈 두둑히 받아야겠는데?"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를 다 다루니까 처방전 입력도 곧잘 하는군. 저기 카드 계산도 할 줄 아는 것 좀 봐" 조카는 다른 말은 대꾸를 않고 '엄마'라는 용어는 꼭 '이모'라고 수정을 해준다. 이모 혼사길 막히는 걸 방지하려는 조카의 자상한 배려랄까.
오늘은 일요일. 아침부터 조카와 같이 출근했다. 2주 전 추석 날 아침에도 조카가 같이 나와주었다. 명절을 쇠러 가거나 주말에 쉬는 직원으로 인해 명절이나 일요일이면 파김치가 되는 이모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과감히 내어준거다. 올 봄까지만 해도 큰조카가 보조일을 해주었다. 3년을 도와주던 큰조카는 중 3이 되면서 더이상 시간을 빼기 힘들어했고, 초딩6학년이지만 3년 전부터 약국 일을 돕고 싶어했던 작은조카 녀석이 바톤터치를 했다. 선천적으로 타인을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성향인데다 이모의 일에는 뭐든 마다않고 나서서 도와주고파 하는 기특한 녀석인지라 그동안은 겨우 허락맡은 게 폐문시 쎄콤을 켜는 일 정도였다. 그 일도 신명이 나서 하는 걸 보노라면 웃음이 피식 나오곤 했다. 하도 약국 일을 돕겠다고 하길래 키가 150 이 넘으면 사람들이 아이로 취급하지 않을테니 허락해주마, 라고 말을 했더니 조카는 수시로 키를 쟀고 우유를 대놓고 먹었다. 조카는 지금도 키가 150 이 되지 않는다. 한 2센치 정도가 모자란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큰소리로 인사하는 조카를 보면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기특해한다. 큰소리의 인사를 받는 것도 좋으시지만 어른의 일을 돕는 아이를 보는 것도 뿌듯하신 눈치다. 우리 어릴 때는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일을 도왔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에 올인해서 학원순례를 하는데 나에겐 못마땅한 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놀거나 아니면 어른의 일을 도와가면서 사회를 조금씩 경험하는 게 좋은데 말이다. 언니와 나는 조카들에게 어른의 일을 도우는 것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그 과정을 거친 큰조카는 우리의 의도대로 돈 벌기의 힘겨움을 경험했고, 돈을 절약하는 구두쇠가 되었으며, 사람들과의 대화법을 익혔으며, 무엇보다 가족끼리 서로 돕고 사는 방법을 배웠다. 작은조카도 그 과정을 겪으면서 누나의 뒤를 밟아서 배우게 될 것이다.
아이의 인사가 제일 반가운 사람은 미장원 언니다. 조카가 다니는 단골 미장원 언니는 아이의 인사를 받자마자 나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이모가 보고 배워야겠네. 가게엔 자고로 이렇게 조카처럼 반기는 맛이 있어야지. 손님이 오든지 말든지 대충 하는 인사라니, 그게 뭐야. 이모가 조카 보고 배워! 손님이 오면 앞으로 조카처럼 생긋거리며 웃고 큰소리로 인사해. 알았어?" "에이. 언니두. 언니두 가게 해서 잘 알면서. 하루종일 손님들 상대하다보면 우리도 지친단 말이지. 아는 안면에 그런 건 좀 봐주고 해야지. 아잉. 언니" 추석 때 들었던 미장원 언니의 뼈있는 잔소리다.
오늘은 곰곰이 들어오는 손님들을 지켜보니 무표정한 표정으로 들어오던 손님들이 조카의 인사를 받자마자 80%는 화색이 바뀔 정도로 활짝 웃으신다. 심지어 한 분은 "약국에 꼬마약사님이 계시네?" 하고 웃으시더니 계산을 하는 조카에게 거스름돈을 받으면서 끝까지 예우를 대해주었다. 아파서 찡그리며 들어오시던 한 분도 조카의 인사에 잠시 활짝 웃더니 다시 아픈지 다시 찡그리는 일을 계속하셨다. 내가 그동안 인사했을 때 손님들이 저리 웃던 적이 있었나? 고개가 모로 저어졌다. 새삼 인사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좀 어색하지만 나도 조카 따라 저렇게 밝게 웃어봐야지, 싶었다. 칙칙하던 약국에 밝은 무지개가 뜬 듯이 인사 하나로 환해지는 느낌이라면 조카의 인사를 얼마든지 따라 배울 일이다.
저녁 즈음에 만우 아저씨가 들렀다. 언젠가 술 자시고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혼자 자빠져서 무릎을 까여서 내가 치료를 해준 뒤로 나와는 친구 비스무리한 관계로 편하게 지내는 아저씨다. 아저씨가 무얼 사셨고 조카가 계산을 하는데 개구장이 아저씨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야야. 그 돈을 그리 넣으면 안되지" "네? 그럼 어디 넣어요? " "어허~ 조금씩 삥땅도 치고 그래야지. 조금씩 니 호주머니에다가 넣기도 해" 해맑게 웃으며 장난치는 만우 아저씨의 장난을 이해 못하는 조카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아따 마, 아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건 잘 모른다니까. 나중에 좀더 자라면 그런 것도 하겠지. 이모도 그랬으니까. 그런 거 할 때까지 주말마다 이모 일 도와주면 차암 좋겠구만. 하하하"
하루종일 큰소리로 명랑하게 인사하던 조카는 저녁 먹고부터는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고 톤이 낮게 깔린다. 자고나서 목소리가 쉬어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 나처럼 낮아지는 톤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짜식. 봐라 봐. 하루종일 그래 인사하다보면 지친다니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