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에도 비가 내렸지만 오늘 비가 또 내린다. 비가 자꾸자꾸 내렸으면 좋겠다. 출근길에 비가 왕창 내렸다. 약국 문을 열자마자 종이박스를 입구에 깔았다.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워 비오는 날엔 종이박스가 요긴하다. 엊저녁에 종이박스를 전부 내다놓지 않고 하나 남겨놨는데 선견지명이다.
'비오는 날은 우산장수, 양산장수(?) 이야기처럼 약국가는 한산하다.' 가 정설이다. 그러나 모든 정설엔 예외가 있듯이 오늘은 예외의 날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쁘기 시작해서 겨울이 다시 왔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 조제실에서 약을 지었다는 말이다. 그러다 할아버지와 아들 손님 두 분이 들어오셨고 나는 계속 약을 지었다. 수시로 들어오는 손님을 위해 귀는 늘 열어둔 채로 있었는데 조제 중에 이런 대화가 들렸다. "당굴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나요?" "아..당굴..요? 글쎄요..어디로 가야할까요..버스를 타고 가시나요? 버스 정류장은 말이죠. 저쪽 길로 주욱 올라가셔서는요.." 지나가는 할머니가 담배를 피기 위해 약국 앞에 서 있는 아들에게 길을 묻는 눈치다. 그러나 뭔가 해결이 잘 되지 않았는지 약을 지어 나와 보니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난처한 표정으로 서 계신다. 다른 여자분도 한 분 계셨는데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시며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다. 할아버지와 아들이 약을 받아서 간 뒤에도 다른 여자분은 계속 생각을 하셨고, 뭔가를 중얼거리신다. "손님, 뭐라구요?" "아. 네..아까 할머니가 얼핏 아주라고 이야기해서요. 아주는 당굴의 작은 마을 이름이거든요. 아주를 가려면 버스를 어디서 타야 될까.."
아. 이 사람들, 왜이렇게 착하지. 나는 순간 귀찮다는 생각을 했는데..반성의 의미로 할머니에게 친절하게 말을 건네본다.
"할머니, 지금 여기는 왜 오셨어요?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집에 가실거에요?"
"으응. 병원 댕겨왔지. 봐, 여기. 약도 탔는걸? 집에는 지금 안 가고 지금은 딸네 집에 갈거야. 근데 딸네 집이 어딘지는 몰라."
할머니가 보자기에서 주섬주섬 꺼낸 약봉투는 인근 약국 것이었다. 그 약국에서 제대로 묻지 못하고 길을 나선게다. 그 약국에 도로 할머니를 보내고픈 마음이 살짝( ") 들었지만 착한 주위사람들에 동화된 나는 직원과 다른 여자분과 의논을 계속 한다. 이때, 센스쟁이 직원이 아이디어를 낸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봅시다. 이제는 할머니 이름을 아니깐 병원에 전화를 걸어보자구요."
평소에 환자들이 약을 놔두고 가거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환자 연락처가 필요한 경우 병원에 전화를 건다. 병원은 환자의 연락처를 무조건 기입하기에 우리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 할머니의 경우, 본인의 연락처가 있을지 보호자의 연락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전화해보기로 결론을 내리고 전화를 걸었다. 마침 친절한 원무과 직원이 받는다.
"아.. 그 할머니요. 그 할머니 약간 오락가락하시는데..잠깐만요. 연락처가..따님 연락처네요."
친절한 원무과 직원에게 감사를 표하고 알려준 연락처로 우리직원이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약국입니다. 할머니가 저희 약국에서 약을 타신 후 길을 나서는데 지리를 모르시나봐요. 할머니가 따님에게 들렀다 집에 가신다는데 따님댁은 어디신가요? ... 아..지금 도시병원에 계시다구요? 아..그러시군요. 그러면 할머니는 집은 어떻게..네..네..아..그렇게 하시겠어요? 네~ 잘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직원이 할머니를 다독이며 말을 한다.
"할머니~ 따님은 지금 잠시 어디 다른데 볼 일이 있다나봐요. 오늘은 할머니가 그냥 집에 가시구요. 따님과는 내일 보기로 했지요? 따님이 택시를 보내준다고 하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렸다가 택시 오면 타고 가셔요~"
약을 탄 약국 말고 엉뚱한데서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피하고 딸의 걱정을 최소화시키려는 직원의 센스있는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나저나 딸이 병원에 있다니. 어디가 아픈걸까.
약국 밖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가 양손으로 꼬옥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는 야채와 작은 호박 두 덩이가 있었다. 오늘 딸내미 만나면 건네려고 담아온 호박은 참으로 예뻤다. 손자까지 두고서도 여전히 딸내미를 챙기는 할머니 얼굴을 오래도록 물끄러미 쳐다봤다. 할머니의 쭈글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려니 택시가 왔다. 택시 아저씨는 웃으면서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넨다. "따님이 오늘 마침 볼일이 있으셨나봐요. 하하하. 제가 할머니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드리겠습니다." 흰머리 할머니와 흰머리 택시 아저씨는 내리는 비속을 그렇게 떠났다. 누군가의 소망, 누군가의 마음을 담은 비가 계속 내린다. 비는 할머니의 호박밭에도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