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쏟아내던 비도 멈췄다. 하늘은 미적거리며 드러내야 할 속내가 있는 듯 스산한 바람과 함께 어둡고 흐리다. 비 오면 차가워져야 할 날씨가 봄날의 온기다. 계절과는 어긋나 보이니 어색하기만 하다.
처마 밑 곶감이 수난을 당한다. 바람의 리듬 사이로 볕의 온기를 품고 특유의 색과 맛을 잉태하던 곶감이 흠뻑 젖었다. 다시 살랑이는 바람과 함께할 볕을 기다린다.
살랑거리는 바람의 위로가 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불편한 팔이지만 걷기에는 이미 방해요소는 아니다. 몸을 감싸는 까실한 가을 햇살이 좋다. 한시간 여를 걷다가 만난 풍경에 발걸음이 저절로 멈춘다.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바위 위에서 쏟아지는 물이 햇살을 품었다. 음과 양은 서로 기대어 빛난다고 했던가. 떨어지는 물줄기가 그늘에 들어 더 빛난다.

하늘, 햇살, 바위, 물줄기, 밝음과 어둠, 높고 낮음, 멀고 가까움 등 무엇하나 과하지 않은 조화로움이 만들어 낸 모습이기에 더 크게 다가온다. 이 조화로움의 공통분모가 만들어 꽃이다.

꽃은 어디에도 있고 그 꽃은 누리는 자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_읽는_하루

나무들은 때로 붉은 입술로 말한다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끓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한 꽃들이
뾰루치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로 하고
오늘 아침 쌀 씻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어야지
햇빛이 우리의 마음을 배추잎처럼 비출 때
사람들은 푸른 벌레처럼 지붕 아래서 잠깬다
아무리 작게 산 사람의 일생이라도
한 줄로 요약되는 삶은 없다
그걸 아는 물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반딧불 만한 꿈들이 문패 아래서 잠드는
내일이면 이 세상에 주소가 없을 사람들
너무 큰 희망은 슬픔이 된다
못 만난 내일이 등 뒤에서 또 어깨를 툭 친다
생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고통도 번뇌도 힘껏 껴안는 것이 생이다
나무들은 때로 붉은 입술로 말한다
생은 피우는 만큼 붉게 핀다고

*이기철의 시 '나무들은 때로 붉은 입술로 말한다'다. 시간을 겹으로 쌓아가는 생명의 근본은 피가 붉듯 '붉음'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모든 생명들의 자잘한 일상이 모여 그 붉음을 잉태할 것이다.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또가원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벼락 부자가 되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지난 10월 중순, 바다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진만 보면 "와~ 바다"를 외치는 주인의 마음을 곡해한 카메라가 울진 동해바다로 가출을 감행한 후 돌아 오지 않았다. 그 후유증으로 주인은 아직 부자연스러운 몸짓에 갇혀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꽃이 진 계절이라 눈에 보이는 꽃이 뜰의 국화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꽃보면 의례 카메라를 들이대던 그런 날들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손 보다 마음이 먼저 들썩이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어쩌면 있을 때보다 더 간절함을 달래려고 애써 안그런 척 하며 뒤숭숭한 마음으로 위안 삼는 중이었다.

이를 알기라도 하듯 시간 차이를 두고서 두대의 카메라가 내게 왔다. 바다로 가출한 카메라가 꽃단장하고 돌아오기 전까지 심심한 손 위로 해주라고 앞서서 보내고 가져온 마음이 꽃보다 향기롭다. 다 꽃이 맺어준 인연이기에 만나는 곳마다 꽃자리다.

나름대로 손에 익히다 보면 어느덧 꽃시계는 섬진강에 매화 필 때가 될 것이다. 마음은 벌써 은근히 스며드는 매화향기에 취하듯 그리운 이들과 함께할 날을 기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섬진강 책사랑방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의 '헌 책방 대우'(since1978)가 옮겨 온 자리다. 섬진강가 모텔을 개조해 3층까지 책이 빼곡하게 자리 집았다. 1층엔 '북카페 선'도 운영 중이다.

시간의 흔적을 품은 책들을 일삼아 구경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다소 어지럽게 놓이고 책장에 박힌 책들 속에서 옛 기억 소환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첫 방문 기념으로 글을 쓰고 시진을 찍는 사람 이지누의 책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2004 샘터사) 을 손에 들었다. 표지를 넘기자 "2004. 5. 18 예일 신경외과병원 입원실에서..."라는 연필 글씨가 책이 걸어온 흔적을 짐작케 한다.

몇몇 책은 마음 속으로 찜 해두고 왔으니 종종 들러 새로운 인연으로 맞이 할 날을 기약해 둔다. 이곳에서 내가 만난 책 제목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 처럼 "섬진강 책 사랑방"이 좋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쌓인는 공간이길 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심 있고 눈밝은 지역 사람들의 따뜻한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섬진강 책사랑방
전남 구례군 구례읍 섬진강로 46
T. 061)782-38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