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근黃槿'
제주도를 특별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식물 중 하나다. 첫눈에 보고 반해 모종을 구했으나 추운 겨울을 건너다 깨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제주 좋은 벗이 씨앗을 발아시켜 나눔한 것을 소중히 키우고 있다. 꽃 볼 날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기만 하다.
 
깔끔하고 단정하며 포근하다. 이 첫 느낌에 반해 오랫동안 곁에 머물렀다. 연노랑의 색부터 꽃잎의 질감이 탄성을 불러온다. 여기에 바닷가 검은 돌로 둘러쌓여 아름답게 핀 모습이 꽃쟁이의 혼을 쏙 배놓았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식물 Ⅱ급인 '황근'은 말 그대로 "노란 꽃이 피는 무궁화"다. 국화인 무궁화가 오래전에 들어온 식물이라면 황근은 토종 무궁화인 샘이다. 어딘지 모를 바닷가 검은 돌틈 사이에 제법 넓은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무궁화처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저버리는 하루살이라 꽃이라고 한다. 미인박명의 아쉬움은 여기에도 해당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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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바람이 불면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한잔 해야지
붉은 얼굴로 나서고 싶다
슬픔은 아직 우리들의 것
바람을 피하면 또 바람
모래를 퍼내면 또 모래
앞이 막히면 또 한잔 해야지
타는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
목마른 가슴은 아직 우리들의 것
어둠이 내리면 어둠으로 맞서고
노여울 때는 하늘 보고 걸었다

*이시영 시인의 시 '바람이 불면'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리운 것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느친다.

#류근_진혜원_시선집 #당신에게_시가_있다면_당신은_혼자가_아닙니다 에서 옮겨왔습니다. (08)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구례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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莫笞牛行 막태우행

소를 매질하지 마라, 소는 불쌍하니
아무리 네 소지만 꼭 때려야 되느냐?
소가 네게 무엇을 저버렸다고
걸핏하면 소를 꾸짖는 거냐
무거운 짐 지고 만 리 길을 다녀
네 어깨 뻐근함을 대신해 주고
숨을 헐떡이며 넓은 밭을 갈아
너의 배를 불려준다
이만해도 네게 주는 게 많은데
너는 또 걸핏하면 올라타는구나
너는 피리 불며 희희낙락하다가도
소가 힘들어 천천히 가면
꾸물댄다고 또 꾸짖어 대며
몇 번이고 매질을 하지
소질 매질하지 마라, 소는 불쌍하니
하루아침에 소가 죽는다면 넌들 살 수 있겠느냐?
소 치는 아이야 넌 참 어리석다
소의 몸이 무쇠가 아닌데 어찌 배겨 내겠느냐?

*고려사람 이규보 시 막태우행이다. 농경사회에서 소의 존재가 어떨지는 짐작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그것을 넘어선 무엇을 본다.

그림은 김홍도의 기우취적이다. 예로부터 우리음악에 쓰이는 악기 중 가로로 부는 것을 적笛이라 쓰는 저라 읽었다. 이규보의 막태우행에 등장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이긴 하지만 소 등에 올라 이 악기를 부는 모습을 상상만으로도 운치 있어 보인다.

땡볕의 여름날 내리는 소나기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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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꽃풀'
봤다고 꽃을 찾는 걸음은 한결 여유릅다. 눈에 익은 곳으로 들어서자 시선은 한쪽방향으로 향한다. 무리지어 핀 녀석들과는 슬쩍 눈인사만 하고 당당하고 의젓하게 홀로 피어 숲을 지키고 있는 개체를 주목하고 그윽한 눈맞춤을 한다.

키큰나무들 우거진 계곡 옆 비탈면에서 가냘픈 꽃이 실바람에 흔들리며 반갑다고 인사를 건넨다. 초록의 그늘 아래 빛나는 하얀색이 잘 어우러진 풍경이 일품이다.

꽃이 피는 가지가 실처럼 가늘다. 이름을 짐작케하는 모습이다. 실마리꽃으로도 불린다. 작고 여려보이지만 곧은 줄기에서 전해지는 모습은 숲의 주인으로써의 당당함이 보인다.

멸종위기종으로 분류하여 보호를 하고 있다는데 가까이서 지켜본 이의 말에 의하면 의외로 강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이라고 한다.

씨앗 발아된 개체를 분양 받아 온 실꽃풀이 한해를 넘기고 살아서 자리를 잡아간다. 꽃은 언제 필지 모르지만 늘 발걸음을 부르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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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객잔 - 김명리 산문집
김명리 지음 / 소명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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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쯤 머물러 있을까

가을 문턱에서 손에 든 책이다. ‘단풍객잔이라는 제목이 주는 이끌림이 크다그동안 책과 제법 친하게 지내왔다고 하지만 고백컨데 김명리 시인을 알지 못한다이 첫 만남이 시인의 시 세계로 이어질지도 장담하지 못한다그런 만큼 저자에 대한 정보 없이 오롯이 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곧 가을이 오리라

양광(陽光)은 등에 따갑고 그늘 쪽은 어느새 스산하다햇빛과 그늘의 스미고 흩어지는 경계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거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좀 더 오래 머뭇거려도 좋을 시기가 이즈음인 듯하다.“

 

첫 장을 열어 '단풍객잔으로의 초대'라는 짧은 글을 거듭해서 읽으며 시인이 머무는 시절을 짐작만 한다객잔에는 머무는 현재에 대한 주목보다는 지나온 시간에 대한 되돌아봄에 머물러 있다책에 담고자 하는 의의 반영일 수도 있고저자가 머물러 있는 생각의 시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엄마·고양이여행...... 일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현재진행형 보다는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스치는 풍경처럼 펼쳐진다단풍이 물들어가는 것이 봄과 여름을 지나오는 동안 둘러싼 환경과 상호작용으로부터 영향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감정이 이입된 듯 보이지만 먹으로만 그려진 수묵화를 보는 듯 그저 담담하게 읽힌다그림이나 글이나 보고 읽는 이에 따라 다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고 그때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그것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건너 띄기도 하고 되돌아와 다시 읽기도 하면서 결국 찾아가는 곳은 첫머리 단풍객잔으로의 초대해결되지 않은 갈증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는 듯 반복해서 읽지만 말라가는 단풍잎의 바삭거림으로 남는다단풍이 품고 있는 시간적 이미지와 객잔이 담고자 하는 공간이 오늘로 귀결되는 시점은 언제나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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