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수요일

산문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 옴을

*송수권 시인의 "산문에 기대어"다.

#류근_진혜원_시선집 #당신에게_시가_있다면_당신은_혼자가_아닙니다 에서 옮겨왔습니다. (26)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구례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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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秋霜
어제 밤사이에 내린 서리에 뜰이 하얗게 되었다.겨울 한복판으로 내달리는 때 이 단어가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본래자리가 어딘지를 잊고 혼란을 자초하며 설치는 무리들로 시끄러운 세상이다. 무엇보다 어른의 기세등등하고 엄한 가르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바짝 긴장한 몸이 서리꽃으로 오늘 날씨를 짐작한다. 산 너머 온기가 솟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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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댁의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
 
김용준의 수필 '매화'의 첫 문장에 끌려서 그렇지않아도 학수고대하던 매화 피었다는 소식에도 해가 바뀌어서 만나려고 참았던 꽃나들이를 한다. 진주 벗에게 청하여 기어이 探梅탐매의 길을 나섰다. 귀한 이와 함께 한 시간에 매향이 가득하다.
 
100년의 시간이 응축되어 피어난 매화는 그 품을 쉽게 열 수 없다는듯 드문드문 꽃망울을 열고 있다. 봄이 오기 전에 다시 만나자는 뜻이리라. 홍매가 서둘러 곱디고운 붉은 속내를 전하고 있다.
 
마주도 보고, 뒤에서도 보고, 내려다도 보고, 올려다도 보며, 때론 스치듯 곁눈질로도 보고, 돌아섰다 다시 보고, 보고 또 본다. 이렇듯 매화에 심취하다 보면 매화를 보는 백미 중 다른 하나를 만난다. 어딘가 다른듯 서로 닮아 있는 벗들의 매화를 보는 모습이다. 지난해 먼길 달려와 소학정 매화를 보던 꽃벗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눈길에 나귀 타고 탐매探梅에 나선 옛사람들의 마음을 알듯도 하다.
 
섬진강에 매화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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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끼소.
하나 더 있으니 난 괜찮소"

부실해 보였나 보다. 추운 윗 지방 올라간다고 나름 준비도 했는데 동해안의 온기에 방심했을 것이다.
망연자실, 자작나무 숲 입구에서 몰아치는 찬바람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벗어 목에 두르라고 내미는 그 마음과 한가지다.

지난번엔 마음 졸이며 왕복 8시간을 운전하게 했고, 어쩔때는 양말 벗어 등에 업고 냇물도 건너주었다. 내어주는 정이 만만치 않아 늘 주저하면서도 기꺼이 받는다. 주는 정과 받는 정이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꽃길에서 얻는 벗의 마음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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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궁가 중 토끼화상 그리는 대목

그때여 별주부가 세상을 나가는디 토끼 얼굴을 모르는 것이었다. 화공을 불러 들여 토끼화상을 한 번 그려 보는디

화공을 불러라 화사자 불러 들여 토끼 화상을 그린다
동정 유리 청홍련 금수추파 거북 연적 오징어 불러 먹 갈아 양두화필을 덜퍽 풀어 단청채색을 두루 묻혀서 이리저리 그린다
천하명산 승지강산 경계보던 눈 그리고
봉래방장 운무중에 내 잘 맡던 코 그리고
난초 지초 왠갖 댕초 꽃 따먹던 입 그리고
두견 앵무 지지 울제 소리 듣던 귀 그리고
만화방창 화림중 펄펄 뛰던 발 그리고
대한 엄동 설한풍에 방패하던 털 그리고

두 귀는 쫑긋 눈은 오리도리 허리는 늘씬 꽁댕이는 모똑 좌편 청산이요 우편은 녹순데 녹수청산 해 굽은 장송 휘늘어진 양유송 들락날락 오락가락 앙거주춤 기난 토끼 화중퇴 얼풋 그려 아미산월 반륜퇴
이어서 더할 소냐

아나 옛다 별주부야 니가 가지고 나이거라

*먼 곳을 도는 꽃놀이의 맛에 빠져 앞산을 외면 했다. 겨우 꽃 지고 열매마져 땅으로 돌아가는 때에서야 발걸음을 한다.

오며가며 눈맞춤 하던 것이 이번엔 발걸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기어이 내려가 깊은 인사를 건네고서야 보내주는 심사를 짐작할만 하다.

수궁을 떠나 토끼 찾아 헤맨지 얼마일까. 늦기 전에 수궁으로 돌아가길 빈다.

https://youtu.be/0oSK76RLPKc
인간문화재 남해성의 소리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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