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수요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경림 시인의 시 "길"이다. 나의 길을 돌아본다. 나는 내 길을 걷고 있나.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구례통밀천연발효빵 #들깨치아바타 #곡성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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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 秋日
竹分翠影侵書榻 죽분취영침서탑
菊送淸香滿客意 국송청향만객의
落葉亦能生氣勢 낙엽역능생기세
一庭風雨自飛飛 일정풍우자비비

대 그림자 파랗게 책걸상에 앉고
국화는 맑은 향기를 보내 나그네 마음을 가득 채우네
뜰 앞에 지는 잎 뭐가 좋은지
쓸쓸한 비바람에 펄렁대누나

*조선사람 매헌 권우(1363∼1419)의 시다. 조선전기 원주목사, 예문관제학, 세자빈객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이다.

된서리 내렸다지만
국화의 기상을 꺾지는 못한다.
어떤 이는 술잔 나눌 이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누이를 생각하며
다른 이는 은일에 벗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가을을 떠올린다.

난 술도 못하고
생각할 누이도 없고
더군다나 은일은 꿈도 꾸지 못하기에
그저 바라만 볼 뿐ᆢ.

각시覺時 -불현듯, 알아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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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뿔투구꽃
비슷한 종류의 꽃들은 거듭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어서 구분이 된다. 하지만 봐도봐다도 구분이 어려운 것들이 있다. 내게 있어 그중 하나가 이 투구꽃 집안이다.
 
일반적으로 투구꽃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흔하게 볼 수 있어 그런가 보다 싶은데 여기에 수식어가 붙으면 곤란해진다. 노랑투구꽃, 각시투구꽃 여기에 놋젖가락나물, 백부자에 또 바꽃으로 가면 더 혼란스럽다. 직접 본 것도 그런데 보지 못한 것들이 많으니 더 아리송하다.
 
세뿔투구꽃은 우선 5각형이나 3각형의 잎에서 차이가 있어 그나마 구분할 수 있겠다. 꽃은 하늘색으로 피었다가 점차 옅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세뿔투구꽃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고유종으로 2012년부터 멸종위기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식물의 각기 특성을 올바로 알기에는 어려운 점들이 많다. 기회되는데로 실물을 접하며 그 차이를 알아가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처음 본 것으로 만족하며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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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국
우여곡절을 겪으며 바다를 품고 있는 해국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올해는 이러저런 이유로 그 바다의 해국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철이 조금 지난 것이라도 봐야겠기에 서해바다로 갔다.

동해의 울진, 남해의 완도와 서해의 변산 그리고 제주 검은돌 해변의 해국까지 두루두루 보았다. 각기 다른 매력으로 존재감을 뽑내고 있었다. 터전을 떠나 내 뜰에 들어온 해국도 꽃을 피워 아쉬움을 달래주었지만 해국은 바다에서 봐야 제맛인 것을 안다.

나고 자란 환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향한 그리움을 온전히 담는 것은 한치의 다름도 없었다. 바다를 향한 그 진한 속내를 품었으니 내 가슴 언저리에 해국 향이 스며들었으리라 짐작한다.

바닷가에 자라는 국화라고 해서 해국이라 하기에 바다를 빼놓고는 떠올릴 수 없는 꽃처럼 내게 해국은 벗들의 따스함을 온몸을 느끼게 해준 꽃이다. 울진과 제주의 벗들을 오롯히 품게하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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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의 사람ㆍ3
그는 꽃밭을 만들었다
계절마다 서로 다른 꽃들이 가득 피고 나비와 별들도 찾아온다
달팽이와 지렁이도 함께 산다
누군가 어느 날 이 꽃을 모두 따간다 해도 그는 걱정 없다
꽃 심기 메뉴얼은 그의 머릿속에 다 들어 있다
어느 계절에 어떤 꽃을 어떻게 심어야 할지 그는 잘 알고 있다
그의 방에는 꽃씨 봉지가 가득 든 가방이 있다
그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또 하나의 꿈이 있다면
누군가가 자기만큼 꽃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거다
그에게 이 가방을 선물할 것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어디쯤에 그가 꽃밭을 가꾸기를 바란다
같은 바람이 두 꽃밭을 오갈 것이고
같은 나비도 벌도 오갈 것이다
그가 갖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꽃밭을 가진 이웃이다
그때는 꽃씨가 든 가방을 또 만들 것이다
이 세상이 꽃씨가 담긴 가방을 든 사람들로 넘쳐 나는 것
어디선가 바람이 꽃 냄새를 실어나르는
꽃밭이 새로 생기는 것이 그의 꿈이다
그에게 오후 세 시는 오전 아홉 시이고 오후 다섯 시다
그에게는 꽃이 시계다
 
*최옥정의 '오후 세 시의 사람'에 나오는 '오후 세 시의 사람ㆍ3'의 일부다. 꽃씨 봉투를 받고 보니 이 글이 생각나 하루 종일 이리저리 찾다가 포기했는데 이른 아침에 불쑥 생각이 났다. 마음에 닿는 온기가 남다르지 않아 다소 긴 문장을 옮긴다.
 
눈길 속에서 시작된 꽃이 피고 지는 때를 따라 이곳 저곳을 넘나들며 한해를 살아왔다. 꽃이 궁해진 시간을 건너 다시 꽃 따라 가는 여정 속에 서기까지 다소 틈이 생겼다. 틈은 쉼이고 숨이기에 꽃이 전해준 꽃마음을 조금씩 풀어 내 그 틈을 메꿔갈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만큼 꽃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거다"라는 문장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바람과 나비와 벌이 오가는 거리에 있는 그 사람이 내겐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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