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다. 숲에 드는 날에는 어김없이 나무에 주목한다. 특별하게 골라서 보는 나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주목하는 나무의 기준은 있다. 그 첫째가 수령이다. 땅에 발붙이고 한 자리에서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나무를 보면 한순간 모든 것을 멈추고 나무곁을 조심스럽게 탐문한다. 시간을 겹으로 쌓아온 나무의 품에서 풍기는 기품을 살피며 그에 걸맞는 수피와 가지의 모양, 상처의 흔적, 밑둥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한다.
그보다 더 정성을 들이는 것은 나무를 만지며 전해지는 온도를 느끼고 두팔벌려 껴안아 품으로 전해지는 무게를 짐작하는 일이다. 나무 껍질의 딱딱함의 정도와 일정한 온도가 전해주는 안정감을 확인하면서 품으로 전해지는 시간의 무게를 담고자 한다. 나만의 일정한 의식을 치루고 나면 나무 곁에 앉아 숲의 소리를 듣는다.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는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이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不滿足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이양하의 '나무'라는 글의 첫단락이다. 나무를 주제로 한 글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글이다. 나도향의 '그믐달', 박지원의 '호곡장好哭場론, '사장士章 애사哀辭'와 함께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는 글이다.
이양하는 이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죽어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輪廻說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그 마음은 충분히 잠작하고도 남는다.
그렇더라도 나는 나무처럼 평생을 발이 묶인채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나무의 성가진 친구가 되는 새나 바람으로 사는 것도 탐탁치 않다.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와 빙그레 웃어주는 달이면 좋겠는데 그건 욕심이 과한듯 싶어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주저한다. 하여, 가만히 속으로 읊조려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