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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지하철역의 백수광부 - 유경숙 엽편소설집 ㅣ 푸른사상 소설선
유경숙 지음 / 푸른사상 / 2017년 4월
평점 :
타고난 이야기꾼 유경숙의 짧지만 긴 이야기들
이야기꾼은 따로 있나 보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내 입을 통하는 순간 다큐멘터리가 되고 마는 사람으로 살다보니 말하기보다는 주로 듣는 편에 서 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감정은 숨기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순간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다. 간혹 분위기에 편승해서 우스겟소리라도 한마디 하려면 처음 생각과는 달리 스스로의 감정 조절을 못하며 매번 먼저 웃고 만다. 그러니 재주 좋은 이야기꾼을 만나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청어남자’로 만났던 작가 유경숙의 ‘베를린 지하철역의 백수광부’는 엽편소설 모음집이다. 익숙치 않은 단어 엽편소설葉片小說은 나뭇잎처럼 작은 지면에 인생의 번쩍하는 한순간을 포착, 재기와 상상력으로 독자의 허를 찌르는 문학양식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지극히 짧은 60여 편의 이야기가 여섯 가지 테마로 분류되어 담겨 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역사드라마 한 장면을 보는 듯도 하고, 작가의 일상이 담겨 있는 듯도 싶고, 낯선 여행지에서 그보다 더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는 듯도 싶은 이야기들이다.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드는 첫 번째 생각은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무엇인가 분명 있긴 있는데 쉽게 손에 잡히지 않은 모호함이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아~맞다” 라며 뒷북을 치게 만든다. 이처럼 지극히 짧은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어떤 이야기 하나라도 허투루 넘어갈 수 없는 무엇이 숨어있다. 그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면서 이야기를 쫒아가는 맛이 참으로 좋다.
“어느 인간이든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감추고 싶은 옹색한 골짜기 하나씩을 갖고 있다. 그늘지고 축축한 골짜기에 웅크리고 있는 취약한 존재, 그 취약한 영혼에게 말을 걸며 손을 잡아주는 것”이 소설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이러한 바람은 이미 이뤄진 듯하다. ‘베를린 지하철역의 백수광부’에 담긴 이야기들은 재주 좋은 이야기꾼이 자신만의 이야기보따리를 슬그머니 풀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절대 강요하거나 억지스럽게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사이 이야기가 끝나 있다. 재주 있는 이야기꾼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만들었다가 이야기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여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의 여운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오랫동안 이야기 속을 서성이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한 것처럼 작가 유경숙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세상과의 불화 때문에 마음이 꽉 닫혀버린 이에게 바늘귀만큼의 구멍이라도 뚫어주고, 깊은 상실감으로 가슴 한편이 구멍 난 사람에겐 바람막이 점퍼를 입혀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제 입술을 열어 스스로 말하고 집 한 채씩을 짓도록 돕고 싶었다.”는 작가의 사람들을 향한 온기 가득한 마음을 오롯이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