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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집착, 존재의 근거이자 파단의 이유
‘채식주의자’를 통해 작가 한강을 만나는 키워드로 스스로를 가둔‘벽’으로 이해했다. 작가가 추구하는 인간의 정체성의 확보에 이 벽을 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해결해 가는 방법으로 작품의 연결고리를 찾아가 본다. '채식주의자'로 대표되는 소설의 '몽고반점', '나무불꽃' 이 세 가지 중편 소설의 출발이 '내 여자의 열매'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두 번 째로 작가 한강을 만나는 작품으로 단편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를 손에 들었다.
‘내 여자의 열매’에는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붉은 꽃 속에서', '아홉 개의 이야기', '흰 꽃', '철길을 흐르는 강' 등 총 8편의 단편 작품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일상을 꾸려 가는데 대한 고단함과 이를 뚫고 미래를 희망으로 끌어안고 나갈 힘’이 없는 모습들이다. 사람들과의 어긋난 관계에서 스스로를 다독이지 못하고 그 상황에 끌려 다니는 실상을 면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채식주의자’를 탄생하게 만든 작품이 ‘내 여자의 열매’다. 이 작품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한 여자가 세상 끝으로 떠나고자 하다가, 사랑도 세상 끝까지 가는 한 방법이라고 믿으며 결국은 결혼하여 정착해 일상적인 삶을 산다. 어느날 몸에 반점이 생기고 그 반점이 점차 온 몸으로 번지는 동안 그녀와 남편 사이에는 점차 사랑이 없어지고 말이 없어진다. 의사소통이 힘들어지고 먼 곳으로 달아나는 꿈이 좌절되자 그녀는 베란다에 나가 점차 식물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베란다 천장을 뚫고 옥상 위까지 뻗어 오르는 꿈을 꾼다.”는 내용이다.
자신을 지탱해온 육체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근원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성장 과정에서 겪은 일이나 현실의 삶을 부정하며 다른 세상을 향한 나아가는 것도 좌절된 허망함이 존재한다. 그 안에 집요한 집착이 있다. 고시원의 퀵서비스맨의 파탄난 사랑, 몸에 있는 흉터가 자신을 지배하는 남자의 방황, 떠난 아내를 찾아다니다 남겨진 아이와 동반자살을 꿈꾸는 남자 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감춰진 그 무엇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버거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가는 작가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 모든 사람들은 크고 작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며 그 관계로부터 영향을 주고받는다. 관계의 주인이면서 대상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상화된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여 문제의 해결은 당연하게도 스스로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들 작품 속에서 작가 한강이 그려내는 인간형은 사회적 관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항변으로 읽힌다. 그들로 표상되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