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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중인들 - 정조의 르네상스를 만든 건 사대부가 아니라 중인이었다
허경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3월
평점 :
중인, 조선을 일구어낸 사람들
조선 후기의 역사를 보면서 주목하는 것은 사람관계였다.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을 중심으로 소위 백탑파로 불리워지는 일련의 사람들의 사귐을 보면서 저런 사귐을 하고 싶다는 부러움과 동시에 현실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한 좌절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단순히 벗이라는 사귐의 범위를 넘어서 당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 사람들이다. 특히,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그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만남이 돋보인다. 이들이 활동했던 조선 후기는 조선 왕조에서 학자군주로 통하는 정조의 치세기간 이기도 했다.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시대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그 시대적 환경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활동이 맞물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처럼 조선후기의 특수한 상황에 자신의 처지와 조건을 발판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중인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조선시대 중인은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 계층을 뜻하고 좁은 의미로는 기술관리만을 의미를 한다. 넓은 의미의 중인은 15세기부터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하나의 독립된 신분층을 이루었다.
양반을 비롯한 사대부의 고급관료들은 정책결정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를 했다면 이들 밑에서 실질적인 일의 중심에 선 사람들이 바로 중인이며 이들에 의해 실무가 처리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종사했던 전문직으로는 의료(의원), 법률(율관), 금융(계사), 외교(역관), 천문지리(음양과), 미술(화원), 음악(악공), 문학(시인) 등 전문지식 분야와 예술 및 문화 분야가 주 활동 무대였다. 한 사회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일처리의 중심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계층으로 부상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허경진의 ‘조선의 중인들’은 바로 그 계층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문학동인 ‘송석원시사’는 조선 후기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대표적인 모임이고 일본에서 인기 있었던 역관시인 홍세태와 달마도를 그린 김명국를 비롯하여 ‘아희원람’,‘계몽편’을 편찬한 장혼, 고약전문 피재길, 침술의 대가 의원 허임과 백광현, 김정희에서 세한도를 받은 역관 이상적,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사 역관 변수, 바둑천재 유찬홍, 민족신문 ‘만세보’를 발행한 오세창처럼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찾아보고 그 사람들의 활동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의 상황을 살피고 있다.
이들 중인들은 왕실 및 조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생활 터전도 궁궐 근처에 있어야 했다. 많은 중인들이 궁궐 뒤 인왕산 기슭 굽이진 골짜기나 청개천 일대의 좁은 골목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인을 위항인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委) 작은 길가(巷)에 사는 사람(人)'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거처에 따른 것이다.
이들 속에서 인맥을 형성하며 한 흐름을 주도했던 조희룡을 주목한다. 19세기 대표적 여항시사인 벽오사(碧梧社)의 중심인물로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도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위항인으로 시서화에 두루 능한 사람이었다. 그를 주목하는 주된 이유는 학문·문장·서화·의술·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호산외사(壺山外史)’의 저자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박제가에서 김정희 그리고 이상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계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그간 조선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왕조사 중심이어서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역사인식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 조선 사회를 구성했던 다양한 계층으로 폭을 넓혀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이 추가되어 반갑기만 하다. 허경진의 ‘조선의 중인들’이 돋보이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등한시하거나 일부러 외면했던 중인들에게 주목하여 역사를 일구어갔던 사람들을 재조명하면서 새로운 역사인식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