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강흥수 지음 / 북향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개혁정신을 빼면 조광조는 없다

이상과 현실은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따로 있는 듯하다. 개혁정신에 대한 반대이며 현실 안주에 머무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 정치는 진보와 보수라는 양대 진영에서 각기 제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정치로 보기는 힘들다. 진보세력이 그만큼 미약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현실에서 정치개혁은 이상과 현실에서 현실의 문제에 주목하는 사람들의 이해요구의 방향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야당도 여당도 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로 본다면 현실정치의 답답함은 조금 이해가 갈만도 하다.

 

이러한 우리 정치현실에서 주목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500년 전 조선을 개혁코자 목숨바쳤던 조광조가 그 사람이다. 조광조는 천인무간(天人無間:하늘과 사람은 하나다)이라는 개혁 철학을 바탕으로, 무너져 가는 조선을 구하고자 몸부림치던 혁명가다.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분명 이상과 현실에서 이상을 실현하고 싶은 열망의 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나물에 그 밥 꼴인 현 정치인들 속에서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하는 현실이 오랜 시간이 지난 사람을 현실로 불러온다.

 

강흥수 역사 장편소설 조광조에는 한마다로 조광조는 없다. 개혁정치의 표상으로 조광조를 그려간다면 중심에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종반정 이후 조선 정치의 한계 속에서 조광조에 대한 주목은 여느 정치가와 비슷하게 그려진다. 중종의 신뢰에서 급부상하고 다시 중종의 관심에서 벗어나면서 몰락했지만 그의 정치행보를 그려가는 이 소설에서는 미적지근하기만 하다.

 

사람만 바뀌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다른 관점으로 주목해야할 시선을 흩트리는 말이다. 세상을 이루는 중심이 사람이기에 사람이 바뀌면 세상은 바뀐다.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에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세상을 정치제도나 사회구조로만 이해한다면 편협한 시각이다. 이 소설이 개혁의 조광조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시각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렇다고 조광조가 모든 부분에서 잘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 기술도 필요하다. 완급조절이나 선후문제 등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광조의 과감한 추진력은 혁명가 그것으로 봐야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둘 세상을 바꿔나갈 수 없는 시대적 한계에서 일시에 현실을 뒤엎을 과감함을 혁명 그것으로 보고 싶다.

 

현 정부의 국가개조론이 대두되며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질을 벗어나 곁가지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마치 본질을 바꾸는 것으로 오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 무엇을 희망하는지를 외면한다면 결국엔 그들의 이해요구를 실현시키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정부와 정치인들의 행보는 정치의 중심에 국민이 있는지 없는지를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다. 정치가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 정치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현실정치의 시금석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조광조를 주목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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