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세월이 가면
곽의진 지음 / 북치는마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한 어설픈 동거

지금쯤 그곳에 가면 기나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붉은 마음이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성급한 어떤 놈은 벌써 붉은 꽃잎을 내밀고 따스함이 묻어나는 봄바람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완도군 약산면 조그마한 바닷가를 점령하고 있는 동백나무 숲은 바다와 연이어 있다. 찬바람 쌩쌩 불던 어느 겨울 그 바닷가에서 맞이한 동백의 붉은 꽃잎에 한 동안 마음 빼앗겼던 적이 있다. 가끔 봄을 맞이하는 이때쯤이면 그곳 동백이 생각나곤 한다.

 

동백을 노래한 시인들의 마음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동백꽃의 붉디붉은 꽃잎에 마음 빼앗겨본 사람들은 안다. 모가지를 댕강 꺾듯이 떨어뜨리는 그 마음에 무엇이 담겨있지를 말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지는 붉은 동백꽃은 비록 바람을 따라 바닥을 뒹구는 수모조차 아름다움으로 생을 마감한다. 붉은 그리움을 남기듯 동백처럼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끝자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세기를 넘게 살아온 아버지와 반세기를 넘어 또 다른 반세기를 살아가는 딸의 마음이 어느 순간 수평선 너머로 지는 붉은 노을로 닮아 있다.

 

곽의진의 ‘섬, 세월이 가면’은 지는 저녁노을과 그 노을 곁에 머물고 있는 붉은 기운이 함께 만들어가는 섬 생활에 대한 자기고백이다. 고단한 도시생활을 벗어나 자신이 나고 자란 곳으로 다시 돌아가 거처를 마련하고 온전히 자신만의 삶을 살고자 했던 저자 곽의진이다. 아직 자신이 마련한 터에 적응도 못한 시기 병마에 지친 아버지가 들어온다. 자식도 버리고 떠나온 곳에서 느끼는 한가로움이 채 자리 잡기도 전에 손님처럼 왔다가 주인이 된 아버지의 마지막 삶을 지켜보고 함께 나누었다.

 

그 아버지는 자식에게 의지처이기도 하지만 때론 자신의 삶에 끼어든 이방인이다. 귀가 어둡고 똥오줌마저 가리지 못하는 늙은 몸이기에 수발드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저자는 그런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그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에 누구에게 하소연으로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도 않는다. 오히려 나쁜 딸이라며 스스로 자책하기 일쑤다. 취재일정으로 당일치기 아니면 1박2일 정도의 집을 비우지만 그 시간이 해방감과 더불어 떨치지 못하는 그리움이 함께한다. 딸자식이 이젠 아내이며 친구처럼 그렇게 자리 잡았다. 겨울 추위 지나고 몸만 추스르면 갈 것으로 생각했던 아버지와의 동거가 길어지면서 딸은 자신의 미래를 그 아버지에게서 본다. 섬 기행에서 늘 상 마주하는 붉은 저녁노을 속에 아버지와 자신의 모습이 함께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섬, 세월이 가면’은 저자가 섬에 정착하고 동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 아버지와의 동거생활, 섬 기행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이 세 가지 이야기가 한데 엉켜 사람살이의 온갖 감정이 녹아 있다. 저자의 눈을 사로잡았던 풍경이 사진으로 함께 있어 마치 저자의 발걸음에 동행하고 있는 생동감마저 들게 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가장 절정의 순간에 통째로 지고 마는 동백의 마음과 사라지기 직전 불타는 듯 장렬한 노을이 닮아 보인다. 어쩜 저자와 함께한 아버지의 생의 마지막이 그런 것 아닌가 싶다. 아버지의 마지막 생을 함께한 딸 저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아버지의 이미지는 가족 누구보다 오랫동안 남아 함께 할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다보면 분명 저자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접하기 마련인데 도중에 자꾸 저자가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는 책이 있다. 하여 책표지 안에 소개된 저자의 프로필로 눈이 간다. 스스로 표현에 의하면 그리 잘나가는 소설가는 아니지만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돌아온 고향에서 남은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 그 소소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