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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의 집
새러 그루언 지음, 한진영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인간과 자연의 공존 무엇이 전재 되어야 할까?
수년전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제니퍼 모건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다니’(지안출판사)를 통해 야생 활동을 하는 동물에게 수화를 가르쳐 그들과 인간이 소통하는 이야기를 접했다. 인간과 유사한 동물과 인간의 소통은 굳이 자연보호나 야생동물 보호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매우 의미 있고 흥미로운 사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흔히 동물에 대한 이러한 실험은 병원이나 제약회사가 인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전에 행하는 실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동물 실험은 찬반 양자의 입장차가 분명하게 갈린다. 동물보호자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버젓이 행해지는 이러한 실험을 어떻게 봐야 할까?
‘보노보의 집’은 소설 ‘다니’의 줄거리와 비슷하다. 멸종위기 동물에 대한 인간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대항하는 또 다른 인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다니’와 ‘보노보의 집’의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은 야생상태와 그렇지 않음의 차이다. ‘보노보의 집’은 대학 내 영장류언어연구소라는 시설 내에 갇힌 동물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이는 사소한 차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분명 야생의 자연활동과 연구소의 우리는 다른 환경이기 때문이다.
처음 듣는 동물 ‘보노보’는 ‘피그미침팬지’(Pygmy chimpanzee)라고도 한다. 침팬지와 매우 흡사한 동물이며 이 둘을 구분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열대우림에 살면서 무리활동을 하고 음성체계가 사람과 다르지만 언어학습 능력이 있다. 이것으로부터 이 소설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학습 능력이 있는 보노보를 대학의 연구실에서 수화를 가르쳐 간단한 소통을 하면서 보노보의 전반적 생활 습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소에 영장류의 언어와 인지능력에 관심이 있던 신문기자 존 티그펜이 찾아오고 그날 저녁 연수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폭탄테러를 당한다. 연구소의 연구원인 이사벨이 얼굴과 몸에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하며 연구소의 보노보들의 상황에 애를 태운다. 이 보노보들은 대학에서 한 기업으로 팔려가고 만다. 여기에는 커다란 음모가 있다. 사업가의 돈과 연구소 관련자의 야망이 결합된 것이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기업가는 보노보들을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된 집안에 가두고 이를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하여 리얼리티 TV쇼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린다.
한편, 사고이후 보노보들의 행방을 찾던 폭발당시 상처를 입었던 연구원과 사고 당일에 연구소를 찾았고 리얼리티 TV쇼가 진행되는 ‘보노보의 집’에 취재를 온 기자가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만나게 되고 이들의 노력으로 보노보들은 안전하게 구출된다.
동물의 언어와 인지능력을 알아내는 것이 인간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우리에 가두어두고 먹이를 공급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아낀다고 하는 것이 그 동물들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바람직한 환경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어쩌면 불가피하게 이러한 실험을 할 수밖에 없을 지라도 지극히 제한적인 조치가 필요하리라. 이러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이야기하는 동물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 대한 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동물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만이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전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멸종위기동물인 보노보를 알리고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동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오는 이 소설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