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과거에서 현재의 답을 찾다
누구보다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도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일생이 더해져 만들어져 온 것이 역사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되어지고 후대사람들에게까지 그 이름을 떨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역사를 살피다보면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오기되는 기록들이 많고 그것은 권력싸움에서 힘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선시대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당쟁을 생각하게 된다. 마치 권력을 향해 거칠 것 없는 무자비한 싸움을 통해 백성의 안위나 정책의 대의는 상실되고 오직 당파의 이익만을 앞세워 상대편을 꺼꾸러뜨리려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이 또한 본질은 사라지고 겉모양만 남아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정치가로 송시열(1607~1689)을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 그 송시열의 당파와 등을 지고 대결을 벌렸던 사람인 윤휴(1617~1680)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시대 인조반정 이후 효종, 현종, 숙종 대처럼 국, 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효종의 북벌정책이 무너지고 청과 명나라 틈바구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조선의 관료들은 1, 2차 예송 논쟁이라는 것으로 다시 한바탕 내분을 겪는 시기였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바로 조선 중, 후반기 송시열과 대척점에 서있었고, 천문, 지리, 병법, 역사를 넘나드는 진보적이며 자유로운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윤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에서 개혁을 꿈꾸었던 많은 사상가들이 정적에 의해 그 꿈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목숨을 내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윤휴 역시 그렇게 죽임을 당했던 사람이다. 

묻힌 역사를 꺼내 대중과 공유하고 소통하려는 역사학자 이덕일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윤휴에 관한 이 책은 주자학이 모든 학문의 지표로 되었던 시대 주자를 해석하고 학문의 본질에 접근하려했던 사상가, 시대를 앞선 개혁을 꿈꿨던 정치가로써 윤휴를 주목하고 있다. 무엇보다 효종의 죽음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북벌에 대한 의지가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국제 정치가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점이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등을 지게 하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결국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아야 했던 것이다. 

특히, 지패법과 호포법, 만인과, 체부, 수레제작 등 윤휴가 제기했던 다양한 정책은 당시로써는 급진적인 개혁으로 양반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당파를 불문하고 지지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과 동등한 사대부의 일원으로 치부하는 송시열과 노론 세력에 의해 왕권을 추락하고 신권이 우위에 선 상황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정치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틈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내 놓아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대의를 실천하는 그 중심에 윤휴가 있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 그리고 실제 그렇게 죽여왔던 시대, 그런 증오의 시대의 유산은 이제 청산할 때가 됐다. 백호 윤휴의 인생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저자 이덕일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윤휴의 죽음이 상징하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윤휴를 재조명하는 것은 잊힌 한 사람에 대한 흥미를 넘어서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왜곡된 정치 현실과 역사를 바로잡는 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점이 잊힌 윤휴를 현실로 이끌어 내는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역사를 보는 동안 늘 주목되는 점은 ‘역사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일 것이다. 같은 사건, 동일한 인물에 대해서도 무엇을 어떻게 보고자 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천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덕일이 역사를 보는 시각이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지금 현재를 올바로 살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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