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평점 :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어떤 책을 읽고 그 저자의 전작을 찾아 읽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는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 :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2]를 읽고 일부러 찾아본 책이다. 내용도 만만찮은 것이지만 저자의 맛깔스런 글맛에 더 매료되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는 독특한 답사기다. 우리 역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던 여성들을 찾아가는 길에 시대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교류와 소통이 없는 삶] 우리역사에서 여성을 표현하는 말로 이보다 더 적적한 말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봉건사회, 남성주의, 신분적 한계 등 자신을 옭아매는 숱한 제약 속에 한 인간으로 가지는 본질적 가치를 표현할 수 있기까지 겪어야 했을 정신적 고통은 어떠했을까? 교류와 소통이 없는 삶이 스스로 결정한 자의적 단절이 아니기에 그로부터 받는 심적 갈등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책 속에는 승자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았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 사라져가는 신라의 당당했던 여성이 있다. 이름조차 없이 누구의 부인이라 불리면서 망부석으로 존재하는 박제상의 부인이 있고, 삼국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전쟁의 시기를 온몸으로 맞서 이겨냈던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있다. 한 세대 터울로 강릉이라는 같은 고장에서 나고 자란 허난설헌과 신사임당 역시 시대를 넘어선 예술을 추구하던 자유로운 정신이 그들이 남긴 작품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어쩌지 못하는 신분의 굴레를 짊어지고 태어났지만 신분적 한계가 어쩜 예술로 승화된 것인지도 모를 부안의 매창이 있다. 어수선 했던 해방 전후 신여성이라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에 앞장선 자유영혼의 소유자 김일엽, 나해석이 있고, 온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안고 시를 통해 사람에 대한 애정을 실천했던 고정희가 그들이다.
경계에서 살았던 사람들
그들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시간과 공간, 억압과 자유, 현실과 피안의 경계를 살았던 그들을 오늘의 시점에서 해석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의미를 세워가는 길이기에 그녀들의 꿈과 그녀들의 정신과 예술작품을 오롯하게 되살리는 고단한 작업인 것이다. 그들이 첨예하게 서 있었던 그 경계는 그 시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남녀를 떠나 인간으로써 자존을 지켜내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두가 서 있는 경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시대를 앞서가는 자유를 가슴에 담은 사람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이 책은 여성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다분히 저자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고 그것을 솔직히 표현하는 책이지만 감칠맛 나고 따사로우며 때론 도발적이기까지 하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1000년을 훌쩍 넘는 그 자리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 결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성들을 따라가는 과정에 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기에 저자의 주장에 억지스럽지 않다. 이것이 이 책을 가지는 커다란 장점이다.
[내 생각이 아닌 생각은 얼마만큼 내 안에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혈액처럼 나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본문 241페이지)
남성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시대 지금도 여전히 그 뿌리가 깊은 시대에 여성인 저자가 여성의 눈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나 역시 남성중심 이데올로기에 젖어있는 내 시각을 부인하지 못한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불쑥불쑥 나타나 내 앞을 흐리는 것들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우리 땅 어디에도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여성은 눈으로 발굴하고 정리해서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고 저자의 기본 시각에 공감을 표하고 싶다. 그래서 역사의 당당한 두 축으로 남녀가 평등하게 미래를 개척하는데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
이 책의 주인공들이 오늘날 다시 깨어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사는 현시대를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누군가의 기억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