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
원철 지음, 이우일 그림 / 호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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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반야의 길
불가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어느날 라디오를 통해 교양불교대학 학생모집 광고를 통해서라고 봐야겠다. 전부터 마음으론 친숙한 절집과 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자주 찾았던 인연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날 이후 2년을 꼬박 일주일에 두 번씩 다녔다. 그 과정에서 불교교리를 비롯하여 스님들과의 교류도 하게 되었다. 불교는 그렇게 종교로 보다는 학문적 호기심이 더 강하게 작용하여 나와 인연이 되었다. 여러 경전을 접하고 절집예절을 익히는 동안 늘 함께한 의문이 있었다. 스님들의 수행과 그 수행과정에 늘 함께하는 스승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그 영향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그 후 지금까지 스승을 찾는 내 행보는 계속된다.

선불교의 1700공안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때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말장난 같은 이야기를 듣고 뭔지 모를 이끌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부처님 열반 후 이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불성을 찾아 도를 이루려는 수행의 과정은 시대를 거쳐 오며 조금씩 모양세가 변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유효한 것은 자신의 깨달음이 아닐까 한다.
수행의 길을 걸어갔던, 지금도 용맹정진하고 있는 구도자들에게 깨달음을 얻게도 하고 곤란을 겪게도 했던 화두는 출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수행의 길에 있는 누구에게나 의미심장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불립문자이라고 했던가? 어떻게 보면 1700공안의 세계는 나와는 다른 차원의 세상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깨달음의 고단한 길을 가는데 길잡이가 될 스승일수도 있지만 문자가 주는 한계에 갇혀 헤어나지 못할 깊은 수렁 같은 것이다.

원철 스님의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는 출가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선불교의 진수를 1700공안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수행의 길로 안내하는 도구로써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겠다. 할은 큰 고함소리로 꾸짖어 무명을 죽이고 방은 몽둥이질로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똥막대기니, 무(無)자니, 이뭣고니 나로서는 무의미 할 것 같고,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공안을 통한 수행의 세계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소유로 세상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살아갈 것 같은 스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불가의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도 곁들인다.
생사불이라는 불가의 도리에 수행자가 임종했을 때 치르는 장례지치에 대한 이야기나 방편이라는 미명하에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 중도라는 명분으로 원칙을 적당히 포기하는 모습 등은 제가 수행자의 눈으로 볼 때 방망이질이 적당한 처방이 아닐까 싶다.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는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중생들에겐 로망 같은 선불교의 1700 공안을 매개로 선불교의 역사와 더불어 수행의 길에 대해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하는 책이다. 적절한 비유와 대목대목 웃음이 나는 이야기로 어렵기만 한 화두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말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반야의 길, 그 수행의 길에 발을 내 딛을까 말까 망설이고만 있는 중생에게 공안 하나하나 수행의 길에 스승의 역할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게 하는 내용은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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