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비나 짙은 안개, 사나운 바람이 불어도 가리지 않는다. 1년 중 봄놀이에 비 오고 안개 끼고 바람 부는 날을 제외하면 놀 만한 날이 매우 적다. 비 오는데 노는 것을 ‘꽃 씻는 일(세화역 洗化役)’이라 하고, 안개 자욱한데 노는 것을 ‘꽃을 촉촉하게 하는 일(윤화역 潤化役)’이라 하며, 바람 부는데 노는 것을 ‘꽃을 보호하는 일(호화역 護化役)’이라 한다. 옷과 신발을 아까워하여 병을 핑계대고 미루면서 미적미적하며 가지 않는 자는 아래 따로 적은 것과 같이 벌을 받는다."
*조선 후기 사람 권상신(權常愼, 1754~1824)이 ‘남고춘약(南皐春約)’의 두번째 규약이다. 그는 1784년 음력 3월 어느 날 벗들에게 남산에서 꽃놀이를 제안했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벗의 말에 날씨에 구애받지 말고 꽃놀이 가자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꽃놀이 길에선 보조를 맞춰 걷자는 규칙도 붙였다. 물론 벌칙도 있다. 꽃을 꺾어도, 잘 걷는다고 혼자만 가도, 규정시간이 지났는데 글을 못 짓고 끙끙거려도, 술잔을 잡고 가만있어도 벌주를 받는다. 재미있는 건 술이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다. 도저히 못 마시겠으면 술을 꽃 아래에 부으면서 머리를 조아려 “삼가 꽃의 신이시여. 주량을 살피소서. 주량이 정말 적어 술을 땅에 붓습니다” 하고 고해야 한다.
봄날 선비들의 꽃놀이 풍경이다. 옛사람들만 이렇게 놀았던 것은 아니다. 지난 주말 멀리서 벗들이 왔다. 하룻밤을 묵는동안 꽃을 사이에 두고 정담을 나눈 시간이 봄날처럼 짧았다. 오랜만에 만났고 더욱 오지 못한 벗들에 대한 마음이 더해지니 벗들과의 꽃놀이가 늘 아쉬운 이유다.
꽃놀이 하느라 짧은 봄날이 더 짧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