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서지에 연꽃이 피면 구경하기 위해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에 큰눈이 오면 한 차례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때 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가를 읊조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부터 준비물을 마련토록 하여, 차례대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까지 한 바퀴 돌아가 다 끝나면 다시 시작하여 돌아가게 한다."

*정약용의 '죽난시사첩서竹欄詩社帖序'에 나오는 문장이다. 죽난시사는 정약용 선생이 시詩 짓는 사람들과 만든 차茶 모임이다. 나이가 4년 많은 사람으로부터 4년 적은 사람까지 모이니 15명이었다. 이들이 모여 약속한 것이 이 내용이다.

옛사람들의 이 마음이 부러웠다.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모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그들대로 지금은 또 나름대로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누리면 되는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마음자리가 이어지는 이유다.

해가 바뀌어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지면 섬진강 매화와 눈속에 복수초 필때 한번, 변산바람꽃과 노루귀 필때 한번, 동강할미꽃 필때 한번, 깽깽이풀과 얼레지 필때 한번, 한계령풀 필때 한번, 병아리난초와 닭의난초 필때 한번, 참기생꽃 필때 한번, 지네발란 필때 한번, 병아리풀과 남개연 필때 한번, 금강초롱꽃 필때 한번, 해국과 물매화 필때 삼삼오오 모였다.

챙길 준비물은 따로 있을 까닭이 없다. 꽃 담을 폰이든 카메라든 이미 있고, 꽃보며 행복했던 눈과 마음이 있기에 빈손으로도 충분하다. 꽃을 사이에 두고 가슴에 품었던 향기를 꺼내놓고 꽃같은 마음을 나누면 그만이다.

꽃이 시들해지는 때가 오니 꽃길에서 만나지 못한 벗이 그리워 갯쑥부쟁이를 핑개로 다시, 바다를 건너 꽃놀이를 다녀왔다. 한해를 마감하기에는 턱없이 이른 때이긴 하지만 꽃쟁이들의 발걸음이 멈추는 시기이니 그것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벌써 섬진강 매화피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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